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156)

11장. 의외의 인재

칠흑같이 검은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에 홀로 선 채 소리를 듣고 있었다.

[ʍɓʃIJßЩБξft?]

남자일까? 여자일까?

[ελгЖʔɮΓ!]

아이일까? 노인일까?

[ÞЗĦðɕʓДij...]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귓가를 울렸다. 목소리들은 내게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어쩐지 그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당신들은 누구야? 왜 내게 말을 거는 거야?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목소리들은 일방적이었다.

[ʐбŁıЖɹɛ!]

제 목소리가 내게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목소리들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격렬한 통증에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피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진득하게 귓가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혀댔다.

[ɥюøʧʨñ!]

그만해!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들이 내게 닿지 않는 것처럼, 내 소리도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만하라니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조금 더 소리를 높였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

그러자 거짓말처럼 귓가를 울리던 목소리들이 소멸했다. 공간은 다시 무로 돌아왔다.

“기다렸어요.”

처음으로 명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나 혼자뿐이었는데. 어느새 눈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새하얀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였다. 어둠 속에 있는데도 그녀의 금발이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보석 같았다. 아니면 태양이라든지.

“또 만났네요.”

여자는 다정했지만, 나는 그녀가 낯설었다.

“우리가 ‘또’ 만났다고요?”

어디선가 만났다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이렇게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한 번의 만남으로도 뇌리에 깊게 박히고 말 것이다.

“그래요. 이번이 두 번째에요.”

“전 당신을 몰라요.”

“그렇겠죠. 그게 규칙이니까요.”

“규칙이요?”

“네. 만나고, 헤어지고, 당신은 나를 잊어요. 그게 규칙이죠.”

“우리가 만나는 이유는 뭔데요?”

내 말에 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기억은 없어도 묻는 건 똑같네요. 첫 만남에서도 그렇게 물었거든요.”

“첫 만남이라면…….”

“비행기 추락사고였죠. 참으로 비극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비행기 사고라니. 그렇다면 내가 이 여자를 만난 건 ‘이브리아’로서가 아니었다.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만날 수 있어요.”

그렇다는 말은 내가 지금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다.

아, 제럴드. 그 꼬마 마법사가 기어이! 나는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처음 그를 따라나설 때까지만 해도 마음속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마도구를 자랑하고, 마법 도안을 함께 그리는 동안 경계심을 슬쩍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면 나를 방심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수를 쓴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자가 화가 나서 씩씩대는 나를 위로했다.

“지금 당신 곁에는 그가 있잖아요.”

“그?”

“테오하리스요.”

“해리를 아세요?”

“모르는 자가 없을걸요. 그는 상당히 특이한 악마거든요.”

“그런데, 해리의 이름을 아시네요?”

원래 인간은 악마의 이름을 모른다. 나처럼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난 인간이 아니니까요.”

놀랍지도 않았다. 이런 공간에서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여자는 이미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나는 태양신이에요.”

“어…… 태양신이라면…….”

“당신이 내 심장을 가지고 있죠.”

나는 붉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떠올렸다. 예전의 삶에서부터 나를 쫓아온 그 반지! 지금도 손에 끼고 있었다.

“혹시 에렐의 축제에서 내게 이 반지를 주고 간 사람이 당신이었나요?”

“아뇨.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죠.”

“페루에서 반지를 판 것도요?”

“네. 나의 대리인이죠.”

여자가 빙긋 웃었다.

“당신은 자신이 반지를 선택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였어요. 내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적임자로.”

“당신의 심장을, 제자리에요?”

“네.”

“거기가 어딘데요?”

“지금 말해줘도, 당신은 잊을 거잖아요.”

“아. 그렇네요.”

머쓱해져 볼을 긁적이는 내 얼굴을 보며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나는 오래전 힘이 필요하다는 인간들에게 내 심장을 빌려줬어요. 잠시만 쓰고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죠. 내 심장을 가지고 멀리 도망갔어요.”

따뜻하던 여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나는 오랫동안 내 심장을 찾아 헤맨 끝에 그 반지를 찾아냈죠. 하지만 심장을 잃은 내 힘은 불완전해서, 그걸 직접 가져올 수가 없었어요.”

거기까지 설명한 여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을 여기로 불렀어요. 내 심장이 있는 나의 세상으로.”

“여기로, 라고요?”

하지만 여기는 책 속의 세계였다. ‘진짜’ 세계가 아니지 않나.

“알아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죠. 여기가 책 속의 세계라고요.”

“그게 아니라는 말인가요?”

“당신이 어떻게 그 책을 손에 넣게 됐는지 기억해요?”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뭐였지?

페루에서 한국은 멀다. 비행기로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무료한 비행시간을 견디기 위한 책을 가져갔다. 그게 <레이디 캐서린>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어디에서 얻었지? 그 책을 산 기억도, 누군가에게 받은 기억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내 곁에 당연하다는 듯 그 책이 있었다.

“심장의 전달자인 당신이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이 세계를 보여준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의 형태로요. 내가 상당히 괜찮은 이야기꾼이거든요.”

여자가 빙긋 미소를 짓자, 소멸했던 목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군요.”

여자가 어지러운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돌아가면 당신은 나를 잊을 거예요. 이 공간에서 나눴던 대화도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겠죠. 그게 심장을 잃은 내 힘의 한계니까.”

“이 기억이 사라지면, 내가 어떻게 당신의 심장을 돌려주러 가죠?”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당신을 위해 꽃길을 만들어 줄 테니까요. 당신은 편안하게 그 길을 걸어오기만 하면 됩니다.”

여자가 팔을 뻗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심장을 돌려받을 그 날 다시 만나요, 전달자여.”

여자의 손끝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고 칠흑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찼다. 점차 밝아져 오는 시야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몸이 아주 무거웠다.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바닥까지 가라앉을 것으로 생각했던 몸을 한 번에 위로 끌어 올렸다. 몸이 순식간에 수면 밖으로 끌려 나왔다.

“허억!”

나는 숨을 토해내며 눈을 번쩍 떴다. 시야는 흐렸고,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것 같았다.

내 몸을 단단하게 붙잡은 온기가 없었다면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브리아.”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해리의 목소리였다.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도 해리가 아닐까? 나는 눈을 깜빡여 흐린 시야를 회복했다. 선명해진 두 눈에 지독하리만치 평온한 해리의 얼굴이 보였다.

“해리.”

내가 이름을 부르자 해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나, 되게 향기 좋은 차를 마셨는데…….”

머리가 멍해서 제대로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해리가 대신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응. 거머리 자식이 너한테 독을 먹였어.”

“그게 독이었구나.”

향기가 너무 좋아서 독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닌가? 원래 화려하고 예쁜 식물이 독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잖아.’

아마 향기도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 화려한 향기로 독기를 감추고,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 어떻게 깨어난 거예요?”

“해독약을 받았어. 거머리 마법사가, 뒤늦게 자기 실수를 깨달았는지 빌면서 해독약을 주지 뭐야?”

해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럴드가 있었다. 제럴드의 몰골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해독약을 줬다면서요?”

하지만 제럴드의 몰골은 누가 봐도 자발적으로 해독약을 준 모습이 아니었다.

“응. 실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조금 도와줬어.”

“조금?”

내 지적에 해리가 웃으며 제 말을 정정했다.

“음. 조금 많이.”

태평한 해리와 달리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제럴드에게서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죽은 건 아니죠?”

내 질문에 해리가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넌 내가 사람 죽이는 거 싫어하잖아. 난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딱 죽기 직전까지만 때린 건가요…….”

나는 역시 악마다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써 일어나도 돼?”

해리가 걱정스럽게 내 허리를 붙잡아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덕분에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자기 식구를 건드렸으니 마법사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제럴드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 딱 죽기 직전까지만 때린 건지,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사건이 벌어졌으니 때린 건 어쩔 수 없다.

‘치료라도 제대로 해서 면피를 하는 수밖에.’

“우선 방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러서 치료를…….”

“야.”

해리가 의사를 부르려는 나를 저지했다. 그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너 방금 저 거머리가 준 독을 먹고 죽을 뻔했거든?”

“알아요.”

“알면서 저 자식을 치료할 의사를 불러?”

“그렇다고 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마법사협회는 에렐의 큰 고객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쪽이 내게 먼저 독을 먹인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난 지금 멀쩡했다.

‘결과로만 봤을 때는 저쪽이 더 피해자처럼 보인단 말이지.’

상대가 편리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완벽하게 치료해야지. 해리가 때렸던 사실조차 모를 만큼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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