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법사 협회에서 마도구 기술자들이 도착했다. 이름은 각각 카밀과 도로타였다.
“어린 마법사의 치기 어린 행동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자신을 카밀이라고 소개했던 중년 남성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결국 서로에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결론이 났으니까요. 지난날의 안 좋은 일들은 모두 잊고 앞으로 잘 지내 봐요.”
“그런데 제럴드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밀 옆에 있던 도로타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여인이었다. 카밀이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제럴드는 도로타의 제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들처럼 사랑으로 키운 제자라 애정이 남다르지요. 부디 그녀의 초조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카밀은 도로타가 다짜고짜 제럴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본론부터 말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제자의 안전을 걱정하는 스승님의 마음을 이해 못 할 정도로 꼬인 인간도 아니었다.
“제럴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직 회복 중이지만, 웬만한 일은 혼자서 할 정도가 됐습니다.”
반송장에서 중환자 정도로 회복됐던 제럴드는, 이제 경상자 정도로 회복해 있었다.
“두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들떠 있었으니,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는 게 어떨까요? 꼬마 마법사님이 아주 기뻐할 거예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카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처럼 관대한 태도로 그들을 대할 줄 미처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를 강압적으로 대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큰 손해였다.
마법사들은 자의가 아닌 협회의 결정에 따라 이곳에 파견 나왔다. 그것은 협정으로 강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마도구를 어떤 품질로 만들 것인지는 문서로 강제할 수 없었다. 마도구의 품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쓰레기 같은 마도구만 만들어 대도 항의할 수 없지.’
자신의 처지에서는 최선을 다해 만든 물품이라고 하면, 이쪽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마도구를 만든다면 100개, 아니, 1000개를 만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까 마법사들을 환대해 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서, 진심으로 좋은 마도구를 만들게 하는 거야.’
나는 가진 것이 많았다. 이렇게 많이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환대를 베푸는 일도 아주 쉬웠다.
‘조금만 나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주면 크게 감동하거든.’
“물론이에요. 에렐에 머무르시는 동안 협회에 계시는 것처럼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내 생각처럼 카밀과 도로타의 눈이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어리둥절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것이 보였다.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호의가 실려 있었다.
“……저희를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에렐에 오신 걸 정말 환영해요.”
* * *
제럴드가 에렐에서 정말 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 마법사들은 본격적으로 마도구 제작에 들어갔다. 시작은 기존의 물품부터였다. 그간 마법사 협회에 의뢰해 향기 나는 마법을 각인했던 브로치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완전히 몸이 회복하지 않아 작업을 시작할 수 없는 제럴드는 신제품 개발 쪽을 담당했다. 새로운 마법을 각인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도안을 개발해야 한다. 이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발에 성공하면 그만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각인하지 못하는 에렐만의 마법이 탄생하는 거니까.’
무엇이든 독점은 큰돈이 되는 법이다. 나는 소파에 늘어져 종이 위에 아이디어 몇 가지를 적어 보았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걸 제럴드에게 전해 개발하도록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어 버린 내 머리에서 나오는 상상력은 한계가 있었다. 한참이나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나는 소파 뒤에 서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해리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해리.”
“응?”
“지금 마도구를 개발하려고 하는데요, 아이디어가 필요하거든요.”
“아, 응, 그렇구나.”
“그래서 해리의 의견이 필요해요.”
“으으음, 그래애?”
해리가 여전히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에 집중하며 대충 대답했다. 대답은 했지만, 내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나는 해리가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을 그러쥐어 가슴 앞으로 넘겼다. 그러자 해리가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왜 못 만지게 해?”
“이거 만지느라 내 말에 집중을 안 하니까 그렇죠.”
“집중하고 있었어!”
해리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해리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데는 선수였다.
“그럼 말해 봐요. 내가 뭐라고 말했어요?”
내 질문에 당당하게 부릅뜨고 있던 해리의 눈동자에서 힘이 풀렸다.
“어…… 그게…….”
해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좌우를 오갔다. 머릿속의 기억을 뒤적여 어떻게든 정답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오랜 고민 끝에 해리가 자신감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같이 놀아도 된다고…… 그랬던가……?”
기억 인출은 실패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지금 내가 해리한테 듣고 싶은 말이 뭔지 물어봤어요?”
“그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인 줄 어떻게 알았어?”
“해리는 꼭 답을 모르겠으면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하잖아요.”
“……내가 그랬어?”
“네. 완전 그랬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악마를 꼬드겼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 잘하면 오늘 같이 놀아 줄게요.”
“뭐? 정말?”
“내가 약속으로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아니. 내 계약자는 그러지 않아. 신뢰하면 이브리아, 이브리아 하면 신뢰지.”
내가 혹시 말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해리가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묻고 싶은 게 뭔데?”
‘악마를 제대로 꼬셨군.’
나는 흐뭇한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해리에게 물었다.
“해리는 어떤 마도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나?”
해리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마도구가 필요 없는데?”
“그걸 누가 몰라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 주었다.
“해리가 마법을 쓸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봐요. 어떤 마도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내 질문에 해리가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가볍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민에 빠진 해리는 꽤 진지했다.
“만약에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오랜 고민 끝에 해리가 입을 열었다.
“네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게 제일 답답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네 위치를 알 수 있는 마도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살 거야.”
“아. 위치 추적기 같은 걸 말하는 거군요.”
나는 재빨리 해리의 의견을 종이에 적어 넣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제대로 대답해 줬으니까 이제 나랑 놀아 줄 거야?”
만족스러운 내 얼굴을 보며 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난 약속은 지킨다고요.”
답변까지 만족스러웠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뭐 하고 놀아 줄까요?”
내 질문에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약삭빠른 악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뭐든 내가 하자는 걸 할 거야?”
“난 딱히 생각나는 게 없으니까, 해리가 하고 싶은 놀이를 하죠, 뭐.”
“정말이지? 당장 약속해!”
해리가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예전에 나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걸 떠올린 것 같았다.
‘뭘 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람?’
나는 의문과 함께 해리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해리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 * *
아직 낮인데도 방 안은 어두웠다. 해리가 모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초를 켜 두어서 해리의 얼굴이나 방 안의 풍경은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
‘같이 놀자더니 이게 뭐야?’
내가 어리둥절하게 방 안을 살피고 있을 때, 해리가 나를 불렀다.
“이리 와, 이브리아.”
어둠 속에서 해리가 내게 손짓했다. 그는 늘 그랬듯 아주 자연스럽게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리, 같이 놀자더니 내 침대에서 뭐 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놀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아무 말 말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소리다. 뭔가 상황이 이상했지만 그렇게 약속했던 건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섰다. 내가 제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자 해리가 내 손을 붙잡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 손길을 따라 침대 위에 걸터앉으니 이번에는 해리가 제 다리를 두드렸다.
“내 다리 베고 누워.”
“누우라고요?”
“응. 어서.”
해리가 재촉하는 바람에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머리를 받쳤다. 해리의 다리는 내가 평소에 베던 베개보다 조금 딱딱했다. 하지만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리는 제 다리를 베고 누운 나를 아주 만족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 기분이 좀 이상한데.’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해리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리자, 해리가 당장 손을 뻗어 내 얼굴이 정면을 향하게 했다.
“고개 돌리면 안 돼.”
“그것도 해리가 하고 싶은 놀이에 포함되는 거예요?”
“응. 계속 나 보고 있어야 돼!”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나는 포기하고 해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누워 있으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나 실컷 구경해야지.’
나는 해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깊은 눈과 미려하게 떨어지는 콧날, 그 아래에서 어쩐지 긴장한 듯 굳게 다문 입술까지. 이렇게 해리를 오랫동안, 천천히 관찰한 건 처음이었다.
“뭐 하는 거야?”
그때 해리가 팔을 뻗어 제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눈에 닿은 해리의 손이 조금 뜨거웠다.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
해리가 민망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투정 섞인 목소리였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다는 듯한 투는 아니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해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눈앞에 있는 게 해리 얼굴뿐이라서요. 나한테 고개도 돌리지 말랬으니까, 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잖아요.”
내 말에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당연한 이유에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 그래도!”
곧이어 헛기침 소리와 함께 해리가 항변했다.
“이렇게 빤히 쳐다볼 건 없었잖아.”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앞으론 그렇게 안 볼게요.”
“아니! 그러라는 게 아니라…….”
해리가 말끝을 흐리며 우물거렸다. 해리의 얼굴을 봐도 된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나 어떻게 해요? 봐요, 말아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해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어 봐.”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과 함께 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이 가려진 상태라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앞이 안 보이니까 조금 불안한걸.’
나는 조금 긴장한 기분으로 해리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벼려졌다.
“해리?”
의아함을 담아 해리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입 밖으로 빠져나간 숨을 삼켜 버릴 듯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어둡게 차단된 시야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 때문인지. 맞닿은 입술의 감촉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해리는 달콤한 사탕을 탐하는 아이처럼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는 사탕이 아까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지러워.’
마치 깃털이 입술을 간질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해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파고들면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더니. 이제는 제가 먼저 틈을 파고들 줄도 알았다.
‘이게 다 그 공부의 효과인가?’
실전 연습도 없이 이론만으로 이런 성과를 내다니. 정말 놀라웠다.
‘그 관능 소설 대체 뭐야? 그걸 쓴 마담 루이제는 또 뭐 하는 사람이고?’
엠마가 그토록 찬양하는 관능 소설에 없던 흥미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한 수 위거든!’
감히 허락도 안 받고 주인을 문 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팔을 뻗어 해리의 뒤통수에 손을 얹었다. 제 머리카락을 헤집고 들어오는 손길에 해리가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때가 바로 반격의 타이밍이지.’
나는 얼어 버린 해리의 뒤통수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맞닿은 서로의 입술이 조금 더 깊게 눌렸다. 해리가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는 타입이라면, 나는 사탕을 깨물어 씹어 먹는 쪽이었다. 깊게 맞닿은 입술을 살짝 깨물자 해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뒤통수는 이미 내게 붙잡힌 상태였다. 나는 내게서 벗어나려는 해리의 입술에 다시 한번 쪽- 하고 입을 맞춘 뒤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해리가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며 후다닥 멀어졌다.
“뭐, 뭐, 뭐, 뭐야!”
나는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 사이로 얼굴이 잔뜩 붉어진 해리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기로 했잖아! 갑자기 움직이면 어떡해!”
해리가 팔을 들어 입술을 가린 채 씩씩대며 내게 항의했다.
“해리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했지, 내가 가만히 있겠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요.”
내 말에 해리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입을 가리고 있던 팔도 맥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오늘 나랑 하고 싶었던 게 키스였어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 정도는 거창하게 이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아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아냐, 그런 거!”
내 말에 해리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원래 하려고 했던 건 이거 아니란 말이야. 키스는, 갑자기 그냥, 네가…….”
갑자기 해리가 횡설수설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지 않아도 붉어졌던 얼굴은 이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무튼! 원래 하려던 건 이거 아니었어.”
“그럼 원래 하려던 건 뭐였는데요?”
“원래는 그냥 너 좀 재워 주려고……”
“날 재워 줘요?”
놀아 달라고 그렇게 떼를 쓰기에 좀 더 활동적인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응. 요즘엔 네 옆에서 못 자니까, 너 자는 모습 보고 싶어서.”
해리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에 닿는 손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안 잔 게 오래됐죠.”
해리가 개의 모습으로 있었을 때는 늘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무르게 된 뒤에는 한 침대를 쓰기는커녕 같은 방에서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럼 같이 낮잠 잘까요?”
“……어?”
내 제안에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돼?”
“그러고 싶은 거 아니에요?”
“응! 그러고 싶어!”
해리가 들뜬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내 개가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나는 의무적으로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개 주인이 된 심정으로 팔을 뻗었다.
“자. 이리 와요!”
양팔을 활짝 벌린 나를 보며 해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내가 네 품에 안겨서 잠들어야 하는 분위기야?”
“그럼요?”
“이럴 땐 보통 내가 널 안고 자야 하는 거 아니었어?”
“누가 그래요?”
“마담 루이제가.”
그 관능 소설, 도대체 무슨 내용인 거지?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소설의 내용에 감탄하며 뻗었던 팔을 거뒀다.
“좋아요. 오늘 하루는 특별히 내 개에게 주인을 안고 잠들 수 있는 권리를 주겠어요.”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날 안아요!”
“……안으라는 건지, 싸우자는 건지.”
해리가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내 옆에 몸을 뉘었다. 그의 움직임에 침대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해리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자, 그가 ‘으으!’ 하고 소리치며 나를 꼭 껴안았다.
“와.”
해리의 품에 안기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해리한테 좋은 냄새 난다.”
나는 해리의 가슴에 코를 박고 코를 킁킁거렸다.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나서 이걸 향수로 만들어 팔면 대박이 나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제 품에서 바스락거리자 해리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계속 그렇게 움직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너무 자극하면 낮잠만 자기는 좀 힘들어질 것 같거든.”
나는 해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몸에서 힘을 빼고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오늘은 낮잠만 자고 싶으니까 얌전하게 있을게요.”
내 말에 해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낮잠만 안 자고 싶은 날도 있을 것 같아?”
“언젠가는 있겠죠?”
내 대답에 나를 끌어안은 해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해리. 루셀 탑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응. 알고 있지. 거긴 왜?”
“거기에 한번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거기가 엄청 높다는 건 알고 있어? 넌 반도 못 올라갈걸.”
“에이, 무슨 걱정이에요? 해리가 있는데. 내가 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올라가게 해 줄 거잖아요?”
“당연하지.”
내 말에 해리가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공백 없는 그 대답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기에 좋은 향기와 따뜻한 체온, 기묘한 안정감까지.
조금씩 잠이 나를 집어삼켰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그냥 악역으로 살겠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