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태양의 심장
나는 감사하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린드모어 백작과 기사들을 겨우 돌려보냈다.
해리의 불에 타서 죽은 트롤이 전부는 아닐 테니,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난 게 아니었다. 물론 트롤의 수가 엄청나게 줄어 전세가 그들에게 유리해지기는 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대화할 시간이네요.”
나는 우두머리 엘프와 마주했다.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활을 겨누고 있지는 않으니 어느 정도 호의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너의 판단에는 감사한다.”
우두머리 엘프가 동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무사한 엘프들이 상처를 입은 엘프들을 치료하느라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했다.
‘만약 해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피해가 더 컸을 거야.’
지금이야 부상자로 그쳤지만,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부상자의 수도 지금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숲을 태워 버렸는데, 비난하지 않을 건가요?”
“네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다시 숲을 일굴 수 있다. 그게 엘프지.”
우두머리 엘프가 검게 변해 버린 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숲과 함께 사느라 그걸 잊고 있었다. 폐허에 숲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엘프의 사명인 것을.”
주변을 한 바퀴 훑은 우두머리 엘프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숲의 후예들, 엘프 일족의 족장 타라문이다.”
드디어 우두머리 엘프의 이름을 알게 됐다.
‘어느 정도는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타라문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이브리아 오베론이에요. 부족하지만 에렐의 영주직을 맡고 있죠.”
“성검의 주인이자 대마법사의 복종을 얻은 자. 영주라는 말보다는 그쪽이 더 당신을 설명하기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전 그냥 작은 영지의 영주로 족합니다.”
‘거창한 직함은 귀찮은 일을 동반하거든요.’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며 타라문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거렸다.
“명성에 집착하지 않다니 신기한 인간이군. 그 점에서는 우리 일족과 비슷하다.”
“그런가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호의가 느껴졌다.
“이렇게 통한 것도 인연이니 태양의 심장을 돌려주면……”
“아무리 그래도 태양의 심장은 줄 수 없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타라문이 딱 잘라 나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의 얼굴에 확실하게 서려 있던 호의도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폐허에서 숲을 만들어 내는 게 엘프의 사명이라면서요? 생명수도 다시 키우면 되잖아요.”
“생명수는 우리 일족의 아버지다. 너희 인간들은 부모를 다시 만드나?”
“하지만 죽어 가고 있다면서요.”
모든 자연물에는 수명이 있었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아무리 고귀한 생명수라도 시간은 피해 갈 수 없으리라.
“이제 생명이 다한 게 아닐까요?”
내 질문에 타라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주 건강했다. 마법사들이 태양의 심장을 가져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기 전까지는.”
타라문이 우리를 안내한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마법사는 투박한 끈으로 단단히 결박당해 엘프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가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트롤이랑 싸울 때도 도움 하나 안 됐고.’
구해 줘 봤자 지금 상황에서도 도움 하나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마법사를 외면하고 타라문에게 물었다.
“태양의 심장이 있으면 생명수가 확실히 치유되기는 하는 거죠? 얼마나 기다리면 생명수가 치유되는데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면 생명수가 치유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유혈 사태를 벌이는 것보단 그쪽이 덜 귀찮지.’
하지만 타라문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
“그럼 최악의 경우 백 년, 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
타라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는 백 년, 천 년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인 내게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태양의 심장을 여기 둘 수는 없어요!”
“우리도 태양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싸워서 억지로 가져가는 수밖에 없죠.”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주인님.]
그때 유피테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우선 생명수를 살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생명수를?]
[예. 저나 악마가 생명수가 병든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의 지식은 인간과 엘프보다 훨씬 깊고 넓으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유피테르나 해리는 종종 내가 모르는 이 세상의 지식을 알려 줄 때가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면, 태양의 심장 없이도 생명수를 치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평화롭게 태양의 심장을 얻을 수 있지요.]
[누가 성검 아니랄까 봐, 그런 답답한 소리를.]
나와 유피테르의 대화에 해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브리아, 성검 놈이 말한 대로 다른 방법을 찾는다고 쳐. 그것도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걸. 그전까지 저 고집 센 엘프들은 태양의 심장을 안 줄 거고.]
해리의 말대로 엘프들은 상당히 고집스러워 보였다. 내가 제 말에 조금 동조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해리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러니까 편리하게 다 쓸어버리자. 응? 어떤 물건이든 죽은 놈한테서 받아 오는 게 제일 편하잖아.]
[결국, 목적은 그거였네요.]
왜 해리의 입에서 다 죽이자는 말이 안 나오나 했더니, 드디어 그 소리였다.
[트롤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또 누굴 죽이고 싶어요?]
유혈 사태는 당장 일을 해결하기에는 좋았지만, 뒷일을 수습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서부 귀족들과 왕국 각지에서 몰려온 기사들이 내가 엘프들과 함께 있는 걸 봤어.’
갑자기 엘프들이 몰살당한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은 나였다. 목격자도 없는 일이니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있겠지만, 추궁받는 것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유피테르의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타라문, 제가 생명수를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의견을 기각당한 해리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