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5/156)

* * *

제럴드는 한참이나 울음을 터트린 뒤에야 겨우 진정했다. 해리는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누르는 제럴드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 거머리가 마력을 잃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쫓아내 버리자.”

“너무 하십니다…….”

“네가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아?”

“저는 그냥 형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온 의외의 호칭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원래 자기보다 강한 사람은 형님으로 모시는 겁니다.”

강한 사람이라니. 제럴드가 생각지도 못하게 해리가 약한 부분을 저격했다. 해리는 자신이 강하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에게 아주 관대한 경향이 있었다.

“그래. 내가 뭐, 강하긴 해.”

역시나 해리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려 있었다. 아닌 척 딱딱한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릴 수는 없었다. 나는 분위기가 적당히 풀린 틈을 타 제럴드에게 말했다.

“그럼 꼬마 마법사님은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에렐에 머무르는 게 어때?”

“해결책이요?”

“찾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협회 쪽에도 도움을 청하면 함께 고민해주겠지. 식구를 버리진 않을 거 아냐.”

“맞습니다. 협회는 절대 식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럴드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협회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공짜로 머무르게 할 수는 없어.”

“……예?”

“물론 꼬마 마법사님의 사정은 딱하지만, 나도 그 쪽에게 당한 게 있고. 마냥 호의를 베풀기는 힘들거든?”

“그, 그러시겠지요.”

그에게 지은 죄가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지라, 제럴드가 별다른 변명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협회에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여기에 머무르는 대신 밥값은 해줘야겠어.”

“밥값이라면, 돈을 원하십니까? 그거라면 협회에서 기꺼이 지급할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돈이 아니라고 하시면…….”

“마도구를 제작하는 방법. 그걸 가르쳐줘.”

마도구는 마법사협회가 독점하고 있었다. 단순히 판매뿐만 아니라, 제작하는 방법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을 각인하는 비용은 협회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청요석을 많이 생산해도 스스로 마도구를 만들 수는 없지.’

협회는 도구를, 우리는 동력을. 양쪽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마도구 제작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술을 얻게 된다면? 자체적으로 마도구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게 될걸.’

물론, 우리의 이익은 곧 마법사협회에는 상당한 손해를 의미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마도구 제작 기술은 우리 마법사협회의 중요한 자산입니다.”

역시나 제럴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나는 다음 단계로 이동했다.

‘협상이 결렬되면 다음 단계는 당연히 협박이지.’

“하지만 그게 동지의 목숨보다 중요할까?”

“……예?”

“넌 내게 독을 먹였어. 날 죽이려고 한 거지. 영주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건 정당한 처분이고 말이야.”

나는 일부러 더 음산한 목소리로 제럴드를 위협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내 악역 얼굴은 상대를 협박하는 데 아주 유용했다. 역시나 제럴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사, 사, 사, 사형!”

“아무리 마법사협회라도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겠지?”

“힉!”

“나는 공작의 딸에다, 성검의 주인인데. 왕국하고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네.”

“그, 그, 그, 그런 의도는!”

적당히 채찍을 휘둘렀으니, 다음은 당근을 내밀 차례였다.

“그러니 적당히 타협하자는 거야. 기술과 그쪽의 목숨.”

“그……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이해해. 마법사협회와 의논해야겠지.”

제럴드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제럴드와 협회의 논의 결과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협회가 우리 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연히 우리에겐 잘된 일이다. 우리는 마도구 제작 기술을 얻어 자체적으로 마도구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쪽이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협회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것은 제럴드를 버리겠다는 뜻이 된다. 버림받은 제럴드가 어디에 갈 수 있을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마법사가 의지할 곳은 여기뿐일걸?’

게다가 제럴드는 협회에 대한 신뢰가 아주 깊어 보였다. 그런 사람일수록 버림받는 데 대한 분노와 상실감이 큰 법이었다. 이 경우 우리는 마도구 제작 기술을 가진 마법사를 얻게 된다.

‘이래도 저래도 이긴 게임이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논의하고 결과를 알려줘.”

* * *

마법사협회의 답변은 빨랐다. 그들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답변을 가져왔다. 물론 그것도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질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말이지.’

“협회가 제럴드를 구하는 쪽을 선택했네요.”

나는 협회에서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인세티아 남작에게 전했다.

“하지만 기술을 우리 쪽에 넘길 수는 없고, 대신 에렐에 마도구 기술자 둘을 보내겠대요.”

여기엔 제럴드까지 있으니 총 셋을 우리 쪽에 파견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제럴드가 저지른 어리석은 일은 눈감아 달라고 하네요. 와, 마법사협회, 여기 생각보다 훨씬 더 의리 있는 집단이었나 봐요.”

두 가지 길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제럴드를 버리는 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협회는 제럴드라는 어린 마법사를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아마 제럴드가 뛰어난 마도구 제작자라는 사실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을 것이다.

“파견 기간은 따로 없습니까?”

“제럴드의 금제를 푸는 방법을 찾아내면 그땐 모두 돌아가겠대요.”

내 말에 남작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 달 안에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잖습니까. 아니면 이미 방법을 찾았으면서 우리를 기만하는 걸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한을 걸어야죠.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 1년은 에렐에서 일하는 걸로.”

“그쪽에서 받아들일까요?”

“이걸 거절할 거였다면 진즉에 제럴드를 버렸을걸요?”

나는 협회가 편지와 함께 보낸 협정서의 가장 아래쪽에 새로운 조항을 집어넣었다. 이 수정된 협정서를 협회가 받아들인다면 평화로운 협정이 체결될 것이다.

“제럴드가 재미있는 마도구를 많이 만들던데, 그 덕을 좀 봤으면 좋겠네요.”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는 빗이나, 물을 부으면 음료가 되는 컵 모두 신기한 물품이었다.

‘팔면 꽤 돈이 되겠어.’

그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그 사업으로 또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아름다운 자본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거지.’

문제는 그렇게 사업이 늘어날수록 일거리도 많아진다는 거다.

‘인세티아 남작이나 노예 왕자 둘이 있지만, 이 정도는 한참 부족하지.’

이 귀찮은 일을 떠넘길 사람이 더 필요했다.

* * *

제럴드가 협회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리는 크게 실망했다.

“그럼 나랑은 안 놀아 주는 거야? 거머리 마법사가 안 떠나니까?”

그제야 해리에게 협회의 마법사가 떠나면 놀아 주겠다고 약속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댄 핑계였는데.’

나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해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짜증 나고, 퉁명스러워졌다. 나는 이번에도 부루퉁하게 해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네. 약속했잖아요. 꼬마 마법사가 떠나면 같이 놀기로.”

“하지만 걔는 한동안 안 돌아간다며.”

“그럼 한동안 같이 못 노는 거겠죠?”

“뭐라고?”

잔뜩 실망해서 소리친 해리가 곧 그다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꼭 걔가 두 발로 걸어서 협회에 돌아가야 해? 걔가 시체로 돌아가는 건 어때?”

“되겠어요?”

“……아니. 안 되겠지.”

해리가 풀이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내 눈치를 보는 잘생긴 남자라.’

달래주고 싶다. 머리 쓰다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여기서 넘어가면 해리는 예쁘게 웃어줄 거고, 그러면 나는 또 내가 좋을 대로 이상한 착각을 하고 말 것이다.

“왜 꼭 나하고 놀아야 하는데요? 엠마랑 같이 공부라도 해요.”

내 말에 해리가 흥미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엠마랑 공부? 그건 얼마 전에 했어.”

그 말에 내 눈에서 불이 번뜩였다.

“얼마 전에 했다고요?!”

“응. 꽤 유용했어.”

엠마와의 공부는 비밀이라고 했으면서. 내게 한 번 들키더니 이제는 숨기지도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자신을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한 해리가 엠마와의 공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그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어.”

“……그런 거라뇨?”

“그런 식으로도 사람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구나, 하고.”

“……그런 식이라면?”

계속 한 박자씩 늦는 내 질문에 해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나랑 놀아 준다고 하면, 내가 직접 알려줄 수 있는데.”

“……엠마하고 공부한 걸 나한테 알려주겠다고요?”

“응.”

‘이 문란한 악마가!’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문란한 악마는 처음으로 키스해봤다면서 벌벌거릴 땐 언제고, 이제는 여기저기서 그렇고 그런 걸 다 하고 다닌다.

“그거 엠마한테도, 나한테도 엄청나게 실례거든요? 해리의 기준에서는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기준에서는 절대 아니에요!”

내 외침에 해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실례야? 엠마는 오히려 열심히 배워서 아가씨를 즐겁게 해드리라고 했는데.”

“뭐라고요?!”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해리만 이상한 줄 알았더니, 엠마도 이상했다.

“두 분 왜 그러세요?”

해리와 내가 투닥거리는 사이 엠마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 당사자의 등장이라니. 난처한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엠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 임무를 수행했다.

“말씀하셨던 편지지 가져왔습니다, 아가씨.”

“아. 그래. 편지지.”

그러고 보니 엠마에게는 잠시 편지지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었다. 나는 엠마가 내미는 편지지를 받아들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해리와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엠마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엠마.”

그때 의문을 가득 품은 해리가 엠마를 불렀다.

“네. 개 요정님.”

“너랑 공부한 거, 이브리아한테 하면 안 되는 거야?”

“……예?”

해리의 질문에 엠마가 당황해서 내 얼굴을 살폈다. 나와 해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엠마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해리 노려보았다.

“개 요정님! 그건 절대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들켜버렸어.”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실 일인가요!”

“하지만 들켜버린 걸 어떡해.”

“개 요정님은 문제 될 거 없다 그거죠!”

해리가 느긋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자, 엠마가 더욱 붉어진 얼굴로 쩔쩔매기 시작했다.

“저어, 아가씨,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엠마를 보자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모든 원흉은 저 문란한 악마인데, 왜 순진한 엠마가 사과를 한단 말인가. 나는 해리를 노려보며 엠마를 토닥였다.

“엠마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요? 용서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용서하고 말고 할 일도 아냐.”

“아가씨…… 이렇게 저를 이해해주시다니…….”

내 말에 엠마가 잔뜩 감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죄송해요. 다시는 근무 시간에 몰래 숨어서 관능 소설을 보지 않겠어요!”

“……관능 소설?”

“네. 개 요정님께 들켰을 때 그만둬야 했는데, 자기한테도 보여 주면 그냥 넘어가겠다는 개 요정님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만…….”

“자, 잠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엠마의 말을 가로막았다.

“해리와 엠마가 함께 공부한다는 게 그럼……?”

“관능 소설 탐독이죠.”

엠마가 다 알면서 왜 물으시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마담 루이제의 관능 소설은 공부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마담 루이제라면, 엠마에게 지론을 가르친 그분?”

“네. 기억하고 계셨군요!”

엠마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엠마. 해리에게 책에서 배운 걸로 날 즐겁게 해주라고 그랬어?”

“……개 요정님이 그런 것까지 발설하셨단 말인가요.”

엠마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해리를 힐끗거렸다.

“저는 늘 아가씨의 로맨스를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남녀의 즐거움을 전혀 모르는 목석같은 남자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왜 갑자기 내 로맨스 상대가 해리로 바뀌었어? 왕자님하고 기사님은 어쩌고?”

내 질문에 엠마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아가씨. 왜 하나만 가지려고 생각하세요. 전부 다 가지시면 되는데요!”

“설마 그것도 마담 루이제의 지론이야?”

“마담 루이제께서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하셨죠.”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엠마를 보며 머릿속으로 천천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엠마와 해리는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건 실전이 아니라 관능 소설 탐독이었다. 난 그걸 실전으로 착각해서…….

‘으악.’

내가 했던 이상한 착각이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멋대로 착각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착각이었다. 그걸 철석같이 진실이라고 믿고, 혼자서 상처받고, 해리를 피하고, 온갖 아련한 척은 다 하고…….

‘민망해……!’

나는 마음속으로 황망하게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해리.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키스한 적 있어요?”

“있을 것 같아?”

내 질문에 해리가 별 우스운 질문을 다 듣는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이랑 그런 걸 왜 해? 가까이 가기만 해도 역겨운데, 해봤자 기분 더러워지기만 할걸.”

해리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이불킥 10년 감, 아니, 20년 감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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