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7/156)

* * *

해리가 추천한 두 악마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됐다. 처음에는 미심쩍은 마음에 그들이 처리한 서류를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걸 몇 번 반복하니 내가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악마들의 일 처리는 정확했다. 처리 속도가 빨랐고, 체력도 아주 좋아서 오랫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훌륭한 악마들에게 일을 모조리 떠넘긴 나는 덕분에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일상을 즐길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쩌냐 이 분위기?’

나는 냉랭한 분위기의 서재에서 노예 왕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생각 이상으로 싸늘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쁜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 싸늘한 분위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중간에서 둘 모두에게 일을 시켜야 하는 나만 곤란해 어쩔 줄을 몰랐다.

‘화해를 시켜?’

하지만 내가 사이좋게 손잡고 화해하세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순순히 화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원래 가족 싸움에는 외부인이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형제의 일이니 형제끼리 알아서 해결해야지. 안 그래?’

나는 나의 귀찮음을 배려로 곱게 포장한 뒤 공적인 이야기로 싸늘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두 분의 보고서를 다 읽고 든 생각인데요. 이렇게 따로 일하는 것보다,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내 말에 서류에 시선을 박고 있던 두 사람이 맹렬한 기세로 나를 쏘아보았다.

“아니, 제가 뭐 두 분을 화해시키려는 게 아니라요. 이건 공적인 문제고, 두 분도 공적인 문제에 사감을 끌고 오실 분들은 아니잖아요?”

‘공적인 문제’라는 말에 두 사람의 맹렬함이 반 정도 줄어들었다.

“결국 두 분의 목적은 같은 거잖아요. 강의 범람을 막는다. 그렇다면 함께 처리하시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죠.”

“하지만 이건 시험입니다. 따로 일하는 걸 평가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조별 과제에도 개인 평가는 가능한 법이죠. 게다가 이건 시험이지만 동시에 진짜 민생이거든요.”

“그래서요?”

“두 분이 경쟁하느라 애꿎은 영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게 해 달라는 거예요. 시험의 결과보다는 민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왕의 자격이지 않겠어요?”

반박할 수 없는 정론에 카시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지요.”

잠시 생각하던 카시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자리에 앉은 리던이 사라지는 카시안을 힐끗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왜요? 사과하고 싶으세요?”

내 말이 맞았는지 리던이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매만졌다.

“뭐, 이런 상황이 된 건 어른들 탓이지 저 녀석의 잘못은 아니니까.”

“그렇겠네요. 원인을 제공한 어른들에겐 화 한 번 못 냈으면서 만만한 동생에게 화를 낸 게 민망하신 거군요?”

“……너무 정곡을 찌르는 거 아니야?”

리던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소리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일 핑계로 다가가 보시죠. 마침 좋은 기회잖아요.”

“내가 카시안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두 사람의 골은 깊었다. 단순히 사이 나쁜 형제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왕위와 목숨이 달린 문제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두 분의 화해에는 관심 없어요.”

“그런데 왜 중재하는 건데?”

“중재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일 문제로만 생각했을 때 두 분이 서로 협력해서 처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배려심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리던이 픽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복잡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조금 여유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루크에게 연락이 왔다.”

“아. 그 날씨 실험 문제요?”

“그래. 그거.”

리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 협회 쪽에서 그런 실험을 한 흔적은 없대.”

“몰래 진행했을 가능성은요?”

“날씨 조작은 쉬운 일이 아니야. 당연히 실험도 굉장히 큰 규모로 이뤄지지. 한번 움직이면 파악이 안 될 수가 없다는군.”

그렇다면 마법사 협회와 이상한 우기는 연관이 없는 걸까?

‘분명히 그쪽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 협회와 관련 없는 일이라면 이게 정말 자연의 변덕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뭐, 내가 그냥 이런 재해가 인간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이라는 걸 믿기 싫은 걸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니 리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만 최근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 포착됐다는군. 그런데 이게 또 상당히 의심스러워서 말이야.”

“어떤 행동인데요?”

“루셀 탑에 대해 알아?”

내 질문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아는 만큼은 알죠.”

“그곳에 마법사들이 자주 출입하고 있다는군.”

루셀 탑은 천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방문자들은 대부분 하늘을 읽어 미래를 예언하는 점술가나 기상을 파악하려는 학자들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프러포즈를 하려는 왕자님이거나.’

나는 <레이디 캐서린>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들이 거기서 할 일이 딱히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지. 마침 루셀 탑도 비구름이 몰려왔다는 남쪽에 있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겠네요.”

‘루셀 탑에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이번 일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루셀 탑은 <레이디 캐서린>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내 눈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소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건 조금 이상한 걸까?

책 속의 세상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소중한 가족, 소중한 친구, 소중한 삶. 평생을 일군 모든 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육신은 이미 저쪽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 봐야 난 이미 썩어 있는 시체일 뿐일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일종의 마음 정리라고 해야 하나?’

그것 하나만을 위해 루셀 탑으로 가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일을 확인하며 겸사겸사 찾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처리할 서류들도 노예 왕자와 두 악마에게 떠맡겼으니 시간도 있고.’

“루셀 탑은 누구나 오를 수 있나요?”

“누구나 오를 수 있지만, 또 누구나 오를 수 없다고 할까.”

리던이 애매한 얼굴로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출입 자체를 막는 사람은 없어.”

“그런데요?”

“거기가, 그대도 알다시피 엄청나게 높잖아?”

대륙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건물이다. 엄청나게 높은 건 당연했다.

“그렇죠.”

“거길 직접 걸어서 올라간다고 생각해 봐. 게다가 루셀 탑은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계단이 좁고 가팔라. 탑을 오르는 사람의 편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지.”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입을 쩍 벌리는 나를 보며 리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누구나 오를 수 있지만, 또 누구나 오를 수 없는 곳이지.”

‘소설에서는 탑을 오르는 과정 같은 건 안 나오니까 전혀 몰랐어.’

이 세계에 탑을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도 없고, 전부 걸어서 올라가라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불가능했다.

‘아니, 그럼 원작에서 카시안이랑 캐서린은 어떻게 그 탑을 오른 거야?’

하지만 캐서린은 마력치 9의 강한 마법사고, 카시안도 검술에 뛰어난 캐릭터였다. 나와 달리 탑을 오를 능력이 충분했다.

“……고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무식한 탑을 만든 걸까요?”

“그러니까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거 아니겠어?”

리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와이번을 타고 날아가서 꼭대기에 바로 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와이번을 타고 그렇게까지 높이 날아 본 적은 없었다.

‘아니면 해리에게 업고 가라고 할까?’

악마의 체력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열심히 루셀 탑에 오를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니, 리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 오베론,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할 이야기요?”

“그대의 생일 파티에서 언급했었지. 오칼 상회와 에렐의 관계를 이간질한 자에 대해서 말이야.”

“아.”

나는 쉽게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다음번 초대는 꼭 응해 줬으면 하는군. 오칼 상회와 에렐, 둘 사이를 이간질한 게 누구였는지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 이후 성검이니, 왕위 계승이니, 시험이니 하는 이유로 정신이 없어져서 그 일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 그 이야기는 지금 할까요? 어쩌다 보니 저희 둘만 남았는데.”

나는 비어 버린 카시안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던 역시 카시안의 빈자리를 보며 얼굴을 굳히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칼 상회와 에렐의 오해에 대해서는 묻어 두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러나 그건 묻어 두자.

‘상대가 거물일 때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이군.’

왕자인 리던이 이런 반응을 보일 만한 거물은 많지 않았다.

“국왕 폐하이신가요? 아니면 왕비님?”

내 질문에 리던이 어색한 얼굴로 제 턱을 매만졌다.

“어떻게 알았지?”

“왕자님께서 일을 묻자고 하시는 거라면, 그런 거물이 연관됐을 때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못 당하겠군.”

리던이 헛웃음을 흘리며 선선히 인정했다.

“왕비님이시다. 오칼 상회와 에렐의 사이를 끊으려고 한 건.”

“왕비님은 제게 유감이 없으실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서야 왕비와 나 사이에 악감정이 있을 만한 부분이 생각났다.

‘내 쪽에서 먼저 파혼을 요청했지.’

왕비는 카시안과 이브리아의 약혼을 적극적으로 성사시킨 장본인이었다.

‘정확히는 나와의 약혼이 아니라, 오베론 가문과의 약혼을 위해서 애쓴 거지만.’

어쨌든 파혼으로 그간 왕비가 쏟았던 많은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됐다.

‘게다가 왕비는 자신을 모후로 만들어 줄 아들을 아주 아꼈던 것 같은데…….’

“제가 카시안을 먼저 차서 화나신 거였을까요? 그냥 얌전히 차여 줘야 했나?”

“뭐?”

내 말에 리던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레이디 오베론, 그대는 대체로 총명한데 이상한 부분에서 아둔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아둔하다는 말은 좀 그렇지 않나요?”

“그만큼 황당한 소리라는 뜻이야.”

리던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왕비께서는 왜 에렐에 목재를 끊으려고 하신 건데요?”

“그거야 당연히…….”

거침없이 입을 열었던 리던이 왜인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머뭇거리는 그의 얼굴이 조금 멋쩍게 보이는 듯도 했다.

“당연히 뭐요?”

“왕비께선 그대와 내 사이를 걱정하신 거다. 그래서 애초에 우리 쪽과 오베론의 관계를 틀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설마, 우리가 약혼이나 결혼, 뭐 이런 방식으로 결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다고요?”

약혼과 결혼이라는 말에 리던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대체 그걸 왜 걱정하시죠? 우린 누가 봐도 그럴 사이가 아닌데.”

리던과 이브리아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 나빠도 보통 나쁜 게 아니었다. 그때의 이브리아는 카시안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래서 카시안을 위한다는 핑계로 그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리던을 지독하게 깔보고 무시했다.

물론 리던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브리아의 조롱과 무시에 똑같이 대응하며 그녀의 속을 긁어 댔다. 덕분에 사이 나쁜 개와 고양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대가 먼저 파혼을 선언한 게 마음에 걸리셨던 거겠지. 어쨌든 그대가 배신을 당한 거니까, 카시안을 더 곤란하게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셨을 테고.”

“그중에 저와 왕자님의 결합이라는 것도 있었던 거고요.”

“그래.”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네요.”

만약 이브리아가 캐서린의 물고기 중 한 명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장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게 리던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되면 몰라도, 저랑 왕자님은 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나는 그 말에 리던도 충분히 동의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리던을 보자, 그가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게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몰라서 왜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우리 사이가 좀 많이 나빴잖아요.”

“사람 사이라는 게 좋았다가도 나빠지고, 나빴다가도 좋아지는 거 아닌가?”

“그건 또 그렇지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남자한테 배신당했다고 그 형님을 유혹하는 건 좀, 도덕적으로 그렇잖아요?”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아무리 막장 드라마라도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욕을 먹을 판이었다.

“……거기서부터가 문제였군.”

리던이 나쁜 사실을 깨달았다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리던은 내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왕비께선 그런 걱정을 하셨다는 거다.”

“정말 그런 목적이셨다면 왕비께선 실패하신 거네요.”

“무슨 말이야?”

“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서도 서로를 조롱하지 않고 있잖아요.”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못 할 풍경이었다. 예전이라면 서로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썩는 것 같다면서 진저리를 쳤겠지. 하지만 이제 리던과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이였다.

“오히려 왕비께서 오칼 상회와 에렐을 이간질하는 바람에, 그걸 계기로 사이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사이가 좋아졌다고는 생각하나?”

“그럼요.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리던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