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인세티아 남작이 경고했던 것처럼 해리에 대한 소문을 모두 차단할 수는 없었다. 그날 강둑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보는 눈이 많은 사실은 어디로든 멀리 퍼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냥 우리가 먼저 해리의 정체를 밝히는 게 어떨까요?”
나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한 번 사실이 드러난 이상 다시 감추기도 어려웠고, 이상한 억측을 만드느니 우리 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나았다.
“내 정체? 내가 악마라는 거?”
“아뇨. 그건 안 되죠. 해리가 전설 속 마법사의 후손이라는 쪽이 무난할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사람들도 무리 없이 믿을 것이다.
“검은 숲 깊은 곳에 살다가 에렐에 내려왔다고 하면, 해리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하지 않죠.”
“그럼 나 이제 마법 마음대로 써도 돼? 그동안 마법 안 쓰고 해결하느라 피곤한 일이 많았거든.”
“네. 마법사의 후손이라서 재능도 물려받았다고 하면 되겠죠.”
나는 해리의 말에 대답하며 습관적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건 뭐야. 왜 내 시선 피해?”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래요? 그냥 갑자기 저쪽이 보고 싶어져서요.”
“흐음, 그래?”
해리가 불만스럽게 대답하고는 내 시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또다시 슬그머니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이거 봐. 너 지금 누가 봐도 내 시선 피하고 있거든?”
“아니라니까요. 이번엔 갑자기 이쪽이 보고 싶어져서 그런 거였어요.”
“그 말을 믿겠냐.”
해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내가 키스 너무 못해서?”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날부터 이상하잖아. 다른 건 짐작 가는 게 없단 말이야.”
해리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입을 떼려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접니다.”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해리의 정체를 설명하려고 불렀어요. 방금 합의한 대로 설명할게요.”
나는 해리에게 인세티아 남작의 방문 이유를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그와의 논쟁을 끝내버렸다. 해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온 인세티아 남작 때문에 더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영주님. 그리고…….”
내게 인사한 남작이 해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해리에요.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그분의 후손이죠.”
“역시 그랬군요.”
남작이 예상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리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이 살짝 웃었다.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는 전설 속의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후손까지 있을 줄이야……. 강둑에서 푸른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겁니다.”
남작은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영지 내에 이런 훌륭한 인재가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 그런데 해리 님께선 언제까지 에렐에 머무르실 생각입니까?”
남작이 걱정스럽게 해리를 쳐다보았다.
“에렐에 머무르시겠다면 최고의 대우를 하겠습니다.”
에렐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라, 내로라하는 인재들은 금세 왕도로 떠나곤 했다. 푸른 불꽃을 쓰는 강한 마법사라면 다른 곳에서 엄청난 대가를 받고 일할 수 있었다.
“필요 없어.”
해리의 말에 남작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금세 다시 남작을 웃게 했다.
“최고의 대우 같은 거 안 해줘도 난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의 시선을 피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화가 나서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남작은 기쁨에 차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에렐에는 마법사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거든요. 너무 추운 지역이라 특히 불이 중요합니다.”
드물게 활짝 미소 지은 남작이 이번에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남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자, 해리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애써 해리를 무시하며 남작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어떻게 대마법사님의 후손을 알게 되셨습니까?”
“검은 숲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마침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기에 내가 고용했고요.”
“드워프에, 성검에, 이제는 대마법사의 후손까지. 더욱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되셨군요.”
나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이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왜 처음에는 해리 님의 정체를…….”
이유를 물으려던 남작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정체를 숨기는 게 맞겠죠. 세간의 관심도 그렇고, 이런 강한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하면 마법사 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마법사 협회가 왜요?”
“마법사란 족속들이 원래 호기심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남작이 아차-하는 얼굴로 해리를 살폈다.
해리 역시 마법사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 같았다. 하지만 해리는 마법사가 아닌 악마였다. 남작의 말에 기분 나쁠 이유가 없었다. 해리가 제 말에 기분 상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남작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무엇이든 태우는 불꽃을 가진 마법사가 나타났다면, 아주 귀찮게 할걸요. 마법을 가르쳐달라, 불꽃을 연구하고 싶다, 우리 협회의 일원이 돼라.”
남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단언했다.
“아주 난리도 아닐 겁니다.”
“해리가 거절하면 되잖아.”
“영주님. 마법사란 족속들은 두 가지로 유명하지요.”
남작이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호기심과 끈질김. 절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 * *
남작의 예언 아닌 예언은 금세 현실이 됐다.
“마법사 협회의 수석마법사, 제럴드입니다.”
해리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마자 마법사 협회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소년 마법사였다. 해리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안 가르쳐 줄 거야.”
제안을 꺼내기도 전에 얼굴을 보자마자 거절당할 줄 몰랐는지, 수석마법사 제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전 아직 아무 말도…….”
“그래서? 다른 말 할 거야? 마법 가르쳐 달라고 할 거잖아.”
해리의 맞는 말 폭격에 제럴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좋습니다. 마법을 가르쳐주시는 게 어렵다면…….”
“연구도 싫어. 내 불꽃 안 줘.”
“아니, 전 이번에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 할 거야? 연구하게 불꽃 달라고 할 거잖아.”
또다시 제럴드의 패배였다. 스코어는 2:0. 해리의 완승이었다.
“푸른 마법사님. 어째서 저희의 제안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럴드가 한숨을 내쉬며 해리를 살살 꼬드겼다. 해리는 매우 귀찮다는 얼굴로 옆에 서 있던 나를 가리켰다.
“난 이 사람 거라서, 내 마음대로 어디 못 가.”
“……예?”
제럴드가 얼빠진 얼굴로 나와 해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두 손을 내저었다.
“고용! 내가 이 사람을 고용했거든.”
“아, 고용!”
그제야 제럴드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언제 끝나지요?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저희 쪽에서 모시겠습니다.”
“어, 그게…….”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해리가 짧게 대답했다.
“평생.”
“예?”
“죽을 때까지 고용하기로 계약했어.”
“예에? 하지만 그건 불공정계약입니다!”
놀란 제럴드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성검의 주인이시라기에 좋게 봤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순진한 마법사를 꼬여내서 평생 계약을 맺을 수가 있습니까? 이건 노예 계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잔뜩 흥분한 제럴드가 씩씩대며 해리의 손을 붙잡았다.
“푸른 마법사님. 걱정 마십시오. 이런 계약은 원천 무효입니다. 이 악덕 귀족 고용주와 싸울 수 있도록 저희가 돕겠습니다!”
“필요 없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감사 인사는 됐습니……, 네?”
해리가 당연히 좋다고 수락할 줄 알았던 제럴드가 뒤늦게 해리의 말을 인지하고 얼빠진 얼굴을 했다.
“필요 없어. 난 이 계약에 아주 만족하니까. 내가 만족하는데 그게 어떻게 불공정계약이야? 설령 노예 계약이라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해리가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난 내 주인님이 아주 마음에 들거든.”
* * *
제럴드는 영주가 제공한 방에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몸이 떨리는지, 제대로 전화기를 꺼내도 힘들 정도였다.
전화기는 마정석을 이용해 사용하는 마도구로, 멀리 있는 상대와 음성 통신을 할 수 있는 장치였다. 마도구 중에서도 특히 만들기 힘든 장치라, 외부에 유통도 거의 되지 않았다. 마법사협회를 제외하면 왕실에만 납품됐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지휘관에게 전화기를 주어 왕실과 빠른 연락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럴드가 전화기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이 임무가 마법사협회에 아주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제럴드의 목표는 푸른 마법사를 협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사실 제럴드는 그게 어려운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협회는 부유했다. 마법이라는 힘도 있었고, 그 힘으로 얻은 권력도 상당했다. 그들은 푸른 마법사가 원하는 어떤 대가라도 쥐여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푸른 마법사는 단박에 제안을 거절했다. 제럴드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전화기를 연결했다.
-제럴드. 임무는 완수했나?
금세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마법사 협회에 있는 수신기를 쓰고 있을 터였다.
“실패했습니다.”
-실패? 도대체 그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기에 실패를 해? 조율은 불가하다고 하던가?
“조건을 조율해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제럴드가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성검의 주인이라는 영주가 순진한 마법사를 완전히 세뇌해놨습니다!”
-뭐라고?
“평생 계약을 했답니다! 완전히 노예 계약인데, 그걸 하고서도 자기는 주인님이 좋다면서 실실 웃었어요! 완전히 세뇌당해서 제정신이 아닙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짓을, 우리 마법사에게!”
-뭐라고?!
수화기 너머에서 제럴드 못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감히 우리 마법사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제럴드, 이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네!
“맞습니다. 이건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곳에서 적극 지원하겠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우리에게 연락해. 무엇이든 준비하지. 함정에 빠진 불쌍한 마법사 동지를 꼭 구해내게!
“알겠습니다. 제가 해내겠습니다. 가엾은 우리 동지를 그냥 둘 순 없지요.”
그렇게 말한 제럴드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는 세뇌 당한 불쌍한 마법사를 구하기 전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제럴드가 비장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제럴드의 마지막 말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언령이었다.
마법사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마나를 이용해 그 힘을 마법으로 재현하는 사람들이 마법사였다. 다짐에 마나를 실으면 그것은 금제가 되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깨려고 해도 절대 깰 수가 없었다. 금제가 사라지는 것은 다짐을 완수했을 때뿐.
-제럴드……. 자네…….
불쌍한 동지를 구해내려는 제럴드의 숭고한 다짐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