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2/156)

* * *

나는 그대로 루셀 탑을 내려와 와이번을 타고 마법사협회로 향했다. 마법사협회의 건물은 거대하고 화려한 성이었다. 외벽이 모두 하얗게 칠해져 있어 백색 요새라고도 불렸다.

‘웬만한 거대 영지의 성이랑 규모가 비슷하네.’

나는 성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예쁘긴 정말 예뻤다.

‘에렐의 영주조차도 성이 아닌 저택을 짓고 사는데.’

마법사들이 이렇게 거대한 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사협회는 왕국 마법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마도구 독점 판매를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주 강력한 힘이었고, 그 힘은 마법사들을 경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부와 힘을 모두 쥐고 있으니 마법사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왕국의 귀족은 물론 왕족까지도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그 경외의 대상에 나 같은 쩜오 마법사는 제외지만 말이야.’

마법사들은 모두 협회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는다. 하지만 이브리아에게는 그 제의가 없었다.

‘너같이 약한 마법사는 우리 마법사들과 동급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겠지.’

마법사들은 무엇보다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점에서는 악마들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너 진짜 들어가려고?”

백색 요새의 입구에 선 나를 보며 해리가 물었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들어갈 줄은 몰랐지.”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야 대비할 시간이 없죠.”

원래 압수 수색을 할 때도 불시에 들이닥치는 게 효과가 좋지 않나? 특히 쥐새끼 같은 놈들을 상대할 때는 더더욱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안 주는 게 상책이었다.

나의 목표는 간단했다.

‘태양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해야겠지.’

그래야만 대륙의 균형이 다시 돌아와 지난번처럼 어이없는 폭우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우리 에렐이 입은 피해도 보상해야만 하고.’

마법사들이 붉은 돌을 훔쳐 가서 벌어진 일이니 에렐의 재해에 대한 보상도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다. 우기가 평소처럼 가을에 왔다면, 그사이 대비를 마친 에렐은 지금처럼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테니까.

“조심해.”

머릿속으로 마법사들에게서 받아 낼 것들을 정리하는 나를 보며 해리가 작게 속삭였다.

“뭘 조심해요?”

“마법사 놈들 말이야. 다 또라이들이니까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제럴드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그러나 그를 상대할 때와 지금의 상황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해리가 내 옆에 있을 거잖아요. 설마, 마법사들 못 이겨요?”

“그럴 리가!”

내 말에 해리가 발끈했다.

“내가 고작 인간 마법사들한테 당하겠어? 하지만 마법사들이 무슨 더러운 수를 쓸지 모르니까 조심하라는 거지. 이번엔 걔들이 내주는 차도 마시지 마.”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입에 안 대고, 아무것도 안 만질게요.”

“그래. 혹시 모르니까 성검도 꼭 쥐고 있고.”

“성검을요?”

해리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검을 쥐고 들어가는 건 너무 싸우자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내 말에 이번에는 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지금 싸우러 가는 거 아니었어?”

“시작은 평화롭게 대화로 해 보려고 했죠.”

“평화롭게 대화?”

해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 놈들한테 말이 통할까?”

“안 통할까요?”

그래도 마법사라면 지식인 아닌가? 나는 마법사들과 이 문제를 대화로 해결해 보자는 아름다운 희망을 갖고 있었다.

“마법사들 고집이 얼마나 센데. 한번 자기가 맞는다고 믿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하기 전까진 절대 안 믿어. 제럴드 그놈을 봤으니까 너도 알잖아?”

그렇다. 난 아주 잘 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그 제럴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벽이 내 말을 튕겨 내는 것 같았지.’

마법사들이 전부 그렇다면 평화로운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러네요. 그럼 우리 지금 싸우러 가는 거네요.”

아군은 인간 중에서도 최악의 체력을 가진 종이 인간(나), 가끔 허당 기질을 보이는 악마(해리), 쓸모없는 기능만 많은 성검(유피테르)이 전부.

‘미묘하네. 뭔가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믿음이 안 가는 기이한 조합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유피테르를 꺼내 들었다.

“이 조합으로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좀 그렇고. 저쪽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 밖으로 나오게 하는데?”

“음…….”

해리의 말에 나는 예쁜 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예쁜 성을 날려 버리면 마법사들이 놀라서 뛰쳐나오지 않을까?’

원래 싸움을 할 때는 선빵이 중요한 법이었다.

‘협상은 결국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의 싸움이니까.’

제대로 기선 제압을 하고 시작하면 어떤 싸움이든 아주 유리하게 풀린다.

‘가장 기초적인 협상의 법칙이지.’

내가 가진 힘이 강하다면,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도 기선 제압의 좋은 방법이었다.

‘나를 납치했던 나타 백작의 말처럼,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곧 예쁜 조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의 중앙 첨탑에 우뚝 솟은, 여신의 형상을 한 아름다운 조각상이었다.

“저 중앙의 조각상을 날려 버리죠.”

“저걸 날려 버리라고?”

“네. 그럼 열 받아서 마법사들이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러겠지만…….”

해리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브리아, 너 생각보다 과격한 면이 있다? 만약에 태양의 심장을 가져간 게 얘들이 아니면 어쩌려고?”

“그럼 아무리 생각해도 나 죽이려고 했던 게 열 받아서 조각상 하나 날려 버렸다고 하죠, 뭐.”

나는 대수롭지 않은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은 날 죽이려고 했는데, 이런 화풀이 하나 한다고 뭐라고 하겠어요?”

살인 미수 사건을 조용히 넘어가 준 건 분명 관대한 처사였다. 내가 그 문제를 내세우며 우기면 마법사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럼 정말로 저걸……?”

“네. 날려 버려요.”

내 확답에 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간 해리는 파괴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살았다. 나의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그에게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고 명령했다.

“예, 주인님. 아주 깨끗하게 날려 드리죠.”

해리가 씩 웃으며 조각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리의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만들어졌다. 구슬처럼 동그란 불덩어리가 가볍게 하늘을 날아 아름다운 백색 조각상을 직격했다.

조각상은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마치 강력한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하얀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마치 눈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조심해.”

해리가 입고 있던 후드 망토 자락을 펼쳐 내게 날아오는 작은 파편들을 막아 주었지만, 자욱한 먼지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애써 억누르며 손을 저어 먼지를 흩어 버렸다. 수십 번 손부채질을 한 뒤에야 겨우 먼지가 사라져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해리는 완전히 재투성이였다. 머리는 하얀색과 비슷한 은발이라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나를 보호해 준 그의 검은 후드 망토는 완전히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몰골이 엉망이에요.”

나는 손을 뻗어 해리의 머리에 있는 재를 털어 주었다.

“좀 더 얌전하게 부술 수는 없었어요?”

해리가 얌전히 내 손길에 머리를 내주며 제 후드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이브리아. 원래 얌전히라는 말과 부순다는 말은 같이 쓸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망토의 먼지를 대충 털어 낸 해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보다는 네 꼴이 더 엉망인데.”

“그래요?”

그제야 나 역시 먼지를 뒤집어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내 모습을 보니 해리의 말처럼 짙은 남색의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밝은 색 옷을 입고 올걸.”

열심히 재를 털어 내 봤지만, 오히려 옷이 더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옷보다 네 머리를 더 신경 써야지.”

부루퉁하게 옷을 털어 내는 나를 보며 해리가 픽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머리도 엉망이에요?”

“응. 그래도 이건 털어 내니까 나아지네.”

‘자기 머리에는 관심도 없더니.’

해리는 아주 꼼꼼하게 내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거울을 볼 수 없어 내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진지한 해리의 얼굴을 보면 제대로 정돈이 됐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백색 요새 안쪽은 소란스러웠다.

‘그 크고 아름다운 조각상을 부숴 버렸으니 당연하지.’

시간이 갈수록 안쪽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성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누구냐! 누가 간도 크게 이런 짓을 벌였어!”

마법사들의 선두에 선 청년이 씩씩대며 나와 해리의 앞에 다가섰다.

“너희냐? 이런 어이없는 짓을 벌인 것이?”

“그래, 나다.”

내 말에 씩씩대던 마법사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이봐, 너! 왜 다짜고짜 반말이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는 넌 왜 반말인데? 내가 누군 줄 알고?”

“뭐?”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마법사가 천천히 나와 해리의 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온몸에 재를 뒤집어쓴 나와 해리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떠돌이 용병 수준이었다. 아마 마법사의 눈도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우리를 살피던 그의 눈이 금세 험악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허! 그래, 어디 한번 들어 보자! 네가 누군데? 어?”

마법사가 위협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눈을 부라렸다. 해리가 당장이라도 저 자식의 눈알을 뽑아 버리겠다는 듯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정말 그럴 기세라서, 나는 마법사의 안전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저 마법사, 내가 방금 자기 눈알을 지켜 준 것도 모르겠지.’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손에 꼭 쥐고 있던 성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그게 뭐…… 어?”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젓던 마법사가 성검을 알아본 것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어…… 이건…….”

마법사가 손끝으로 성검을 가리키며 나와 해리를 다시 살폈다. 성검을 가리키는 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성검을 가진 여자와 은발의 마법사라면…….”

나와 해리를 불안하게 오가던 마법사의 시선이 해리에게 멈춰 섰다.

“혹시 그쪽이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님의 후손……?”

“뭐, 날 그렇게도 부르더군.”

‘사실은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본인이지만.’

해리의 대답에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알만 열심히 굴려 댔다. 그건 그의 뒤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넋이 나갔군.’

자신들의 집을 부쉈다며 따지러 나온 상대가 성검의 주인과 대마법사의 후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눈치였다.

“자, 자,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고민하던 마법사들은 도주를 선택했다. 우르르 성안으로 도망가는 마법사들을 보며 해리가 혀를 끌끌 찼다.

“역시 나약한 인간들은 재미없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