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요? 그럼 정표를 만들어야겠군요.”
내가 기사들이 서부 경계로 출정한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라파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쉬도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죠?”
라파쉬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의도를 알아챘다는 듯 내 등을 툭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 라파쉬가 인간들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나 싶어서 놀란 거지요? 하지만 정표인걸요! 이런 유명한 건 저 같은 드워프도 안다고요.”
‘그랬군요. 드워프도 아는 걸 나만 몰랐군요…….’
하지만 나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레이디 캐서린>은 주인공 캐서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궁정 생활과 귀족 문화에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다.
‘기사들이니, 정표니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그럼 어떤 걸 만들어 줄 생각인가요?”
“보통 검 손잡이에 다는 장식을 준다던데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걸 주고 싶어서요.”
나는 정표가 주는 주술적인 의미는 별로 믿지 않았다. 그런 걸 가져 봤자 죽을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산다.
‘생각지도 못한 비행기 사고로 죽어 버린 나처럼 말이지.’
그러니 이왕 정표를 줄 거라면 좀 더 실용적인 의미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실용적인 거요?”
라파쉬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표에서 그런 걸 찾는 사람은 아마 이브리아뿐일 거예요.”
라파쉬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도 내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장식에 마법을 각인해 주는 건 어때요?”
“마법을요?”
“마수 사냥을 하다 보면 검날에 피가 묻잖아요. 이걸 제때 안 닦아 내면 검날이 상해서 무뎌져요. 그런데 토벌을 하다 보면 다들 피곤하니까, 그걸 잊고 제때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럼 검날을 깨끗하게 해 주는 마법을 각인하면 아주 유용하겠군요?”
내 말에 라파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마침 저택에 각인 마법사들도 있으니까, 잔뜩 이용하자고요!”
라파쉬의 외침에 우리의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카밀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라파쉬 님, 저희가 같은 작업장에 있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지요?”
“아차.”
라파쉬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쓰다듬었다. 각인 마법사들은 작업의 편의를 위해 얼마 전부터 라파쉬의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도구 제작 과정에서 라파쉬와 의견을 교환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나는 민망해하는 라파쉬를 구해 주기 위해 카밀에게 말을 걸었다.
“카밀, 장식품에 검날을 깨끗하게 해 주는 마법을 각인할 수 있을까요?”
“클린 마법을 각인한 마도구는 상당히 대중적이지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탁할게요. 출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 시간이 조금 빠듯하지만…….”
“이틀 후에 출정이라고 했던가요?”
카밀이 정확히 기사들의 출정일을 알고 있었다. 영지 전체가 온통 출정 문제로 떠들썩해서 카밀까지 그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라파쉬 님께서 장식만 오늘 안에 만들어 주신다면요.”
카밀이 그렇게 말하며 라파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라파쉬가 제게 맡겨 두라는 듯 자신 있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 * *
출정의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에렐의 용기사들이 외부로 원정을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떠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에렐에 남는 기사들까지 긴장으로 잔뜩 얼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풀어 주는 건 원래 상관의 몫이겠지만, 내게는 그런 재주가 별로 없었다.
“다들 조심해서 다녀와요.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영주님!”
어설픈 내 인사에도 출정을 위해 늘어선 기사들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그중에는 라이오넬도 있었다.
“경도 원정대에 포함됐군요.”
“예!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내 말에 라이오넬이 바짝 얼어서 소리쳤다.
“에렐의 용기사단을 대표하게 된 만큼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오겠습니다!”
라이오넬의 외침은 생각보다 멀쩡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바닥에 떨어진 그의 익숙한 검만 아니었다면, 그 말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저 검은 라이오넬 허리에 있는 것보다 바닥에 떨어진 걸 더 많이 본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턱 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가리켰다.
“라이오넬 경, 바닥에 검이요.”
“헉.”
내 지적에 라이오넬이 후다닥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허리에 찼다.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옆에 선 남작을 쳐다보았다.
“남작, 제대로 뽑은 거 맞아요?”
그가 보기에도 조금 전의 풍경이 꽤 민망했는지 남작이 연신 헛기침을 했다.
“어설픈 면은 많지만, 실력은 라이오넬이 제일 낫습니다. 최근에 실력이 많이 늘어서요.”
남작의 말처럼 라이오넬의 실력은 확실했다. 성검의 일대일 족집게 수업 이후 무엇인가를 깨달았는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바람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무튼 모두 잘 다녀와요. 그리고 이건…….”
나는 준비해 온 정표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주려고 가져온 것은 맞았지만, 막상 정표랍시고 주려니 어쩐지 민망했다.
“이건 경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면서 내가 준비한 거예요. 검 손잡이에 다는 장식인데, 클린 마법을 각인했으니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늘어선 기사들에게 차례로 다가가 장식을 나눠 주었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장식을 받을 때마다 기사들이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덩치 큰 사내들이 작은 장식을 들고 다 같이 울먹거리는 모습이 꽤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할 차례였다.
“큰 공을 세울 필요는 없어요.”
“아닙니다. 저희가 최고의 실력으로 에렐과 영주님의 이름을 빛내겠습니다!”
“아뇨, 난 그런 거에는 관심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젓고 앞에 선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잖아요. 무사히 돌아와서 그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출정식을 마친 기사들이 와이번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라 먼 곳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열을 맞추어 하늘을 유영하는 와이번과 용기사들의 모습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역시, 멋지긴 엄청 멋지다니까.’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고 저택 내부를 향해 돌아섰다. 기사들을 제대로 배웅했으니, 안으로 들어가 루셀 탑으로 떠날 준비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향하는 길이 제자리에 굳건히 선 해리에게 막혔다. 그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래?’
나는 길을 막고 있는 해리를 피해 그의 오른쪽 옆길로 걸음을 옮겼다.
‘꼭 정면으로만 걸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제 옆을 지나갈 줄은 몰랐던지, 불만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해리가 펄쩍 뛰며 빠르게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냥 가면 어떡해?”
“그럼 어떻게 해야 했는데요?”
“내가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물어봤어야지!”
“그랬어야 해요?”
내 질문에 해리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하지! 이럴 땐 당연히 물어보는 게 상식이지!”
“그래요? 알았어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해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물어봐 줄게요. 조금 전에 왜 그렇게 서 있었어요?”
뒤늦은 질문에 해리가 어색하게 눈을 좌우로 굴렸다.
“……말해도 돼?”
나를 잡아먹을 듯 씩씩대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어느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말하고 싶어서 나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데…….”
우물거리던 해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화났어? 나 진짜 말해도 돼?”
“5초 안에 말 안 하면 나 다시 걸어갈 거예요.”
“뭐? 그런 게 어딨어!”
해리가 세상 억울한 얼굴로 항의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5, 4, 3, 2……”
그렇게 숫자가 5에서 2까지 줄어들었을 때, 해리가 소리쳤다.
“왜 나는 없어?”
나는 숫자 세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없어요?”
“나는 왜 안 주는데? 네가 만든 거. 그 애송이들한테는 줬으면서…….”
해리가 잔뜩 풀이 죽어서는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은 분명 개가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축 늘어진 두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기사들한테 준 정표요? 그건 멀리 원정을 떠나는 기사들한테 주는 거잖아요.”
“그래도, 나도 가지고 싶단 말이야. 네가 준 거.”
해리가 속삭이듯 힘없이 말하며 내 왼손을 슬쩍 붙잡았다.
“난 너한테 내 영혼까지 줬는데,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안 줬잖아. 정말 치사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해리의 목소리가 상당히 침울했다.
‘삐쳐서 우울해진 개인가?’
그러면서 나한테는 제대로 화도 못 내고 끙끙대는 게 꽤 귀여웠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는 픽 웃으며 해리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자 해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게 왜 의미가 없어? 그 애송이들은 있고, 난 없는데!”
해리는 아주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너한테 내가 첫 번째가 아닌 건 알고 있어. 그건 이해했다고. 그래도 그 애송이들한테까지 내가 뒤처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래도 내 손 이렇게 마음대로 잡을 수 있는 건 해리뿐이잖아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씩씩대던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어?”
“내 침대에서 같이 낮잠 잘 수 있는 것도 해리뿐이고.”
“……어어?”
“게다가, 이런 건 해리한테만 해 주는데.”
나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해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해리가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뒤에야 놀라서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억울해요?”
내 질문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해리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갑자기 안 억울해진 것 같아.”
“착하네요. 이런 것도 잘 이해하고.”
나는 웃으며 다시 한번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뭔가 선물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해리는 내게 이미 제 영혼의 조각을 나눠 줬다.
해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내게 그걸 선물했다.
‘그래, 생일 선물!’
갑자기 머릿속이 번뜩했다.
“그러고 보니 해리는 생일이 언제예요?”
“어? 내 생일?”
해리가 갑자기 왜 그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해리가 나한테 생일 선물 줬잖아요. 나도 해리한테 생일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그럼 해리도 나한테서 뭔가 받을 수 있어요.”
“어? 정말? 나한테 생일 선물 줄 거야?”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던 해리의 얼굴에 순식간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물어볼 걸 그랬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생일이 언제인데요?”
“응! 내 생일은…….”
씩씩하게 제 생일을 외치려던 해리가 갑자기 목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내 눈치를 살피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요? 설마 악마들은 생일 없어요?”
내 질문에 해리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악마도 생일 있어.”
“그럼 빨리 말해 봐요. 생일 언제예요?”
“그게…… 내 생일은……”
잠시 머뭇거리던 해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비장하게 외쳤다.
“내일이야.”
“……내일?”
“응. 내일.”
나는 할 말을 잃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생일이 내일이라고?’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해리는 한 달 전부터 자기 생일이 언제라고 떠들고 다닐 타입이거든.’
마음속으로는 이미 거짓말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나는 해리에게도 한번 확인을 해 보기로 했다.
“정말 내일이 생일이에요?”
“정말이야. 맹세해. 넌 왜 사람을 못 믿냐?”
“해리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니까요.”
“악마가 얼마나 진실한데.”
악마와 진실이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은 또 오랜만에 들어 보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에게 물었다.
“내가 소원 써서 진실로 대답하라고 말해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어요?”
“……어?”
역시나 해리가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야, 너는 뭐, 겨우 그런 걸로 소원을 쓰려고 하냐? 멋지고 아름다운 소원 많잖아. 응?”
“나의 아름다운 소원은 해리의 생일이 언제인지 아는 거예요.”
“아니, 소원 빌지 마!”
해리가 방방 뛰며 다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소원은 흘러나온 뒤였다.
“생일이 언제예요, 테오하리스 씨?”
“……겨울의 첫날이요.”
해리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침울하게 대답했다.
“겨울의 첫날이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네요.”
괜찮은 선물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선물을 준비할 여유를 갖게 돼 만족스러운 나와 달리, 해리는 그 사실이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왜 내 생일은 내일이 아닌 거야? 짜증 나.”
“해리가 겨울에 태어난 걸 어떡하겠어요? 내일 생일 파티는 못 하겠지만, 대신 나랑 같이 놀러 가요.”
같이 놀러 가자는 말에 열심히 투덜거리던 해리가 눈을 반짝 빛냈다.
“우리 둘만 가는 거야? 다른 녀석들은 안 데려가?”
“네. 우리 둘만 가요.”
“어디로 가는데?”
“전에 말했잖아요. 루셀 탑. 거기 가려고요.”
내 말에 해리가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활짝 웃었다.
“내가 너 무사히 꼭대기까지 데려가 줄게. 걱정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