소설리스트

86화 (87/156)

* * *

나와 해리는 눈을 가린 채 엘프들의 안내에 따랐다. 생명수의 위치를 외부인에게 알릴 수 없기 때문에, 눈을 가린 채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는지, 저질 체력인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얼마나, 허억, 더, 허억, 걸어야 해요?”

헐떡이며 겨우 내뱉은 질문에 나를 안내하던 엘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10분 걸었다, 인간.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약한가?”

“제가, 허억, 조금, 허억, 특별하긴 해요, 허억.”

“그렇군. 이게 보통이라면 인간이란 종족은 도대체 얼마나 편리함에 취해 신체가 퇴화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라니 다행이군.”

이 엘프, 조곤조곤한 말투로 상대를 신랄하게 욕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서 거기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 기절할 것 같았다.

“도착했다.”

‘드디어!’

다행히 내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만세를 부르며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체력을 더 쌓는 게 좋겠다, 인간.”

나를 안내한 엘프가 눈을 가린 천을 풀며 그렇게 조언했다.

“이래서야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겠군.”

허리를 굽힌 채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엘프의 눈이 상당히 선량하고 진지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서 조언하는 거 같은데.’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럼 신체가 퇴화한 줄 알았다는 말도……?’

악의로 말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소리였다.

“엘프들은 다들 이렇게 당신처럼 솔직해요?”

내 질문에 엘프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하다는 건 뭐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맞다. 엘프들은 솔직하다.”

“물론 당신은 그중에서도 특히 그런 편이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엘프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처음 만난 인간에게 그걸 들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당신하고 1분만 대화해도 다들 알아차릴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엘프에게 손을 뻗었다. 도저히 혼자 일어날 힘이 없어 그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프는 내 손을 잡아당기지 않고 한참이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드디어 알아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설마 도와 달라는 건가?”

“설마 도와 달라는 거예요.”

내 대답에 엘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은 자립심이 없군.”

“겨우 이 정도에 무슨 자립심씩이나.”

나는 손을 흔들어 엘프를 재촉했다. 엘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내 손을 붙잡아 잡아당긴 이가 있었다. 해리였다.

“왜 날 두고 다른 놈한테 도움을 청해, 주인님?”

손을 잡아당기는 힘이 제법 강해서, 나는 제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넘어 해리의 품에 부딪히듯 안겨 버렸다. 해리가 남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엘프를 노려보았다.

당장 저리 꺼져라. 엘프를 바라보는 해리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이 다른 놈에게 애정을 줄까 봐 잔뜩 경계하는 강아지 같아.’

사람이 아닌 개의 모습이었다면 으르렁거리기까지 했을 게 분명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사나운 해리의 기세에 겁을 먹고 당장에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조금 특이한 엘프였다.

“왜 나에게 꺼지라는 거지?”

엘프가 해리에게 질문했다. 진심으로 답이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뭐…… 뭐?”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해리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나에게 꺼지라고 하지?”

“어?”

“그런 건 무엇인가 잘못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말의 용법을 제대로 모르는구나, 인간. 말을 다시 배우는 게 좋겠다.”

엘프가 친절하게 조언했다. 이번에도 역시,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한 조언이었다. 자신의 악의에 순수한 선의가 돌아오자 해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어어?”

그 소리에 엘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계속 어버버거리는 걸 보니 역시 말이 서툰 인간이었군.”

엘프가 안쓰럽다는 듯 해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제법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말이 서툴다니. 배움에 정진하도록 해라, 인간이여.”

“무…… 무슨!”

“최선을 다해 정진하다 보면 당신도 언젠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거다. 힘내도록 해라.”

엘프가 진지한 얼굴로 해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해리는 완전히 넋이 나가 그 꼴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카난, 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었구나.”

그때 타라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곤란하게?”

타라문의 말에 특이한 엘프 청년, 이카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나? 나의 조언이 곤란했나?”

“이카난, 모두가 조언을 원하는 건 아니다. 너의 조언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

타라문이 이카난을 달래며 나와 해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엘프들은 원래 사회성이 떨어진다. 이 녀석은 특히 더 그런 편이지.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숲에서만 처박혀 사니까 이렇게 사회성이 떨어지지.”

해리가 투덜거리며 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카난과 황당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해리도 조금 경계심이 풀린 것 같았다.

“저게 그 생명수인가?”

해리가 타라문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따라 몸을 틀자 거대한 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와아.’

한눈에 봐도 평범한 나무가 아니었다. 몸체의 둘레는 사람 100명이 둘러싸도 모자랄 만큼 두터웠고, 키는 하늘에 닿을 듯 높았다.

‘루셀 탑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야.’

경이로운 존재를 마주할 때의 벅찬 감정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잎이 전부 시들었어.’

분명 푸르렀을 잎들이 모두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생명수 아래에도 가지에서 떨어진 게 분명한 메마른 낙엽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엄청난 악취까지…….’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눈앞의 나무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생명수는 우리 엘프들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대로 둘 수는 없어.”

타라문이 생명수를 바라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마법사들의 실험으로 날씨가 이상해졌다. 거대한 벼락이 생명수를 강타했고, 그 이후 계속 이 상태다.”

아마도 에렐에 때아닌 폭우가 쏟아졌을 무렵의 사건인 것 같았다.

“깊은 숲에서 살던 트롤들이 갑자기 날뛴 것도 그 벼락 때문일 거다. 녀석들도 놀라서 뛰쳐나왔지.”

“그랬군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니 마법사들이 더욱 괘씸해졌다.

‘그 마법사들은 신처럼 전능한 힘을 얻는 게 꿈이라고 했지.’

날씨를 뜻대로 바꾸는 것도 그 꿈의 일부였다. 날씨는 오로지 신의 영역이었으니까.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뜻대로 날씨를 조종할 수 있다면, 오히려 도움 될 일이 많겠지.’

가뭄도, 홍수도, 추위도, 더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상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생긴다면, 그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이상이었다.

“저 마지막 남은 잎새가 우리의 희망이다. 저 잎마저 떨어지면, 생명수는 끝이야.”

타라문이 침울하게 말하며 생명수의 오른쪽 끝 가지를 가리켰다. 온통 갈색으로 시든 잎 가운데, 단 하나의 잎만이 초록을 뽐내고 있었다.

“태양의 심장이 저 잎을 살려 줄 수 있나요?”

“태양의 심장은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그 기운이 생명수를 살릴 거다. 그래야만 한다.”

생명수 아래에 붉은 돌이 놓여 있었다. 루셀 탑에서 본 붉은 돌과 비슷한 돌이었다.

[저건 진짜야. 충만한 기운이 느껴져.]

해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상하네. 생명수가 태양의 심장에서 나오는 기운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있어. 이 상태라면 저 생명수, 천 년이 지나도 회복이 안 될걸.]

유피테르도 해리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천 년은커녕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생명수가 신물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해리와 유피테르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도 답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어쩌지?’

저렇게 대단한 나무가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엘프들이 절망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저런 신비한 나무가 죽으면 진짜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기분이겠지.’

나는 천천히 생명수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가는 건……”

이카난이 놀라서 나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타라문이 그를 막았다.

“그냥 둬라, 이카난.”

모든 엘프들이 내가 생명수에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 선 경계심과 일말의 기대감. 상반된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내게 쏟아졌다. 그렇게 수많은 시선의 압박 속에서 나는 무사히 생명수 앞에 도달했다.

‘윽. 기절할 것 같은 냄새.’

뿌리에서부터 썩는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생화학 무기가 따로 없었다.

‘우선 이 냄새부터 어떻게 좀 해결하자.’

나는 유피테르를 손에 쥐고 검신을 땅에 꽂았다.

[유피테르, 이 냄새도 정화할 수 있어요?]

[글쎄요. 나무에 이 기능을 쓰는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도 생명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우선 시도는 해 보죠. 이 냄새 때문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거든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는 해 볼 수 있었다. 정화가 실패하면 어쩔 수 없이 코를 틀어막아야겠지만 말이다.

[예, 주인님. 정화해 보겠습니다.]

유피테르가 다부지게 대답하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트롤의 시체에서 악취를 지우던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점차 옅어지는 냄새를 맡으며 확신할 수 있었다.

‘효과가 있어!’

은은한 빛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가며 나무뿌리의 썩은 냄새를 지워 갔다.

‘뿌리가 정화된 건가? 그럼 잎들도 제대로 돌아온 게 아닐까?’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잎들은 여전히 메마른 갈색이었다.

‘에이. 그냥 냄새만 없앤 거구나.’

사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성검을 땅에 그대로 꽂아 둔 채 태양의 심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에서 보니 루셀 탑에서 본 붉은 돌과 완전히 똑같은 외형이었다.

‘마법사들이 가짜를 정말 잘 만들긴 했었구나.’

중요한 신물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가짜라고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생명수가 이 심장의 기운을 흡수하기만 하면 바로 문제 해결인데.’

왜 생명수가 심장의 기운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마법사들이 태양의 심장에 걸었다는 결계 때문인가?’

벼락 맞는 걸 피하려고 29명의 마법사가 힘을 모아 태양의 심장을 묶어 놓았다고 했다. 그 결계 때문에 심장의 생명력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법사한테 결계를 풀어 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태양의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 이름이 태양의 심장이어서 그런지, 손끝에 닿은 돌이 조금 뜨거웠다.

‘뜨거운 돌이라니.’

어쩐지 우스워서 픽 하고 웃음을 흘리는 순간. 기이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었다.

“읏!”

나는 놀라서 손을 뗐다. 다가오는 사람이 위협받지 않도록 결계를 걸어 놨다더니, 그것마저도 뭔가 어설프게 걸린 모양이었다.

“이놈의 마법사들은 뭘 제대로 하는 게 없……”

하지만 나의 투덜거림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왜 이러지?”

태양의 심장에서 선명한 붉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며 해리와 엘프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이상한 빛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몹시도 평온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이 붉은빛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설마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붉은빛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양의 심장 주변에서 일렁거리던 붉은 빛이 빠른 속도로 내 손을 향해 밀려들었다. 정확히는 내 손이 아니라 내가 낀 반지를 향해서였다.

반지의 붉은 보석이 태양의 심장에서 나온 빛무리를 흡수하고 있었다.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속도는 매우 빨랐다. 내가 영문을 몰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와중에 모든 빛이 반지 속 보석으로 흡수되었을 정도였다.

‘무, 무슨 일이지?’

나는 당황해서 반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건 태양의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붉은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나 제대로 사고 친 것 같아…….’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뭔가 저질렀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내 옆으로 무엇인가 툭 떨어졌다. 동시에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엘프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쏟아졌다.

“말도 안 돼!”

“세상에!”

숫제 경악에 찬 외침들이었다. 나는 불길한 기운을 애써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옆에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엘프들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유일한 푸른 잎. 그 중요한 잎이 달린 나뭇가지가 내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가지를 다시 생명수에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피테르, 혹시 접착 기능 같은 건 없죠?]

[……예.]

[……1047가지 기능이 있는데, 이럴 때 쓸 능력은 하나도 없네요.]

[……부족한 검이라 죄송합니다, 주인님.]

유피테르가 나만큼이나 황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멍하니 가지를 바라보며 현실 도피를 하는 동안 엘프들은 난리가 났다.

“저 인간이 생명수를 죽였다!”

“우리를 속이고 생명수를 죽이러 온 인간이 분명하다!”

“인간을 우리 영역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엘프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어느새 그들의 눈에서 일말의 기대감이 모두 사라지고, 날 선 경계심만이 남았다. 금방이라도 화살이 날아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엘프들에게 포위당한 해리가 귀찮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내 허락만 떨어진다면 여기 있는 생명 모두를 쓸어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기회가 없었다.

“무기를 내려라, 아이들아. 이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새겨졌다. 목소리는 상당히 기이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큰 소리가 아님에도 온 공간을 울렸다.

엘프들이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목소리는 나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낯선 소리인 것 같았다.

“아이들아, 나는 너희들의 시작과 끝이다. 분노를 거두고 내 목소리를 들어라.”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설마…….”

모두가 무기를 들 때, 유일하게 무기를 들지 않았던 타라문이 경악에 찬 얼굴로 생명수를 향해 걸어왔다.

“당신이십니까, 아버지?”

“그렇구나. 너희는 또한 나를 그렇게 부른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생명수의 목소리에 엘프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시작과 끝!”

엘프들의 외침에 생명수가 화답했다.

“그래.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 너희들의 시작과 끝. 너희들의 언어로 불리는 모든 것이다.”

생명수의 목소리는 아주 인자해서, 엘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들아, 나의 마지막 말을 들어라.”

‘마지막 말이라면, 역시 이 생명수는 죽는 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엘프들이 울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아버지.”

“너희는 온 땅을 푸르게 할 사명을 지닌 아이들이다. 그러나 사명을 잊고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고여 있는 기운이 나를 병들게 하였다. 나는 병들어 벼락을 이겨 내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 생명수의 가지에서 메마른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잎새를 지닌 가지와 함께 새로운 땅으로 가라. 그곳에 터전을 잡고, 땅을 푸르게 만들어라. 나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딘가 신성함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너희들은 여기 이 인간을 따라나서라. 우리의 길잡이, 우리의 시작과 끝을 정할 인간. 이 여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

생명수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가지에 붙어 있던 나뭇잎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이 허전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풍경을 보며 안타깝게 탄성을 내뱉은 엘프들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생명수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생명수가 말했던 인간 여인.

‘……누가 봐도 난데?’

엘프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그들의 시선이 우르르 내게 꽂혔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시선 집중이었다. 고요해진 엘프들 가운데 타라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다가왔다.

“이브리아 오베론, 그대가 우리의 길잡이였나?”

타라문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했지만, 말투는 한결 친근하게 변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거였어. 모든 것이 생명수의 뜻이었군.”

타라문이 그렇게 말하며 생명수의 유일한 푸른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잎이 상하지는 않을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바닥에 꽂아 두었던 유피테르를 슬그머니 뽑았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이건 오해다. 오해여야만 한다.

‘내가 이 많은 엘프들을 전부 책임져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나는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개의 눈이 하나같이 부담스럽게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꼭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타라문에게로 눈을 돌렸다.

“전 엘프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고요. 나무를 키우기는커녕, 땔감으로 쓴다면서 태워 버린 것만 수십 그루는 될 거예요.”

청요석을 만들기 위해 수액을 받아 낸 나무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나무를 상하게 했다. 자연 보호냐 도시 개발이냐.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당연히 도시 개발 쪽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건 좋다. 힐링도 되고.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보고 그걸 앞장서서 이끌라고 한다면?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도시가 개발돼서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게 더 좋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나는 엘프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제가 어떻게 엘프들의 길잡이가 되겠어요?”

하지만 내 말에도 타라문은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생명수가 그대를 길잡이라고 말했다. 설마 우리의 아버지가 틀린 말을 했다는 건가?”

호의적으로 변했던 타라문의 목소리가 다시 냉정하게 얼어붙었다. 감히 네가 우리 생명수의 말을 판단하느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뇨,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원래 믿음이 깊은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것이 특히 신에 대한 믿음이면,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 눈이 뒤집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없군.”

타라문이 그럼 그렇지- 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을 따르겠다, 길잡이여. 그러니 말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타라문을 비롯한 엘프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딘가 대단한 곳으로 자신들을 이끌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냐고!’

나는 어설픈 빙의자라 이 대륙 지리도 제대로 모른다.

‘정말……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내가 원한 적도 없는데, 자꾸 이상한 녀석들이 내 손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실래요? 거기 괜찮은 숲이 하나 있는데.”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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