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1/156)

* * *

다음 날, 나와 해리는 계획했던 것처럼 와이번을 타고 루셀 탑으로 이동했다. 루셀 탑에 오르기 위해 입구를 서성이던 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와이번에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거대한 마수의 등장에 놀라서 공격을 시도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진정하세요. 해치지 않아요.”

나는 재빨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외치며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닭고기를 꺼냈다.

“이거 먹고 잠시 놀고 있어. 나중에 부르면 여기로 다시 오고.”

와이번은 끼유- 하고 기쁘게 울며 닭고기를 받아먹고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허무하게 사라진 와이번을 보며 공격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허탈하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여자라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우리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성검의 주인!”

“그리고 그 옆은, 푸른 마법사의 후손!”

‘상당히 눈에 띄는 모습으로 등장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래서야 조용히 탑을 오르기는 틀렸다. 뒤늦게 사람이 별로 없는 새벽에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내 걱정과 달리 소란은 금세 제압됐다.

“뭘 봐?”

해리가 싸늘한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해리의 눈치를 살피며 흩어지자, 나는 마음 놓고 탑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와. 진짜 높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루셀 탑을 보니 절로 입이 쩍 벌어졌다. 탑이 어찌나 높은지 윗부분은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왜 이곳 사람들이 루셀 탑을 신이 만든 탑이라고 믿는지 알 것 같네.’

“올라갈까?”

해리가 감탄하며 탑의 외관을 살펴보는 내게 물었다.

“그래요. 꼭대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나도 루셀 탑에 올라가는 건 처음이라서. 하지만 얼마 안 걸리지 않을까?”

해리가 눈대중으로 탑의 높이를 가늠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나 업고 올라가도 금방 올라갈 수 있어요? 힘들지 않을까요?”

“힘들다고? 내가? 고작 널 업었다고?”

내 걱정에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나를 번쩍 집어 들었다가, 다시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어찌나 쉽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지, 내가 팔랑거리는 종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업히지 그래? 내가 무사히 꼭대기까지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잖아.”

해리가 몸을 낮춰 내게 제 등을 내주었다. 고작 몇 초 전 해리의 힘을 제대로 실감한 나는 사양 않고 그의 등에 업혔다.

“그럼 갈까요? 꼭대기로!”

* * *

스스로 장담했던 것처럼 해리는 아주 쉽게 탑을 올랐다. 엄청난 속도로 탑을 오르는 해리를 보고 헉헉대며 정상을 향해 오르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놀이 기구를 탄 기분이야.’

그렇게 빠른 속도로 탑을 오르는데도 해리는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숨도 고르고, 땀도 안 흘리고, 속도도 일정했다. 평범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강한 신체.

‘이럴 때 보면 악마는 악마라니까.’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해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예쁜 은발 아래 살짝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깨끗했다.

‘어떻게 땀 한 방울 안 흘릴 수가 있지?’

해리가 빠른 속도로 지나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땀을 비 오듯이 쏟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탑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함께 오르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애초에 탑의 꼭대기를 목표로 올라가는 사람도 우리뿐인 것 같았다.

루셀 탑의 중간에는 기상 관측과 천체 관측을 위한 작은 테라스가 있었다. 물론 애초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학자들은 그곳에 관측 도구를 두고 정기적으로 하늘을 살폈다. 그들의 목적지는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고요해진 계단을 올라 정상에까지 도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탁 트인 탑의 꼭대기에 도착해서야 나는 해리의 등에서 내려왔다. 오랜만에 땅을 밟으려니 뭔가 어색한 기분이었다. 가볍게 발을 두어 번 구르자, 그제야 조금 안정감이 들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해리와 나뿐이었다.

‘이곳에 마법사들이 남긴 흔적이 있을까?’

최근 마법사들이 루셀 탑에 자주 드나든다더니, 오늘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탑을 올라오는 동안에도 한 명도 없었어.’

나와 해리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뺐거나, 이미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다 수습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는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방이 트인 탑 아래로 땅 아래의 존재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하늘은 가까웠고, 불어오는 바람은 강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휘날리는 머리를 정돈하며 이상한 기분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밤에 왔다면 <레이디 캐서린>의 마지막 장면 같은 예쁜 하늘을 볼 수 있었겠지만.’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이곳, 신이 만들었다는 루셀 탑은 명성에 비해 별로 특이한 게 없었다. 중앙에 커다랗게 놓인 붉은 돌 하나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와. 이거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이렇게 쉽게 수상한 게 보여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소설에서는 이 돌에 대한 설명이 없었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카시안과 캐서린의 아름다운 결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 주는 데 루셀 탑의 풍경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태양의 심장이네요.]

내가 붉은 돌 가까이 다가서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피테르가 돌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태양의 심장이요?”

[예. 이 세계를 창조한 태양신은 자신의 심장을 5개로 조각내어 대륙 곳곳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대륙 모든 곳에 미쳐 균형을 유지하도록 말입니다. 루셀 탑에도 심장 조각을 두었지요.]

“그럼 다른 곳에도 심장이 있어요?”

[물론입니다. 가장 유명한 곳은 루셀 탑이지만, 대륙 다양한 장소에 태양의 심장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돌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이렇게 덩그러니 있어도 돼요?”

다시 둘러봐도 주변은 황량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이 돌을 뽑아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신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있나요.]

내 걱정에 유피테르가 껄껄 웃었다.

[태양의 심장에는 강력한 신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벼락을 맞습니다. 그러니 이걸 가져갈 수도 없지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돌을 바라보다가, 이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피테르. 그런데 난 지금 붉은 돌 바로 앞에 있잖아요.”

[그렇지요.]

“이 정도면 벼락 맞을 거리가 아닐까요?”

손만 뻗으면 붉은 돌을 만질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어라?]

유피테르의 황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유피테르도 나도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건?”

우리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게 붉은 돌을 마주하고 있을 때, 해리가 내 옆으로 다가와 돌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태양의 심장이래요.”

나는 유피테르에게서 전해 들은 붉은 돌의 정체를 해리에게 알려 주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다는데…….”

붉은 돌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태양의 심장도 고장이 나는 건가……?’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는 제 심장에 이렇게 허술한 마법을 걸어 놓는 신이라니.

‘이 세계 정말 괜찮은 거야?’

어이없는 건국왕에, 어이없는 왕세자에, 이제는 어이없는 신까지.

‘도대체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게 있기나 한가?’

“이게 태양이 심장이라고?”

내가 이 세계의 어이없는 허술함에 놀라고 있을 때, 해리가 붉은 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해리는 허리를 굽혀 붉은 돌을 한참이나 관찰하더니 이내 그 위에 제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아무리 고장 난 태양의 심장이라도 거기다 발을 올리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신성 모독, 뭐 이런 걸로 천벌을 받을 수도 있잖아.’

심장에 걸어 놓은 마법마저 고장 나 버린 어설픈 신이 얼마나 큰 벌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천벌?”

해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의 얼굴에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럴 리가 없을걸.”

해리가 여전히 비웃음을 얼굴에 담은 채 오른발로 강하게 붉은 돌을 내리찍었다.

“어?”

[아니!]

나와 유피테르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해리의 발이 그대로 붉은 돌을 강타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주인님! 악마 놈이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붉은 돌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온전한 구형을 띄고 있던 붉은 돌은 해리의 발길질에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 어이없는 와중에도 붉은 돌은 눈부신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태양의 심장 조각이라더니,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찬란한 모습이었다.

“이걸, 이제, 어쩌라고…….”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유피테르의 말대로라면 이거 엄청나게 중요한 신물 아냐?’

그런데 해리가 그걸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튈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도주였다. 하지만 나는 금세 도주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냐. 우리가 꼭대기로 올라가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도망가 봤자 금방 들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다.

‘그럼 이거 어떻게 다시 붙일 순 없나?’

도망갈 수 없으니 부서진 돌을 어떻게든 수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원상 복구하기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탑을 내려가 에렐로 돌아갈 때까지만 멀쩡한 상태를 유지한다면 해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을 터였다.

‘아오, 저 사고뭉치가 정말!’

나는 사고를 치고도 유유자적한 해리를 흘겨보며 붉은 돌 조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해리가 화들짝 놀라 내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해? 손 다쳐. 조각이 얼마나 날카로운데.”

해리가 대단한 적을 경계하는 것처럼 바닥의 조각들을 노려보았다.

“위험하니까 그냥 둬.”

“이걸 그냥 두면 우리가 더 위험해지거든요! 갑자기 신물을 부수면 어떡해요?”

나는 투덜거리며 해리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가 쉽게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어. 이거 신물 아니니까.”

“네? 하지만 유피테르가 태양의 심장이랬어요. 대륙에 다섯 조각이 있는데, 루셀 탑 정상에 하나가 있다고, 이게 그거라고요.”

“그래. 그게 맞긴 해.”

“……이거 신물 아니라면서요?”

도대체 맞는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내가 답답하다는 듯 해리를 바라보자 그가 내 손목을 놓아주며 가볍게 두 손을 들었다.

“원래 루셀 탑 정상에 태양신의 심장 조각이 있는 건 맞아. 그게 붉은 돌이고, 외관도 똑같았어. 그런데 기운이 하나도 안 들어 있더라고.”

“기운이요?”

“그래. 진짜 태양의 심장이었으면 내 발길질에 이렇게 산산조각 나지도 않았을걸. 대신 내 발목이 박살 났겠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물이라기엔 너무 맥없이 부서지긴 했어.’

“그럼 이게 진짜가 아니라, 가짜 신물이라고요?”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진짜는 어디에 있는데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해리가 왜 그걸 내게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돌에 발이 달려서 혼자 사라졌을 리는 없고…….”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바닥의 돌을 집어 들었다. 해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개중에 뭉툭한 조각이라 손에는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일부러 이렇게 모양이 똑같은 돌을 가져다 놓은 걸 보면 작정을 하고 훔쳐 갔나 봐요.”

태양의 심장은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돌이 사라졌다.

‘예년보다 빠른 우기. 북이 아닌 남에서 시작된 비구름.’

모두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태양의 심장이 사라져서 발생한 일이 아닐까?

‘어쩌면 서부 경계에서 날뛴다는 트롤도 태양의 심장과 연관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흘렀지만, 당장 급한 건 에렐의 비구름이었다. 한 번의 이상 현상은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이대로 균형이 어긋난 채 거대한 비구름이 한 번 더 만들어진다면, 그때의 피해는 얼마나 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엔 해리한테 절대로 소원을 빌지 않을 거니까.’

나는 해리를 힐끗거리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게 영혼의 조각을 넘긴 채 너무 큰 힘을 써서 쓰러졌던 해리.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황상 누가 훔쳐 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참 이상하군요.]

조용히 나와 해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피테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태양의 심장에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다가오는 자는 벼락을 맞지요. 이걸 어떻게 피해 태양의 심장을 훔쳤을까요?]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진 존재겠죠. 신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이 태양의 심장을 왜 가져간 걸까요? 신만큼이나 강하다면 태양의 심장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요?]

유피테르의 의문은 일리가 있었다. 태양의 심장을 가져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라면, 굳이 태양의 심장을 탐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태양의 심장이 대륙의 균형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것 같고.’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굳이 훔쳐 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집단이라면 내가 하나 알고 있단 말이야.’

확신은 없다. 하지만 어쩐지 심증이 그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해리에게 말했다.

“곧장 마법사협회로 가 봐야겠어요.”

“마법사협회? 거긴 갑자기 왜?”

“내가 아는 한, 이런 어이없는 짓을 벌일 사람들이 마법사들뿐이라서요.”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해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에렐에 있는 그 거머리 놈만 봐도 그렇고, 거긴 살짝 맛이 간 놈들만 모여 있으니까. 대륙 최고의 또라이 집단이지.”

“최근에 열심히 루셀 탑을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쪽의 소행 같아요.”

나는 주머니에 가짜 붉은 돌의 조각을 집어넣으며 해리에게 턱짓했다.

“그러니까 숙여요. 나 업히게. 당장 내려가야겠어요.”

“응! 알았어!”

내 말에 해리가 재빨리 몸을 숙이자, 유피테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악마, 이제는 완전히 개가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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