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156)

* * *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다음 날 제럴드가 만신창이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옷과 머리가 잔뜩 그을린 그를 보고 있자니, 처음 에렐을 찾았을 때의 이지적인 분위기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뭘?”

“불쌍한 우리의 동지를 부추기셨죠? 그래서 우리의 동지가 저를!”

“이거, 해리가 그런 거야?”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키우는 개가 버릇이 나빠 사람을 물었으니, 책임은 주인인 내게 있었다.

“절 쫓아내려고 뒷공작을 벌이셨겠죠. 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아요!”

“……많이 다쳤네. 의사를 불러 줄 테니까 치료받아.”

나는 보호자 된 도리로 내 개에게 물린 제럴드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내 호의를 거절했다.

“제가 당신의 도움을 받을 것 같습니까? 불쌍한 우리의 동지를 세뇌한 그 방법으로 나까지 세뇌하려는 속셈이겠죠.”

“나한테 그런 능력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제럴드가 불신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님. 당신도 제가 피곤하실 겁니다.”

“의외네. 그걸 알고 있었다니. 계속 피곤하게 굴기에 전혀 모르는 줄 알았어.”

‘알면서도 이랬다면 더 짜증나는 자식이군.’

나는 웃으며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하지만 어린 마법사는 그런 나의 속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도 제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의식쯤은 있었습니다. 그러니 피차 이 지리한 공방을 끝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동의해. 드디어 돌아갈 마음이 생겼어?”

“설마요!”

제럴드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젓더니, 금세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차분하게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더군요.”

“그랬지.”

‘전부 너 때문이었지만.’

내 얼굴을 보면 순진한 마법사를 놓아달라, 세뇌를 멈춰달라 소리를 지르는 통에 진지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하는 한숨을 내쉬며 늘 하고 싶었던 제안을 먼저 꺼냈다.

“마주 앉아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볼까? 그러면 내가 해리를 세뇌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좋습니다. 대화.”

제럴드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차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차를 권하는 예의는 있었다.

“좋아. 마법사가 대접하는 차는 처음인데, 맛이 기대되네.”

“특별히 좋은 차로 대접하겠습니다.”

* * *

나는 제럴드의 방으로 초대를 받았다. 제럴드의 방이라고 해봐야 내가 내어준 우리 저택 안의 공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인세티아 남작은 협회 사람을 박대하면 청요석 거래에 문제가 생긴다며 그를 적절히 대접하자고 제안했다.

‘마법사 협회는 장기고객이니까 말이지.’

고작 일주일 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인데. 제럴드의 방은 우리 저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뭐야?”

“아. 빗입니다. 머리를 빗기만 해도 감은 것 같은 효과가 나지요.”

“그럼 이건?”

“그건 잔입니다. 물을 넣으면 단맛이 나는 음료로 바뀌는 기능이 있지요.”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와. 마법사들의 마법이 이 정도로 대단한 줄 몰랐어. 전부 제럴드가 만든 거야?”

“네. 저는 마력은 적은 편이지만, 마도구 제작 쪽으로 재능이 있어서요.”

제럴드가 뿌듯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소년 마법사는 칭찬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 한참 칭찬이 좋을 나이다.’

“그럼 혹시 나도 마도구 제작을 배울 수 있어?”

나도 적은 수준이지만 마력이 있었다.

‘마법을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도구 제작은 가능하지 않을까?’

“영주님께서요?”

제럴드가 잠시 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정말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0.5로 유명하신 영주님이라도, 각인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있죠.”

“…내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명해?”

“그럼요. 0.5의 마력량은 최초거든요.”

“역사상 내가 유일한 0.5라고?”

“예. 마력측정 역사상 최하위입니다. 역사책에 기록되실 거예요.”

‘그런 이유로 역사책에 기록되고 싶지 않아….’

나는 아득해져 오는 머리를 짚으며 제럴드에게 물었다.

“각인에 재능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데?”

“그건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면 됩니다.”

제럴드가 제 가방을 뒤적여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곳에는 아주 복잡한 마법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제가 도구에 도안을 각인하기 전에 연습한 겁니다. 이 수준의 도안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1mm의 오차로도 마법 기능이 달라지기 때문에 계획에서 절대 벗어나면 안 돼요.”

“이걸 도구에 어떻게 새기는 건데?”

“마력을 견디는 펜이 있습니다. 대개 미스릴로 만들어요. 그걸로 도구 위에 그리는 거죠. 마력을 물감 삼아.”

제럴드가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한 번 따라 그려보시겠습니까?”

척 보기에도 복잡한 도안이었다.

‘나 미술에는 소질 없었는데.’

하지만 이브리아의 몸은 다를지도 모른다.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 해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 * *

“괜찮네요.”

제럴드가 내 그림을 보며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설픈 부분이 있지만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재능이 있으시네요, 영주님.”

“정말?”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창시절에는 미술 실기에서 늘 꼴등을 도맡아 했었는데. 정작 펜을 들자 막힘없이 그림이 그려졌다. 손이 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마 진짜 이브리아가 가지고 있던 재능이 아닐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잘도 움직였으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원작의 이브리아는 죽을 때까지 이 재능을 몰랐구나. 안타깝게도.’

이브리아는 늘 대단한 재능을 지닌 캐서린을 질투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에게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각인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

“우선은 스승이 있어야겠지요. 저도 스승님께 도안을 하나씩 배우며 점차 제 도안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하지만 마법 각인을 가르친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당연합니다. 전부 협회 소속이거든요. 마도구 제작은 협회가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깥사람들에게 그 기술을 절대 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재능은 그림의 떡이군.’

재능을 발견했는데도 발휘할 수가 없다니 썩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아쉬운 마음으로 도안을 바라보고 있으니 제럴드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제 차를 마시죠.”

“아. 그렇지. 해리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럴드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제럴드가 만들었다는 마도구들을 구경하며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좋은 걸 만드는 기술을 독점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나쁘던 마법사 협회에 대한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준비됐습니다.”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제럴드가 차를 준비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드십시오. 말레나입니다.”

“말레나? 처음 듣는 차 이름이야.”

“예. 마법사 협회에서 개발한 차거든요. 풍부한 꽃향기가 일품이지요.”

제럴드의 말 그대로였다. 찻잔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진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러게. 정말 향기 좋다.”

향이 좋아서였는지, 나는 홀린 듯한 심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가까워지자 꽃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달콤할 것 같아.’

나는 황홀한 심정으로 차를 마셨다. 입에 머금은 차의 향긋한 내음이 온몸에 퍼졌다.

“향이 정말 좋지요?”

“응. 혹시 이거 구입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구입해 자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판매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내가 정말 귀한 차를 먹은 거구나. 어, 그런데…… 이거 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흐려진 건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말레나 향기에 머리가 마비된 건지 정신까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뭐……”

“죄송합니다. 가련한 마법사를 구해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에요.”

멀어지는 정신의 끝자락에 씁쓸하지만 단호한 제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그 마법사 놈을 어떻게 쫓아내지?’

해리는 저택의 지붕 위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며 제럴드를 쫓아 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마법사 놈이 떠나야 이브리아가 나랑 놀아 줄 텐데.’

이브리아 생각을 하자, 해리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해리가 큰 마법을 쓰고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후, 이브리아가 미묘하게 그를 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래도 이브리아는 여전히 그를 피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그것도 이브리아를 바꾸지 못했다. 결국 해리는 매달리는 방법을 택했다.

위대한 악마가 하찮은 인간에게 매달리다니? 마계에 있는 녀석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다. 그런 악마가 있다면 가문의 수치라고, 그런 놈은 악마가 아니라고 당장 내치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이 부끄러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브리아는 최고니까.’

해리에게 이브리아는 최고의 존재였다. 해리에게 유일한 존재니까, 늘 그의 안에서 첫 번째였다.

‘한 명 중에 1등이라.’

좀 웃긴 말이었지만 어떤가. 그 사람이 제게 1등이라는 게 중요했다.

해리는 이브리아가 불렀기에 이 세상에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굳이 인간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해리가 이곳에서 하는 모든 일은 이브리아와 연관이 있었다. 해리는 이브리아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브리아가 살인을 싫어하고 권력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지만 괜찮았다.

‘이브리아가 해주는 충전은 효과가 좋거든.’

그녀와 입을 맞추면 살인을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를 짓누르지 않아도 본능이 공허해져 폭주하는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충전을 해주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다시 깨어난 날 이미 충분하게 채워 두었으니까.

‘게다가 그 마법사 놈이 돌아가면 다시 놀아 준다고 했으니까.’

그때 다시 충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요정님! 개 요정님! 어디 계세요?”

그때 복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해리는 이미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를 개 요정님-이라는 우스운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이브리아의 하녀 엠마뿐이었다. 해리는 가볍게 지붕을 타고 내려가, 손쉽게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악!”

갑자기 창문에서 튀어나온 해리를 보며 엠마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다.

“개 요정님. 꼭 이렇게 등장하셔야 돼요?”

“넌 나를 꼭 그렇게 괴상쩍은 호칭으로 불러야겠어?”

“이 호칭이 이미 입에 붙어서…….”

개 요정님이라는 호칭이 이상하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던 엠마가 멋쩍게 웃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로 해리에게 손짓했다.

“개 요정님. 제가 새로운 걸 가져왔는데, 같이 공부하실래요?”

“공부?”

공부라는 말에 해리가 눈을 반짝였다. 인간계의 모든 것들이 시시하고 역겨운 해리지만, 엠마와 함께하는 이 공부라는 것은 꽤 즐거웠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엠마의 역겨운 냄새도 참을 수 있어.’

해리는 공부의 효과를 이미 체험했다. 엠마와 함께 배운 것을 이브리아에게 써먹자, 이브리아가 정말 좋아했었다. 물론 이브리아는 기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짙어지는 이브리아의 향기와 붉어진 얼굴을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좋아. 어디에서 할래?”

“오늘은 서관 창고가 좋겠어요. 거기가 비어 있거든요. 그쪽 담당하는 애들한테 들었어요.”

엠마는 사용인들과의 인맥을 활용해 매번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왔다. 해리는 엠마의 그 능력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공부를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할 수는 없으니까.’

“좋아. 거기로 가자. 오늘도 기대되네.”

“저도 그래요.”

해리와 엠마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며 서관 창고를 향해 걸었다. 걷는 내내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늘 할 공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관 창고에 도착했다. 엠마가 미리 파악한 것처럼, 서관 창고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좋아. 이제 시작하자.”

“예, 개 요정님.”

해리의 제안에 엠마가 비장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고 있던 앞치마에서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담 루이제의 신간! 왕도를 뒤흔든 문제작! <순수를 머금은 꽃>입니다, 개 요정님.”

“마담 루이제의 신간치고는 제목이 약하군.”

해리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엠마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개 요정님. 고수는 언제나 양면성을 노립니다. 과감한 제목에는 평이한 내용, 평이한 제목에는 과감한 내용. 그게 법칙이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주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겠지요. 불온 도서로 지정돼 폐기될 뻔한 것을 겨우 구제했다고 들었습니다.”

엠마의 말에 해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엠마와 마담 루이제의 관능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관능 소설에 등장하는 행위들을 말이다. 이 공부가 시작된 계기는 단순했다. 엠마가 읽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고, 해리는 그걸 발견했고, 추궁당한 엠마는 해리도 동지로 끌어들였다.

해리는 이 관능 소설이 신기했다. 마계에는 이런 책이 없었다. 마계에 있는 녀석들에게 관능 소설을 보여 준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런 소설을 읽을 시간에 직접 하면 되잖아?

하지만 해리는 지금까지 그런 일들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악마가 원하는 쾌락이 살인과 욕정이라면, 해리는 극단적으로 살인에 흥미를 느끼는 쪽이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뒤엉켜 즐거움을 나눌 때 그 놀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죽이지 그래?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은 어리석었다.

‘내가 욕정에 눈을 뜨게 될 줄은…….’

해리는 이브리아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모두 기쁘게 하는 것이 해리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해리는 방법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악마들이 서로 뒤엉켜 나뒹굴 때 이론이라도 배워둘 것을 그랬다.

그렇게 후회하는 와중에 등장한 것이 이 관능 소설이었다.

‘마담 루이제. 당신을 내가 존경하는 두 번째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첫 번째는 당연히 이브리아였다.

“그런데 개 요정님.”

막 책을 펼치려던 엠마가 조심스럽게 해리의 눈치를 살폈다.

“요즘 아가씨가 조금 이상하신 것 같아요. 기운도 없으신 것 같고.”

엠마의 말에 해리가 괜히 찔려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누가 뭐라고 했나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엠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전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혀요.”

“그거 무슨 기분인지 알아.”

“그렇죠? 아가씨가 밥을 조금만 남기셔도 초조해지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

“맞아요!”

엠마가 재빨리 맞장구쳤다. 마담 루이제의 관능 소설 스터디. 사실 이 모임의 진정한 목적은 이브리아 찬양이었다.

“오늘 이브리아가 하늘을 보며 웃었어. 파란 게 너무 예쁘대.”

“사실은 우리 아가씨가 더 예쁘신데 말이에요!”

두 사람은 어느새 마담 루이제의 신간을 내려놓고 이브리아 찬양에 열을 올렸다.

* * *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개 요정님.”

“나 역시 그랬다. 다음 공부를 기다리고 있겠어.”

목적을 무사히 충족한 두 사람은 첩보 요원들처럼 깔끔하게 각자의 길로 떠났다. 해리는 이제 이브리아의 침대를 차지하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브리아의 방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요즘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을 마주쳤다.

“가련한 동지여.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늘 같은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제럴드였다. 그는 해리가 아무리 욕하고 짜증을 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강한 세뇌를 당했다며 해리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해리는 이런 거머리 같은 놈을 처음 봤다. 인간들은 조금만 겁을 주면 쫄아서 그에게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아예 간이 없는 건지 매번 해리를 붙잡고 질질 늘어졌다.

“안 간다고 했어. 내가 있을 곳은 여기다.”

“……동지여.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전 이제 당신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어요.”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제럴드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해리는 놀라서 거머리 화신임이 틀림없는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포기한 건가? 잘했다, 거머리 마법사.”

“예. 당신을 설득하기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대신?”

“당신을 협박하기로 했습니다!”

“협박?”

해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누가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테오하리스를 협박할 수 있을까. 마계에 있는 어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것을, 겨우 인간계의 하찮은 꼬마가 시도하다니.

‘용기는 가상하군.’

해리는 악마였다. 악마는 대체로 무모한 인간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해리는 관대하게 그의 협박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래? 무슨 협박? 한 번 해봐.”

“당신을 세뇌한 그 여자 때문에 여길 떠나지 않겠다면, 그 여자를 없애버리겠습니다!”

“……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꼬마 마법사의 협박을 관대하게 받아 주기로 마음먹었던 해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야. 거머리.”

“전 거머리가 아니……”

“너 잘못 건드렸어. 협박이 틀렸으니까, 그거 포기하고 다른 협박을 해봐. 그건 들어줄게.”

해리는 무모한 인간에게 관대함을 발휘해 기회를 줬다. 지금이라도 제럴드가 다른 협박을 한다면 관대하게 받아 줄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제럴드는 해리의 돌변한 태도를 보고 이 협박이 제대로 먹힌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 아뇨! 전 안 바꿀 겁니다! 동지여, 저도 그 여자를 죽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얌전히 저와 함께 협회로 가요.”

제럴드가 덜덜 떨면서도 해리에게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당장이라도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가련한 마법사 동지를 구원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만 약속하면 그 여자에게 해독약을 주겠습니다.”

“뭐?”

차가운 얼굴로 가소롭다는 듯 제럴드를 바라보고 있던 해리의 얼굴에 금이 갔다.

‘해독약을 주겠다는 말은…….’

이미 독을 먹였다는 뜻이었다.

“야, 너.”

해리가 경고도 없이 제럴드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별 힘을 쓰지 않은 채 가볍게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제럴드의 발이 공중에 높이 떠올랐다.

“윽! 놓아주세요!”

“놓아주세요? 이브리아에게 독을 먹여 놓고, 놓아달라는 말이 나와?”

“으윽,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날 이렇게 험하게 다루면 안 알려줄 겁니다!”

제럴드가 벌벌 떨면서도 크게 소리쳤다. 그는 세뇌당한 마법사에게 이브리아가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여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 세뇌당한 마법사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내가 왜 몰라? 난 이브리아가 어디 있든지 거기로 갈 수 있어.”

해리는 차갑게 제럴드를 비웃고는 그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악!”

제럴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해리는 눈을 감고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영혼의 조각이 있는 곳. 그곳에 이브리아가 있을 것이다.

해리는 쉽게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영혼의 조각은 그의 일부니까. 그걸 찾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해리는 빠르게 그곳으로 이동했다.

바닥을 구르던 제럴드도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쫓았다.

‘설마. 어떻게 찾겠어?’

제럴드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브리아를 숨겨둔 곳으로 달렸다. 부족한 체력으로 달리려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으, 이럴 때는 공간 마법 전문가가 정말 부럽다니까!’

이를 악물고 이브리아를 숨겨둔 공간에 도착하자, 이미 해리가 더러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여길 어떻게 찾았…….”

제럴드가 놀라움을 담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해리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단지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던 제럴드의 몸이 푹 꺾어졌다.

“크억! 쿨럭, 큽!”

제럴드는 등을 내려찍는 강한 힘에 연신 기침을 하며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해리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리는 계속해서 제 팔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제럴드의 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흐으, 흡!”

어느새 제럴드의 몸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제럴드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바닥을 기었다. 최대한 해리에게서 멀어지려고 열심히 움직였지만, 느린 움직임은 해리의 걸음보다 한참 느렸다. 해리는 제럴드의 옆으로 다가와 발로 그의 등을 찍어 내렸다.

“크악!”

“해독제 빨리 먹여.”

“당신이, 협회에 간다고 약속하면…… 으악!”

해리의 발이 다시 한번 더 제럴드의 등을 찍었다.

“해독제 빨리 먹이라고 했어. 그러지 않으면 다음은 머리통을 차버릴 거니까.”

“흐윽!”

해리가 아직 머리를 걷어차지도 않았는데, 제럴드는 두려움으로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난, 당신을 구하려, 세뇌에서, 흐읍!”

“하. 미치겠네. 내가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니까 진짜 순종적인 개인 줄 알았나 봐.”

해리가 픽 웃으며 제럴드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내 주인님한테나 순종적인 개지, 너희 같은 것들한테도 그런 줄 알았어? 날 꼬리나 흔드는 개 취급할 수 있는 건 내 주인님뿐이라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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