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6/156)

* * *

나의 일방적이었던 오해가 풀렸다. 하지만 오해가 풀렸다고 곧장 해리를 옆에 두며 쓰다듬고, 안아주고, 키스하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민망했다.

‘이 민망함을 소멸시킬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민망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해리는 민망함에 그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해리는 정말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가 되기라도 한 건지, 내가 일하는 곳마다 찾아와서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내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리의 자리를 마련할 정도였다.

“이브리아. 아직도 바빠?”

해리가 책상 앞에 붙어서 내게 물었다. 한참 전부터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주위를 맴도는 해리 때문에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실제로 처리한 서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네. 바빠요. 너무 바빠서 해리 얼굴 볼 시간도 없어요.”

나는 이번에도 의미 없이 서류를 넘기며 활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활자에 집중하려고 애를 써도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구나.

“어떻게 하면 네가 안 바빠지는데?”

해리가 내가 들여다보던 서류를 손에서 빼앗아갔다. 어차피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서류였다. 나는 그 서류를 포기하고, 책상에 쌓여 있는 또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해리가 이번에도 내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갔다. 다시 손이 텅 비었다.

“어떻게 하면 안 바빠지냐니까, 응?”

“글쎄요.”

나는 새 서류를 집고, 해리는 또 그걸 뺏고. 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결국 내가 두 손을 들었다.

“해리. 나 계속 방해할 거예요?”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방해 안 할게. 어떻게 하면 네가 안 바빠져?”

“그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바라보았다. 천장에 닿을 기세로 가득 쌓인 서류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했다.

‘웬만한 서류는 전부 노예 왕자들에게 넘겼는데도 이래.’

재해 복구에, 새 사업 구상에, 인재 영입에 대한 자료까지.

‘서류는 자가 증식하는 성질을 지닌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열심히 처리하고, 미루고, 버리는 데도 줄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서류가 다 사라지면 안 바쁘겠죠.”

“전부 태워버릴까?”

해리가 당장이라도 서류를 불태울 기세로 눈을 반짝였다.

“안 돼요!”

나는 펄쩍 뛰며 해리의 손에서 서류를 다시 뺏어왔다.

“그렇게 없애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일 처리를 해서 없애야죠.”

“그럼 네가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게 어때?”

“시킬 사람이 없잖아요.”

이미 인세티아 남작과 두 노예 왕자에게는 많은 서류를 떠맡겼다. 아마 그들의 책상 위에도 내 앞에 쌓인 것만큼의 서류와 자료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럼 이걸 시킬 사람이 생기면 문제없는 거야?”

“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에렐은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인재를 영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인재들은 다들 왕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니까.’

왕도에는 기회도 많고, 능력에 대한 보상도 크다. 그러니 인재들이 죄다 왕도로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 또 뭐가 문제라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긴 한 것인지, 해리가 겨우 그런 걸 가지고 힘들어했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일할 녀석 몇 명 불러 줄까?”

“해리가요?”

“응. 마계에서도 꽤 일을 잘하던 녀석들이었으니까, 여기에서도 실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마계라면, 악마를 말하는 거예요?”

“응. 내가 아는 녀석들은 다 악마지.”

해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서류 처리시키려고 악마를 불러요?”

“넌 고작 불붙이려고 날 불렀는데?”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금세 해리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악마를 어떻게 데려올 건데요? 해리가 마계에 가서 끌고 올 거예요? 내가 죽어서 계약 끝나기 전까지는 못 돌아간다면서요.”

내 말에 해리가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씩 웃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

“하지만 내가 아는 악마는 테오하리스 하나뿐인데요.”

소설을 읽을 때 나왔던 악마의 이름은 해리의 진짜 이름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이번에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괜찮아. 악마들 이름이라면 내가 알고 있잖아.”

해리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내게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마계에는 하급 악마들이 있어. 오로지 잡일을 하기 위해서만 태어난 녀석들이지. 이 정도 서류는 금방 처리할걸?”

“이 정도 서류를 금방이요?”

“응. 아마 한 놈이 이틀이면 끝내겠네.”

세상에. 이 많은 양을 혼자서 이틀 만에! 감탄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 * *

쌍둥이 악마 레피와 리피는 설레는 마음으로 인간의 부름에 응했다.

“우리를 불렀나, 인간이여.”

인간이 하급 악마를 부르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라서, 두 악마는 최대한 위엄에 찬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야. 똥폼 그만 잡아.”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악마의 위엄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해리 님?”

“해리 님!”

목소리만으로 해리를 알아본 두 악마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해리는 시큰둥하게 그들의 인사를 물린 뒤 옆에 서 있는 인간을 가리켰다.

“인사는 저쪽한테 해. 너희를 부른 건 저쪽이니까.”

그제야 두 악마는 자신들이 인간에게 불려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 위엄있는 자세로 돌아왔다.

“어째서 우리를 불렀나, 인간?”

“어허. 높임말 써라, 레피.”

해리의 지적에 레피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어째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인간님.”

인간님이라니. 제정신이라면 절대 쓰지 않을 호칭이었지만, 뒤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들을 관찰하는 해리가 있었다. 곧 해리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인간이 웃으며 두 악마에게 명령했다.

“이 서류 좀 처리해줘요.”

“……예?”

“이 서류 좀 처리해달라고요. 엄청 급한 거라서, 오늘까지 해결해야 돼요.”

그제야 두 악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서류가 산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럼 우리를 부른 이유가…….”

“당연히 서류 처리를 시키기 위해서죠.”

그 말에 두 악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류 처리라니!’

레피와 리피의 원대한 꿈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계에서는 강한 상급 악마들의 심부름이나 도맡아 하는 둘이지만, 인간계에서는 좀 더 대단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전쟁이라든가, 살육이라든가. 그런 걸 체험이라도 해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그 정도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서류에서 해방만 시켜 주십사…….’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간계로 나와서까지 또 서류였다. 심지어 마계에서 처리하던 것보다 양도 많았다.

게다가 마계에서는 분명 위엄 넘치던 테오하리스도 이상했다.

‘인간계로 떨어지실 때 머리라도 부딪혔나?’

인간을 보며 얼빠진 것처럼 계속 웃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테오하리스가 이런 모습으로, 인간에게 똥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을 리가 없었다.

‘레피.’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리피가 레피를 불렀다.

‘응, 리피.’

역시나 멍하니 그 풍경을 지켜보던 레피가 황망하게 대답했다. 천천히 두 악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 순간, 둘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무래도 우린 좀…….’

‘망한 것 같아…….’

* * *

나는 흐린 눈을 하고 책상에 앉은 두 악마를 열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레이피지스와 리이피지스. 생긴 것이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 하급 악마였다. 해리와 똑같은 은발은 길게 늘어뜨려 허리까지 닿았고, 새파란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악마들은 전부 아름다운가 봐.’

그래도 역시 우리 해리가 가장 잘생겼지만 말이다.

“둘은 어떻게 구분해요?”

“냄새가 달라.”

“저한테는 여러분처럼 뛰어난 후각이 없거든요…….”

“아. 그렇지.”

해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곧 둘 중 한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레피, 너 머리 잘라.”

“예.”

해리의 명령에 왼쪽에 앉은 악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가위로 머리를 싹둑 잘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입이 떡 벌어졌다. 길었던 레피의 머리는 어느새 어깨에 닿을 정도의 단발로 변해 있었다.

“자. 이제 구분할 수 있겠지? 긴 머리가 리피, 짧은 머리가 레피야.”

“구분이 쉬워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머리를 막 잘라 버리냐.’

악마들의 해결 방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문제였다.

“레피, 리피. 둘 모두 잘 부탁해요.”

나는 레피와 리피를 차례로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몇 가지 설명했다.

“악마인 건 비밀이에요. 살인도 금지고요.”

하지만 내 말에 반응한 건 레피나 리피가 아닌 해리였다.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하급 악마들은 욕망을 탐닉할 수 없으니까.”

“어? 왜요?”

‘악마는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피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 하급 악마에게는 쾌락을 탐닉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급 악마로서의 삶은 반성의 시간이기 때문에…….”

레피의 설명을 리피가 뒤이었다.

“죄를 지은 악마는 다음 생에 하급 악마로 태어나 욕망을 잊은 채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상급 악마로 태어날 수 있지요.”

‘일종의 윤회 사상 같은 건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한 시스템인 것 같았다.

“그런데 악마들에게는 어떤 게 죄인가요?”

인간들에게는 살인이 엄청난 죄다. 하지만 악마들에게 살인은 쾌락을 즐기기 위한 당연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악마의 죄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일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장 큰 죄는 계약을 어기는 겁니다. 악마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계약에 아주 강력한 힘을 걸어 두거든요.”

“계약을 꼭 준수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거 하나 어겼다고 다음 생의 전부를 하급으로 쾌락을 탐닉하지 못하고 살아가다니.

‘역시 극단적이라니까, 이 악마들.’

나는 새삼 악마들의 극단적인 사상을 실감했다.

“그리고 두 사람도 악마인 건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하니까, 해리의 친척이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친척?”

해리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였다. 내가 왜 고작 저런 것들과 친척으로 취급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피와 리피도 송구하고 난처한 얼굴로 해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네.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잖아요. 은발은 흔치 않으니까, 가족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그래?”

해리의 시선이 레피와 리피에게 향하자, 두 악마가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이브리아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야지. 그렇게 하자.”

해리의 반응에 두 악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예에?”

두 악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뭐, 왜?”

해리가 눈을 부라리자 금세 쪼그라들어 다시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레피와 리피는 이 서류들을 처리해 줘요. 오늘 안으로 전부!”

나는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을 두 악마에게 떠넘기며 산뜻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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