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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리를 윽박질렀던 마법사가 쩔쩔매며 다시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척 보기에도 꽤 높은 사람 같은 중년의 마법사가 함께였다.
“성검의 주인이자 에렐의 영주이신 이브리아 오베론 님,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의 힘을 이어받은 해리 님.”
중년의 마법사는 상당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마법사 협회의 수장 셀튼입니다. 백색 요새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시 고개를 든 마법사 협회의 수장 셀튼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강렬했다.
“성문을 두드리셨다면 더 적절하게 마중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방문을 알리는 방법이 조금 과하셨습니다.”
셀튼이 웃으며 상체가 완전히 박살 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웠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쪽에서 웃으며 말에 뼈를 심었으니, 나도 그렇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문을 두드렸다면 수장께서 직접 여기까지 나오진 않으셨겠죠. 안 좋은 기억이 있어 마법사들의 터전에 들어가기가 조금 꺼려졌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세요.”
“그 일은 사죄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직접 얼굴을 뵙고 사죄드리고 싶었습니다.”
셀튼이 한 손에 가슴을 얹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이 없는 걸 보면 평민인데.’
태도는 완전히 귀족이었다. 마법사 협회가 얼마나 고위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오늘 백색 요새를 찾은 것도 그 일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 어떤 일로……?”
“루셀 탑이요.”
내 말에 셀튼의 눈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제가 방금 거길 다녀오는 길입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왔죠.”
“쉽진 않으셨을 텐데요.”
“수장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게 든든한 동료가 있어서.”
내가 해리를 슬쩍 보며 말하자 셀튼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구경을 하셨습니까?”
“풍경이 참 좋더군요. 대륙의 신물이라는, 태양의 심장도 봤고요. 그런데 그게……”
늘 그랬듯 귀찮은 탐색전은 생략하고 곧장 본론을 꺼내려는데, 셀튼이 손을 들어 나의 말을 막았다.
“들어가 있어라.”
셀튼이 자신을 데려온 청년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사라지자, 셀튼이 다시 화제를 이었다.
“알아채셨군요. 그게 가짜였다는 걸.”
“……생각보다 쉽게 인정하시네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거라고 생각했는데.’
셀튼의 입에서 먼저 그 이야기가 나왔다. 의외의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도움이요? 제게?”
“예. 이 일은 성검의 주인이나 대마법사의 후손이 아니라면 해내기 힘든 일이기에…….”
“혹시 해리를 계속 협회에 데려가려고 했던 것도 이 일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제럴드는 깊은 사정을 모르고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지만 말입니다.”
셀튼의 말을 들어 보면 상당히 심각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셨기에 저희 도움이 필요한 건데요?”
“사연이 조금 깁니다.”
“들을 준비 됐어요. 말씀하세요.”
내 말에 셀튼이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가 태양의 돌을 훔쳤습니다. 실험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그럴 줄 알았어요.”
예상했던 일이어서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셀튼이 좀 더 긴장이 풀어진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도둑맞았습니다.”
“……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루셀 탑에서 태양의 심장을 훔쳐 왔는데, 그걸 또다시 누가 훔쳐 갔다고요?”
나는 얼떨떨하게 상황을 정돈했다. 그러자 셀튼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저한테 그 말을 믿으라고요?”
태양의 심장을 훔쳐 왔는데, 그걸 돌려놓기가 싫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내 눈에 서린 의심을 알아챘는지 셀튼이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실험만 마치고 심장을 돌려놓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임시로 힘을 부여한 가짜 태양의 심장을 루셀 탑에 둔 거고요. 하지만 중간에 진짜 심장을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던 셀튼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황당하네요.”
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셀튼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당한 사건이죠.”
“아뇨. 당신들의 대처가 황당하다고요.”
나는 답답해져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뒤늦게라도 잘못을 밝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어야죠. 자기들 잘못 감추겠다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요?”
에렐에는 때아닌 우기가 왔다. 해리가 없었다면 대비 없이 만난 재해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서부 경계의 리안트로 숲은 또 어떤가? 트롤들이 미쳐 날뛰고 있어 수많은 기사가 그곳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을지.’
이런 비극을 만들어 놓고는 일이 커지면 자신들이 손가락질받을 것이 무서워 쉬쉬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딴 일을 벌인 이유가 겨우 실험 때문이었다고?’
“태양의 심장을 어떻게 훔쳐 왔는지, 무슨 실험에 그걸 썼는지 묻고 싶지만 급한 게 아니니 우선 넘어가죠.”
지금 중요한 건 지난 사정을 추궁하는 게 아니었다. 태양의 심장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그리하여 대륙의 균형을 바로잡아 또 다른 재해가 찾아오는 것을 막는 것.
‘아니, 어쩌다 내가 이런 영웅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냔 말이야!’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
하지만 어쩌겠나? 태양의 심장이 없으면 에렐에 몇 번이나 그 난리 통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빨리 찾아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자. 그리고 태양의 심장이니 뭐니 이런 건 다 잊어버리는 거야.’
나는 피곤함에 한숨을 내쉬며 셀튼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심장. 누가 훔쳐 갔어요? 그건 알고 있나요?”
“……네.”
“알면서도 못 찾아온 건 그쪽이 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거겠네요.”
하지만 해리에게는 누가 됐든 쉬운 상대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엄청난 와이번도 갖고 노는 수준이었는걸.’
어디 그뿐인가? 비구름과 강물을 죄 없애기도 했다.
“말해 봐요. 지금 가서 받아 올 테니까.”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태양의 심장을 훔쳐 간 건 숲의 종족, 엘프거든요.”
“……엘프?”
셀튼의 말에 내가 아닌 해리가 반응했다.
“엘프가 왜 태양의 심장을 훔쳐? 걔들은 평화주의자에다 자연 애호가들이라 숲에서 조용히 사는 놈들인데.”
“그게, 저희 실험에 좀 문제가 생겨서, 리안트로 숲의 생명수(生命樹)가 시들었답니다. 그래서 그걸 살리겠다고…….”
“생명수?”
해리가 펄쩍 뛰었다.
“미치겠군. 그건 걔들이 자기들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 그걸 건드렸어?”
생명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리의 반응을 보면 엘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나무인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일종의 실험 부작용으로……”
나는 손을 들어 길어지려는 셀튼의 변명을 잘라 냈다.
“변명은 됐어요. 이미 일이 벌어진 게 중요하니까. 어쨌든 지금은 태양의 심장이 엘프들의 손에 있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그 엘프들은 리안트로 숲에 있고요?”
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트로 숲이면 지금 트롤이 날뛰고 있다는 거기 아냐?’
하필 그 난리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다니 머리가 아팠다.
“이봐요, 수장님. 내가 지금 어쩔 수 없이 당신들을 돕긴 할 거예요. 하지만 일이 끝난 후 대가는 확실하게 받겠습니다.”
이번 일의 수고비에 지난 에렐의 재난에 대한 보상까지 배로 쳐서 받을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어떤 대가든 드릴 수 있습니다. 대륙이 이렇게 혼란에 빠지는 건, 저희들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태양의 심장을 훔쳐서 실험을 해?’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로만 하는 약속은 못 믿어요. 그러니까 금제를 거세요. 제럴드가 한 것처럼요.”
금제라는 말에 부드러운 셀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큼 금제는 무거운 의미였다.
‘만약 어기면 마력을 모두 잃게 되니까 말이지.’
“……좋습니다. 어차피 태양의 심장을 돌려놓지 않으면 우리 마법사협회의 미래도 없으니까요.”
셀튼이 비장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나, 마법사협회의 수장 셀튼, 내가 가진 마력을 걸고 다짐하겠습니다. 우리를 도와 태양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신다면, 성검의 주인께서 바라시는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셀튼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새겨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게 마법사들의 언령이구나.’
신기한 기분으로 셀튼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금제는 걸렸습니다. 이제 우리를 도와주시지요.”
“좋아요. 이 문제, 해결해 드리죠.”
‘내가 아니라 해리가.’
나는 내 옆에 선 해리를 보며 씩 웃었다. 갑작스러운 내 미소에 해리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일이 끝나면 고생한 해리한테는 내가 보답을 해 줘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