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5/156)

* * *

서부 영지의 영주들과 왕국 각지에서 지원을 온 기사들은 리안트로 숲에서 몰려드는 트롤을 상대하느라 잔뜩 지쳐 있었다. 왕국 각지에서 지원이 온 이후, 서부 연합의 병력만으로 견디던 때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엄청난 수의 트롤 때문에 인력난에 허덕이는 건 여전했다.

덕분에 기사들은 잠깐 눈 붙일 새도 없이 늘 트롤을 상대해야만 했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밀리면 곧장 일반인들이 살고 있는 영지로 트롤이 들이닥칠 상황이었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트롤들을 상대하다 보니 매일같이 부상자와 사망자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한 명의 부상자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기사단은 왕도에서 파견된 왕립 기사단과 에렐에서 지원을 나온 서리 기사단뿐이었다.

“왕립 기사단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에렐의 서리 기사단이 저렇게 강했어?”

대충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던 기사 하나가 와이번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서리 기사단을 힐끗대며 속삭였다.

“원래 에렐의 기사들은 용병 출신이 많았잖아? 오합지졸이라고 그랬는데.”

그들이 용기사단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냥 보여 주기식의 변화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와이번을 타고 싸우는 서리 기사단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저 기사들은 봤겠지?”

“뭘?”

“성검 말이야! 그쪽 영주가 성검을 뽑았다잖아.”

서리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인, 이브리아 오베론으로 이어졌다.

“기사도 아닌 귀족 아가씨가 성검을 뽑다니. 제대로 검도 못 다룰 게 분명한데.”

기사 하나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한쪽에서 금세 반박이 돌아왔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후손도 그 여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데? 그럼 뭔가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성검 하나만이라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충성까지 받아 냈다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일 수가 없었다. 우연도 두 번 이상 겹치면 운명이 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군.”

기사 하나가 의미 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끊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앉은 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오늘따라 너무 조용해.”

평소라면 트롤들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트롤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거대하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리안트로 숲에서 흘러나온 이후, 모든 트롤들이 그쪽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전선이 평화로웠다.

“태풍이 불어오기 전이 가장 고요한 법이라던데. 오늘 무슨 일이 터지는 거 아냐?”

“이봐,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마. 지금도 충분히 최악이니까.”

“맞아.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이렇게 좋은 날에는 그냥 입 다물고 평화를 즐기자고.”

여기저기서 동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모든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리안트로 숲에서 엄청난 비명이 들려왔다.

“키에에에에에엑!”

트롤의 비명이었다.

“키에에엑!”

“키에에에에에에에엑!”

한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 마리의 비명이 연이어 숲을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게다가 저건……!”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린 기사들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숲 한가운데서 푸른빛의 커다란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말이 씨가 된 수준이 아니라……”

“씨에서 싹도 나고 꽃도 피고 난리 났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기사들의 귓가에 긴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출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해리의 손에서 시작된 거대한 불길이 트롤들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트롤들이 커다란 비명만 내지른 뒤 검은 통구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해리가 걱정했던 대로, 그가 날려 버린 건 트롤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초록의 나무들 역시 검은 숯으로 변해 울창하던 숲은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쌓인 트롤의 검은 시체와 불의 잔열이 남아 있는 나무들.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냄새도 최악이야.’

시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해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세상에…….”

엘프들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척이나 황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그들의 얼굴에 묻어나 있었다. 우두머리 엘프는 엉망이 된 숲이 아닌, 그런 동료 엘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숲은 다시 키우면 돼요. 당신들은 엘프잖아요.”

우두머리 엘프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멋대로 숲을 태웠으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의 시선이 침착했다.

“원래도 여긴 허허벌판이었다면서요? 생명수 하나로 시작해 숲을 일궜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어요.”

내 말에 우두머리 엘프가 눈을 내리깔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렇다.”

오랜 생각 끝에 그가 입을 뗐다.

“어느 곳에 뿌리내리든 숲을 일군다. 그게 우리 엘프지.”

우두머리 엘프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다시 아름드리나무들로 찬 이곳의 풍경을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마 엘프들만의 언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선율만으로도 노래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애도의 노래였다.

‘죽은 나무들을 위해 부르는 건가?’

한 명의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에 다른 엘프들도 하나씩 동참했다. 신비로운 선율이 금세 숲을 가득 채웠다.

‘이 아름다운 노래에 시체 타는 냄새는 안 어울려.’

사실은 내가 더 이상 이 역한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을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걸음을 옮겨 트롤들의 시체 앞에 섰다.

[유피테르, 이 시체들에도 정화 기능을 쓸 수 있을까요? 그 냄새 없애는 기능이요.]

[물론입니다. 드디어 그 기능을 쓸 수 있는 날이 왔군요!]

유피테르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유피테르를 쥐고 검게 변한 트롤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정화해 줘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유피테르가 은은한 빛을 냈다. 은은한 빛은 시체에서 시체를 넘나들며 고약한 냄새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노래, 은은한 빛, 사라져 가는 악취.

‘뭔가 성스럽게 느껴지지 않나?’

누가 보면 대단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줄 알 것 같았다.

“영주님?”

그때 전투태세를 갖춘 대규모의 기사들이 폐허 속으로 들어왔다. 나를 부른 건 그 무리에 섞여 있던 라이오넬이었다. 그의 말에 함께 온 기사들도 모두 내 정체를 알아챈 것 같았다.

“저분이 성검의 주인……?”

기사들의 시선이 차례로 주변 풍경을 훑었다. 엉망이 된 숲과 떼죽음을 당한 트롤. 시체에 검을 꽂고 있는 나와 은은한 빛. 거기다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엘프들의 노래까지.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저, 이건……”

내가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는 순간.

“성검의 주인께서……”

기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성검의 주인께서 트롤을 모두 물리쳤다!”

“성검의 주인이 트롤들을 이겼다!”

그 뒤는 엘프들의 노래가 퍼지는 과정과 비슷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느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되고, 세 사람의 목소리가 되고, 급기야는 기사들 전체의 목소리가 됐다.

“성검의 주인 만세!”

“성검의 주인께서 서부를 구했다!”

여기저기서 성검의 주인을 찬양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그런데 그 성검의 주인이 나라니.’

너나 할 것 없이 소리를 높이는 사람 가운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우리 영주님! 우리 주군! 정말 훌륭하십니다!”

나는 슬그머니 트롤의 등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았다.

‘역한 냄새 한번 없애려다 무슨 오해를 받는 건지.’

진짜 트롤들을 해치운 건 내가 아니라 해리였다.

“해리.”

‘어서 나서서 해리가 한 일이라고 말해요!’

해리는 자신의 강한 힘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당연히 나서서 제 자랑을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해리는 아주 뿌듯한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 우리 이브리아가 좀 대단하지. 다들 마음껏 칭송하라고.”

‘……오히려 오해를 더 부추기고 있잖아.’

답답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대가 성검의 주인, 오베론의 영주입니까?”

난처하게 서 있는 내게로 휘황찬란한 갑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갑옷이 예쁘게 반짝거리는 걸 보니 전투에 직접 나서는 사람은 아니겠군.’

아마 이들의 지휘관쯤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브리아 오베론이에요.”

“저는 서부 귀족 연합의 린드모어 백작입니다. 이번 트롤 토벌의 총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린드모어 백작령이라면 리안트로 숲과 바로 경계가 닿아 있었다. 트롤과의 싸움에서 리안트로 숲 전선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영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번 토벌의 총지휘를 맡았구나.’

게다가 서부 경계 지역에서는 린드모어 백작령이 가장 크고 발전한 도시였다. 그렇다 보니 서부 귀족 중에서는 린드모어 백작의 입김이 가장 강했다. 여러모로 그가 이번 트롤 토벌의 총지휘관 역할을 맡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섭게 날뛰는 트롤 때문에 서부 경계의 모든 영지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왕국 각지의 지원을 받아 어떻게든 막고 있었지만, 트롤의 수가 워낙 많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요.”

린드모어 백작이 기사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검의 주인께서 직접 나서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보내 주신 용기사들도 엄청나게 큰 힘이 되었는데…….”

백작의 눈에 서서히 감격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백작의 눈에 감동이 가득 차기 전에 재빨리 나서서 진실을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에요. 여러분을 도우려고 온 건 아닙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저 에렐의 평화로운 날씨를 위해 태양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엘프들이 태양의 심장을 가져갔고, 그 엘프들이 하필 리안트로 숲에 살았고, 그 리안트로 숲이 하필 서부 경계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온통 진실로 가득한 나의 항변은 완전히 실패했다.

“성검의 주인께서는 선량한 뜻과 대단한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성품까지 갖추셨군요.”

오히려 린드모어 백작이 조금 전보다 더 감격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린드모어 백작의 등 뒤에 도열한 기사들마저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린드모어 백작과 기사들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완전히 망했다. 아주 폭삭 망했다.

‘처음 흑철목을 태웠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내가 항변을 하면 할수록, 집사는 나를 더욱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그런 과거의 경험 덕분에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냥 입 다물고 웃기나 하자. 그게 제일 효과가 좋겠어.’

내 악역 미소는 아주 강력했다. 세상의 어떤 선한 의도도 음흉함으로 바꿔 주는 힘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악역 미소도 통하지 않았다.

“성검의 주인께서 이렇게 위엄 넘치는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이 내 악역 미소에 상기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감동한 얼굴이었다.

‘왜…… 왜 이 미소를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해석하는 거야!’

내가 속으로 경악하는 사이 백작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부 연합을 대표하여 성검의 주인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당신께서 우리 서부를 구하셨습니다.”

린드모어 백작의 뒤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도 그와 똑같이 내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기사들의 우렁찬 인사가 폐허가 된 숲을 가득 채웠다.

“서부는 당신의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백작의 정중한 인사에 나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그냥 잊어도 돼요……. 아니, 고마우면 그냥 잊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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