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숲의 종족
“루셀 탑에 가야겠어요.”
내 선언에 인세티아 남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긴 왜요?”
“정보 길드를 통해서 알아봤는데, 최근 마법사 협회가 그쪽엘 자주 드나들었대요. 생각해 보면 루셀 탑도 비구름이 몰려온 남쪽에 있잖아요?”
“그렇군요. 하지만 영주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정말 그곳에서 비구름의 원인이 발생한 거라면, 뭔가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심각한 인세티아 남작의 얼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작.”
“예.”
“설마 내 안전을 걱정하는 거예요? 나 걱정해요?”
내 질문에 남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 머리 위에 얹었다.
“당연히 걱정합니다.”
‘와. 감동!’
나는 남작이 건넨 서류를 받아 들며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날 걱정한다니 감동이 두 배였다. 하지만 나의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주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이제 저 혼자 이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하니까요.”
‘……그러면 그렇지.’
지극히 현실적인 남작의 이유에는 멋도 감동도 없었다.
“남작. 내 감동 돌려내요.”
하지만 남작은 내 투덜거림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제 말은,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게 낫다는 겁니다. 영주씩이나 되는 분이 왜 다른 사람을 안 시키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려고 하십니까?”
“개인적인 용무도 있어서, 겸사겸사 가려고요.”
“루셀 탑에 개인적인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남작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루셀 탑이 개인적인 용무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굳게 닫힌 입에 내가 이유를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언제 떠날 생각이십니까?”
내가 마음먹은 이상 자신이 나서서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역시 훌륭한 보좌라니까.’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대충 채비를 한 뒤에 바로요. 아마 이틀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틀이면 급하게 처리할 서류를 정리하고, 루셀 탑 등반에 필요한 물품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급하지 않습니까?”
“시간을 끌면 증거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내 말에 인세티아 남작이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양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셀 탑에는 누구를 데려가실 겁니까?”
“해리와 둘이 가려고요. 사람이 많으면 걸리적거리기만 할 것 같고. 소수 인원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뭐, 그분과 함께라면 둘만 있더라도 큰 문제는 없겠지요.”
남작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셀 탑으로 떠나시기 전에 확인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뭔가요?”
“제가 방금 드렸던 서류를 봐 주십시오.”
“아. 그 서류.”
나는 손에 쥐고서 완전히 잊고 있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서류에는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왕실에서 무슨 일이지?’
재빨리 눈으로 서류를 훑으니 남작이 말로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서부 경계에 있는 리안트로 숲의 트롤 토벌에 에렐의 지원을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서부 경계면 우리와 맞닿아 있지도 않은 땅이잖아요. 거기에 트롤이 나오는데 왜 우리가 도와줘요? 지금까지도 이런 지원 요청이 있었어요?”
자기 영지는 자기가 지킨다. 그게 이 시대의 법이었다. 만약 영지의 힘만으로 방비가 부족하다면 중앙 왕실에서 도움을 주는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다른 영지의 힘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요청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저희 영지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병을 갖춘 다른 영지에도 같은 서신이 왔답니다.”
“그 말은……?”
“상황이 예년과 달리 심각하다는 뜻이지요.”
“올해는 왜 이렇게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네요.”
에렐에는 때아닌 비가 쏟아지더니, 서부 경계에서는 트롤들이 미쳐서 날뛰고 있었다. 동부와 서부 모두에서 이런 이상 현상들이 발생하는 게 단순한 우연일까?
“별로 그쪽에 신경 쓰고 싶진 않은데. 거기 갔다가 우리 식구들이 다치는 것도 싫고요.”
서쪽은 에렐과는 반대쪽이라 그쪽에서 트롤이 날뛰든 말든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강제성이 없다면 당연히 거절하고 싶은 요청이었다. 하지만 왕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왔다. 말로는 ‘도움을 요청한다’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강제적인 차출 요구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도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겠죠?”
“아무래도 그렇지요.”
남작도 내 말에 동의했다.
“보낼 병력을 최소한으로 꾸리면 어떻겠습니까? 생색만 내는 수준으로요.”
“그게 좋겠어요. 하지만 누구를 보내느냐가 문제인데…….”
“우선은 지원자를 받아 보지요.”
“지원자가 있을까요?”
‘나라면 굳이 평화로운 에렐을 떠나 싸움터로 가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거기서 다치거나 죽으면 나만 손해였다. 하지만 남작은 벌써 자원할 기사 몇 명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 기사단에는 싸우기 좋아하는 놈들이 제법 있거든요.”
“그래요?”
‘내 눈에는 다들 어설픈 엑스트라로만 보였는데.’
물론 그 대표 주자는 라이오넬이었다. 요즘은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지만,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저 인간이 기사인가 싶었다.
“용병으로 구르다 온 녀석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지금쯤 고상한 기사님 행세에 좀이 쑤셔 어쩔 줄 모르고 있겠죠. 오히려 나서는 녀석이 많을까 걱정입니다.”
디스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남작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칭찬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남작이 지원자를 추려서 적당히 원정대를 꾸려 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루셀 탑으로 출발하는 건 원정대가 떠난 뒤로 잡아야겠네요. 먼 길 가는 사람들 배웅 정도는 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출장 가는 날 상사가 불러서 잘하고 오라고 인사하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그냥 상사가 아니라 사장이나 회장님 정도였다면 더욱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한테 도대체 뭘 바라기에 이렇게 찾아와서 인사까지 하는 거야?-싶을 거다.
‘기사단원들에게 난 사장님 정도가 아닐까? 회장님은 공작이고.’
그렇다면 배웅 없이 자금이나 두둑하게 쥐여 주고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혹시 기사단원들이 부담스러워할까요? 그럼 그냥 먼저 루셀 탑으로 떠나려고요.”
조금 걱정이 되어 물으니, 남작이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꼭 배웅해 주십시오. 다들 기뻐할 겁니다.”
하지만 남작의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남작도 상사잖아. 부장님이나 팀장님 정도?’
그러니 남작에게도 그런 불편한 기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신경 써 주셔서 영광이라느니, 감사하다느니 하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제 말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말 좋아할 겁니다, 그 녀석들.”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걸 느꼈는지 남작이 한 번 더 제 의견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사는 아랫사람들 기분을 절대 모른다. 남작이 그렇게 눈치 빠른 상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배웅하러 나가서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인사만 하고 와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작이 장담했던 대로, 원정대는 인원이 넘쳐 나서 오히려 문제였다. 너도나도 서부 경계로 떠나고 싶다며 지원하는 바람에 남작이 한참이나 고심해 적임자를 골라내야만 했다. 그 결과 총 10명의 원정대원이 결정되었다. 극소수의 인원이었지만, 하늘을 날아 공중 공격을 할 수 있는 용기사 10명이라면 웬만한 기사 100명분의 몫을 거뜬히 해낼 것이다.
기사들이 마수와 싸우기 위해 출정할 거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에렐은 조금 어수선해졌다. 와이번 토벌기의 에렐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상당히 분위기가 어수선하네.”
내 말에 엠마도 그걸 느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렐 사람이라면 마수 토벌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와이번은 대륙 최강의 마수였다. 영지에 맞닿은 숲에서 그런 마수가 살고 있었으니, 에렐 사람들의 마수 공포는 대단했다.
“하지만 이번엔 우리 영지에서 마수가 날뛰고 있는 게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이번의 불안은 조금 다른 이유가 아닐까요?”
엠마가 내게 차를 따라 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원정을 떠나는 기사님들은 에렐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잖습니까? 다들 가족이나 친구를 잃을까 불안한 거지요.”
“그렇구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게 서리 기사단 사람들은 소설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였다. 사실 서리 기사단원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책 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죽이는 건, 역시나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말이야.’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엠마가 부러 밝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기사님들은 좋으시겠어요.”
“뭐가?”
“원정을 떠나시면 아가씨께서 정표를 주실 거잖아요!”
“으응?”
“아마 원정대에 가겠다고 자원한 기사님들 중에 그걸 받고 싶어서 손을 든 분도 계실걸요.”
“……정표라니?”
정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 모르세요?”
내 반응에 오히려 엠마가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자기 휘하의 기사들이 출정하면, 주군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라는 의미로 정표를 주는 게 관례인데요…….”
엠마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모르셨군요.”
“전혀 몰랐어. 남작도 전혀 말 안 해 줬고.”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이게 그 정도로 당연한 일이야?”
내 질문에 엠마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는데?”
“글쎄요. 아마 제레인트가 세워졌을 때부터……?”
‘에프론 제레인트. 네가 또 이상한 관례를 만들었구나!’
성검에도 이상한 의미를 부여해 놓더니, 이제는 쓸모없는 관례까지. 아무튼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보통 어떤 정표를 주는데?”
“그거야 어떤 것을 주시든 주군의 뜻이지만…… 보통은 검 손잡이에 달아 둘 장식이지요.”
“생각보다 거창하지는 않네.”
다행히 그 정도라면 출정 전까지 준비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라파쉬를 찾아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