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156)

* * *

나와 해리는 우리를 도울 마법사 한 명과 함께 와이번을 타고 곧장 서부 경계로 향했다. 처음 하늘을 날아 본 그는 와이번에서 내리자마자 나무를 붙잡고 연신 구토를 해댔다. 그렇지 않아도 빼빼 말라 허약해 보이는 마법사가 얼굴까지 창백하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엘프를 찾아가기도 전에 저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거 아냐?’

나는 걱정스럽게 마법사를 힐끗거리며 해리에게 물었다.

“엘프들은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어요?”

“걔들은 깊은 숲속에 살아. 나무나 돌을 이용해서 은신처를 숨기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기는 힘들지.”

그러고 보니 엘프를 만났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엘프도 드워프처럼 인간들을 싫어해요?”

“인간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나무가 없는 환경을 싫어해. 그런데 인간들은 터전을 만들 때 나무부터 베어 넘기고 시작하잖아?”

“확실히 서로 상성이 안 맞겠네요.”

“그러니까 이런 숲에 틀어박혀서 사는 거지.”

해리가 리안트로 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울창하고 푸르른 숲. 검은 숲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이 숲이 이렇게 크지 않았어. 시작은 생명수였지. 나머지는 전부 엘프들이 가꾼 거야.”

“나무 하나를 시작으로 이렇게 큰 숲을 만들었다고요?”

나는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울창한 숲을 만들어 내려면 족히 천 년은 걸릴 것 같았다.

“엘프들은 원예에 재능이 있나 봐요. 드워프들이 모두 뛰어난 장인인 것처럼.”

“원예…….”

내 말에 해리가 입을 떡 벌렸다.

“엘프들의 재능을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처음 봐.”

“하지만 식물을 잘 키우는 거니까 원예에 재능 있는 게 맞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지만…….”

해리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에 동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식물 잘 키우는 거면 원예에 재능이 있는 거 맞지, 뭐.’

“그럼 엘프들은 농사도 잘 짓겠네요.”

“……농사? 엘프가?”

해리가 여전히 애매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건 또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인데.”

“농사도 결국 식물을 키우는 거잖아요. 그럼 농사도 엄청나게 잘 짓지 않을까요?”

‘에렐 같은 척박한 땅에서도 식물을 잘 키우려나?’

엘프들을 만나면 추운 에렐에서 작물을 키울 방법이 없는지 물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에렐은 농사짓기가 정말 힘든 땅이지만, 엘프의 지식으로는 다를 수도 있겠지.’

농사는 에렐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아무리 찾아도 해결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상업을 발전시키는 건 할 수 있지만, 추운 기후는 어쩔 수가 없는걸.’

그나마 감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감자는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라, 에렐 사람들의 귀중한 식량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 외 나머지 식량은 전부 외부에서 수입했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니 자연스레 식재료도 비쌌다. 에렐의 미식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이유도 부족한 식재료 탓이 컸다.

하지만 엘프들의 뛰어난 원예 지식으로 에렐에서도 밀 같은 작물을 기를 수 있다면? 식량이 안정되고 미식 문화가 발전할 바탕을 다지게 될 것이다.

‘맛있는 걸 만드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지.’

그렇지 않아도 왕도에서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온 탓에 에렐의 음식에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난 지금 엘프들이 가져간 태양의 심장을 뺏으러 온 거잖아.’

그런 사람에게 작물 키우는 지식을 흔쾌히 알려 주진 않을 것 같았다.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해리만 있다면 누구든 협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엘프들을 만나야 가능한 이야기니까.’

“엘프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돼요?”

“엘프들은 생명수 근처에 모여 살고 있으니까, 그걸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해리가 불확실하게 말을 흐렸다.

“생명수가 어딨는지 몰라.”

“모른다고요?”

“응. 걔들이 나무랑 돌로 은신처를 만든다고 했잖아. 그래서 생명수가 어딨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당당하게 리안트로 숲으로 데려온 건데요?”

“생명수가 이 숲에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럼 이 넓은 숲을 전부 수색해야 한다는 거예요?”

해리의 태평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붙잡고 구토를 하던 마법사가 겨우 안정을 찾고는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태양의 심장에는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벼락을 맞지 않으려고 29명의 마법사가 힘을 모아 신물에 결계를 만들어 뒀습니다. 그 결계의 기운을 쫓아가면 됩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벼락을 맞는다는 신물을 어떻게 옮길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정이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신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으면서도 찾으러 나서지 않은 건가요?”

비난 섞인 내 목소리에 마법사가 억울하다는 듯 한탄했다.

“엘프들은 모두 뛰어난 궁수이자 암살자입니다. 상성을 생각하면 저희 마법사들이 전투에 아주 불리하죠. 한 번 쳐들어갔다가 다들 부상만 안고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병동에 누워 있지요.”

거기까지 말한 마법사가 해리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그를 추켜세웠다.

“물론 대마법사의 후손 정도 되는 강한 마법사라면 그런 상성도 크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움을 청하려고 한 겁니다.”

원래부터 칭찬에 약한 해리는 단번에 그 말에 넘어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나 정도 되는 마법사는 엘프도 쉽게 이기지. 이런 숲에서는 특히 불을 쓰는 마법사가 유리하기도 하고.”

느낌이 왔다. 이대로 가만히 뒀다가는 해리의 자랑이 끊임없이 계속될 거라는 느낌이.

‘그건 한번 시작되면 쉽게 멈출 수도 없어.’

나는 해리의 자기 자랑이 계속되기 전에 재빨리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럼 어서 추적을 시작하죠. 한시라도 빨리 심장을 루셀 탑에 돌려놔야 하잖아요?”

내 말에 마법사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검은 수정이 박힌 지팡이를 꺼내 든 그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지팡이의 수정에서 반짝-하고 빛이 흘러나와 실처럼 길게 뻗어 나갔다.

“이 빛을 따라가면 태양의 심장이 있을 겁니다.”

빛은 울창한 숲 깊은 곳을 향해 있었다.

* * *

숲 탐방에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저질 체력이었다. 나는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무거운 다리를 겨우 움직였다.

‘너무 힘들어.’

하지만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저 마법사도 아직까지 멀쩡하게 숲을 걷고 있지 않나?

‘내 몸이…… 내 몸이 이렇게 쓰레기일 리가 없어……!’

아무리 성검이 인정한 인간 최고의 쓰레기 몸이라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생긴 저 마법사보다 내 체력이 더 약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떨어진 체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금세 뒤처져 두 사람의 등을 보며 걷는 처지가 됐다.

“이브리아?”

나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해리가 금세 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왔다.

“입술이 파래.”

“그 정도예요?”

“응. 완전히 파란색이야.”

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손으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맞닿은 그의 손가락이 꽤 따뜻하게 느껴진 걸 보면 체온도 뚝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해리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안 되겠어.”

그렇게 말한 해리가 한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팔이 내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의자에 앉은 듯 편안한 느낌이었다.

“이러고 가려고요?”

“왜? 불편해?”

“그런 건 아닌데, 날 업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쪽이 체력 소모가 덜할 것 같았다.

‘한쪽 팔로 한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어 보여.’

하지만 해리는 고개를 저어 내 의견을 기각했다.

“뒤에서 공격이 오면 네가 위험하잖아. 이게 나을 것 같아.”

해리가 주변을 경계하며 말했다.

그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걱정할 정도로 숲의 분위기가 기이했던 것이다.

‘너무 조용해.’

원래 숲은 고요하다. 하지만 자연적인 소리는 있어야 옳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라든가, 새가 날아가는 소리라든가. 하지만 지금 이 숲에는 그런 소리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그 녀석들 영역에 들어온 것 같은데…….”

해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우리를 향해 무엇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해리는 가볍게 몸만 틀어 그것을 피했다. 우리를 스치고 간 물체가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투박하게 만든 화살이었다.

“확실히 그 녀석들 영역이군.”

상대의 정체가 확실해지자 해리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야, 엘프! 치사하게 숨어서 공격하지 말고 나와.”

하지만 상대가 그걸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상대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해리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또 한 번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우수수 화살이 쏟아졌다.

“으아아!”

마법사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보호막이라도 펼치려는 건지 주문을 계속 중얼거렸지만, 근처에 꽂히는 화살에 놀라 비명을 지르느라 매번 주문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쩔쩔매는 마법사와 달리 해리는 상당히 여유로웠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해리가 짜증스럽게 화살을 피하며 나를 안지 않은 손을 들어 푸른 불꽃을 만들어 냈다.

“안 나오면 이 숲 다 태워 버린다! 이 푸른 불꽃 보이지? 내 불은 진짜 이거 다 태울 수 있어!”

해리의 협박에 날아들던 화살이 뚝 끊겼다.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진짜 이 불 바닥에 던져 버릴 거야. 하나! 둘! ㅅ……”

“그만둬라!”

해리가 셋을 모두 세기 전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엘프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 엘프다.’

나는 급박한 와중에도 엘프의 외모에 감탄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요정 같은 외모였다. 사실 모두 곱게 생겨서, 성별이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당하고 또 찾아왔나, 마법사들이여.”

활을 든 채 우리를 둘러싼 엘프들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며 가까워졌다.

“손에 있는 불을 꺼라. 그렇지 않으면 저놈의 머리통을 뚫어 버리겠다.”

나와 해리를 향해 있던 화살의 일부가 바닥을 설설 기고 있는 마법사로 향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일행이었다면 꽤 효과적이었을 협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별 감흥이 없었다.

“뚫으시든가.”

해리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오히려 엘프들이 당황해 술렁였다.

“마법사들은 의리가 없나?”

“그러는 엘프들은 예의가 없나? 다짜고짜 화살부터 날려 대고 말이야.”

해리가 바닥에 꽂힌 화살을 발로 툭툭 쳤다.

“이게 내 주인님한테 스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 그럼 이런 대화도 없어. 그냥 전부 주옥 되는 거야. 그러니까 예의를 좀 지키자고, 엘프.”

“침입자에게 차릴 예의는 없다. 당장 우리 땅에서 떠나라.”

“태양의 심장을 돌려줘. 그럼 돌아갈 테니까.”

“그건 돌려줄 수 없다.”

“너희도 알잖아? 그게 있어야 할 곳에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해리의 말에 단호하던 엘프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엘프들 역시 태양의 심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대화를 주도하던 엘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불가하다. 생명수를 치유하는 게 먼저다. 태양의 심장이 있어야만 해.”

숲 전체에 날 선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그때, 매서운 침묵을 뚫고 쿠웅- 하는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우리를 경계하고 있던 엘프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해리 역시 엘프들에게서 눈을 떼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웅. 또다시 거대한 울림이 숲을 울렸다. 이번 울림은 첫 번째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거 상당히 불길한데.’

매우 불행하게도, 나의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적중하는 편이었다.

쿠웅.

거대한 울림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거의 코앞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이봐, 엘프.”

“이봐, 마법사.”

엘프와 해리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허공에서 부딪친 두 시선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리가 씩 웃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우선 저쪽부터 해결하고 너희의 예의에 대해 논하는 게 어떨까?”

“동의한다. 저쪽을 먼저 치고, 너희 침입자들 역시 쫓아내겠다.”

“너무하시네. 필요할 때만 손을 빌리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다.”

그 말을 끝으로 수많은 엘프들의 화살 끝이 우리에게서 돌아갔다. 그들의 화살 끝이 향한 곳은 거대한 울림이 다가오는 수풀 너머였다. 엘프들의 활이 수풀을 조준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거대한 갈색 생물체들이 튀어나왔다.

“키에엑!”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키에 털 없이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를 가진 괴물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리안트로 숲에 나타날 괴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저게 트롤이에요?”

내 질문에 해리가 트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생력이 강해서 조금 까다로운 놈들이지.”

“그래요? 되게 못생겼다.”

고요한 가운데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숲을 울렸다. 되게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돌림 노래처럼 공간을 울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해리가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였다.

“……저, 쟤들이 말은 못 해도 알아듣기는 하거든. 와이번처럼.”

해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분노에 찬 트롤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키에에에! 키에! 키에에에!”

처음 등장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울음이었다.

“키에! 키에에에! 키에에엑!”

트롤들이 발을 구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확실했다. 저 트롤들, 못생겼다는 소리에 엄청나게 분노했다. 살벌한 눈빛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수들도 못생겼다는 말은 싫어하는구나.’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슴에 새기며 분노한 트롤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위협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발을 구를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키에엑! 키에에에엑!”

울음이 동료를 불러 모으는 신호라도 되는 건지, 멀리서부터 거대한 발걸음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는데.’

“지금이라도 잘생겼다고 칭찬해 볼까요?”

“그건 이미 늦은 것 같아.”

해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씩씩대던 트롤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쾅거리며 달려드는 트롤의 수가 한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저걸 이길 수 있겠어요? 트롤이 엄청나게 많아요.”

불안해져 해리의 옷자락을 꽉 쥐자, 그가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었다.

“트롤은 재생력이 아주 강하지만 약점도 분명히 있어. 불로 지져 버리면 신체를 재생할 수 없거든. 그런데 내가 하필 푸른 불꽃의 마법사잖아?”

해리가 다소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엘프들을 위협하기 위해 불러냈던 푸른 불꽃을 가장 선두로 달려오는 트롤에게 날려 버렸다.

“키에에에에엑!”

불꽃을 맞은 트롤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검은 덩어리로 변했다. 둔탁하게 바닥에 쓰러지는 동료를 보며 트롤들은 더욱 흥분해서 달려드는 속도를 높였다.

“엘프!”

해리가 다급하게 엘프를 불렀다.

“트롤의 눈을 쏴서 움직임을 차단해! 그럼 내가 지금처럼 다 태워 버릴 테니까.”

“그러지.”

해리의 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우두머리 엘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말을 엘프들에게 전했다.

“모두 트롤의 눈을 노려라! 놈들의 움직임을 차단해!”

우두머리 엘프의 지시에 멈춰 있던 엘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리한 것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활이 일제히 화살을 내뿜었다. 엘프들의 화살은 말 그대로 백발백중이었다. 움직이는 트롤을 향해 화살을 쏘면서도 목표인 눈동자를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키에에엑!”

눈에 화살을 맞은 트롤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음은 해리의 차례였다. 해리의 손이 쏜 푸른 불꽃이 바닥을 뒹구는 트롤을 순식간에 태워 버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트롤들은 강력한 불길에 손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새카만 덩어리가 되었다.

‘이 트롤들, 싸우는 방식을 보니 그리 머리가 좋은 마수는 아닌 것 같아.’

지능이 높았다면 손에 든 무기로 눈을 보호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방에서 압박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트롤들의 싸움에는 그런 전술이랄 것이 전혀 없었다. 앞에서 동료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무작정 무기를 휘두르며 앞으로, 앞으로 몰려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정말 쉬운 상대인데…….’

문제는 트롤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달려드는 데도 우리 쪽이 점점 더 뒤로 밀릴 정도였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네.”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여러 마리를 한 번에 태워 버리면 안 돼요?”

나는 검은 숲에서 와이번들을 상대하던 해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의 해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한 불을 써서 여러 마리의 와이번을 동시에 상대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불이 크고 강해지면 여기 있는 나무들도 같이 타 버려.”

“나무가 조금 타는 건 어쩔 수 없죠.”

“글쎄. 나무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저 엘프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해리가 힐끗거리며 엘프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엘프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상황이었다. 그들이 가져간 태양의 심장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곤란했다. 물론 아름드리나무를 죄 태워 버리는 건 나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보다는 사람들의 안전이 먼저 아냐?’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점점 우리와 트롤들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나는 열심히 불덩이를 날리고 있는 해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해리. 나 내려 줘요.”

“왜?”

“내가 엘프를 설득해 볼게요.”

“위험해.”

“그냥 이렇게 있는 게 더 위험해요. 빨리요!”

나의 재촉에 해리가 머뭇거리며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그대로 해리의 품에서 빠져나가 트롤과의 대치에 힘을 쏟고 있는 우두머리 엘프에게 달려갔다.

“좀 더 크고 강한 불을 써도 될까요? 나무가 조금 상하겠지만, 트롤들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어요. 그럼 이 싸움은 금방 끝나겠죠.”

내 말에 우두머리 엘프가 화살을 쏘며 눈동자만 굴려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무를 다치게 하는 건 불가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무를 보호하자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요. 자연 보호. 그거 참 좋죠. 그런데 좋은 것도 상황을 보면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면 나는 해리와 손을 잡고 도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여기는 삶의 터전이잖아.’

소중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 이곳에서 트롤들과 결판을 내야 하는 건 오히려 엘프들이었다.

“이대로 계속 밀리면 당신 동료들이 다쳐요!”

“악!”

내 외침과 동시에 한쪽에서 엘프의 비명이 들려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트롤이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러 엘프를 날려 버린 것이다. 트롤의 몽둥이에 맞은 엘프가 멀리 날아가 나무에 맞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끙끙대며 바닥을 기는 엘프의 얼굴에 고통이 가득했다. 그렇게 한쪽이 밀리자 전체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악!”

“큭!”

금세 사방에서 엘프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집스럽게 앞을 바라보며 활을 쏘던 우두머리 엘프가 그 풍경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계속 이렇게 둘 거예요?”

우두머리 엘프는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초록의 나무와 쓰러지는 동료 엘프들을 바쁘게 오갔다.

‘답답해 죽겠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 엘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나무들보다 당신들 생명이 더 중요해요. 나무는 죽으면 다시 키우면 되지만, 당신들은 죽으면 끝이잖아요.”

우두머리 엘프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의견을 묻는 건 이제 끝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선언했다.

“당신들이 자연 보호하겠다고 떼죽음 당하는 꼴은 못 보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할게요.”

‘그 꼴을 보고 나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더 이상 우두머리 엘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으니까.

“해리! 전부 날려 버려요!”

나는 등을 돌려 해리에게 외쳤다. 해리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전부?”

“그래요! 여기 몰려오는 트롤들 전부!”

대량 학살은 해리의 특기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한 마리씩 죽이는 건 정말 감질나는 일이야.”

드디어 특기를 발휘할 기회가 생긴 해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 위의 불꽃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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