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북구를 돕느라 엉망이 된 몰골을 정리하고 따뜻하게 목욕까지 마친 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해리에게로 향했다.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나를 맞이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해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힘을 충전해야 눈을 뜰 수 있는 거야.’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숙이고 해리에게 입을 맞췄다.
‘충전돼라, 충전돼.’
그런 생각을 하며 기계적으로 입을 맞추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어?’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붙잡힌 손이 휙 끌려가 몸이 침대 위에 처박혔다.
“윽!”
거칠게 던져진 탓에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겨우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했다. 어느새 눈을 뜬 해리가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건 아닌지 해리의 붉은 눈이 흐릿했다.
‘아. 이런 모습 본 적 있어.’
해리를 불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소파에서 잠든 내 위로 해리가 올라왔었다.
‘그리고 내 목덜미를 깨물렸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해리가 몸을 숙이고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
그날과 완전히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나의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날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거라고 착각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해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행동이 갈구하는 것은 또 무언인지. 이제는,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가… 가만히 있어야겠지?’
나는 좌우로 눈을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해리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는 건 거부감이 없었다. 나는 해리를 좋아했고, 해리에게 필요하다면 이런 건 해줄 수도 있었다.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다리 위에는 해리가 올라탔고, 양팔은 그의 손에 잡혀 침대에 내리눌렸다. 해리는 거칠게 나를 제압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건 내가 아는 해리가 아니야.’
내가 기꺼이 그렇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상대는 내 기억 속의 해리이지, 지금처럼 완전히 정신 나간 해리가 아니었다.
‘이런 건 싫어!’
나는 해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무식하게 힘이 센 악마를 나같이 허약한 인간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인님. 도와드릴까요?]
버거워하는 내게 유피테르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어요?]
[이미 많이 썼던 후광 공격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발동하죠? 두 손이 다 붙잡혀 있는데.]
성검의 기능은 손에 닿아야 쓸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부족한 성검이라.]
유피테르가 그대로 말을 잃었다.
‘역시 이 세상에서 믿을 건 나 자신뿐이군.’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힘을 내 몸을 뒤틀었다. 내가 몸을 뒤틀 때마다 해리는 성가시다는 듯, 하지만 너무도 간단하게 나를 제압하고 제가 할 일에 집중했다. 그나마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입술뿐이었다.
“해리! 정신 차려요!”
나는 열심히 해리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깨어나라고 얼마나 충전도 많이 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예요?”
정신 나간 해리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쳐도 해리가 들어주지 않자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커졌다.
‘이런 거군.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리는 기분이.’
“야! 테오하리스, 이 개자식아!”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 순간, 목덜미를 지나 쇄골에 파묻혀 있던 해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
흐렸던 붉은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브리아?”
어느새 평소와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해리였다.
“이브리아.”
해리가 명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머릿속의 무엇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야, 이, 예의 없는 개자식!”
나는 분통이 터져 해리에게 소리쳤다. 지금 이 상황이 열 받고, 그런데 또 해리가 일어난 상황이 반갑기는 하고, 해리에게 무리한 소원을 빈 게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 으, 어어?”
해리는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어, 야, 너 왜 그래? 어? 누가, 누가 이상한 짓 했어? 어?”
“그래! 했다! 네가 이상한 짓 하고 있잖아!”
내 외침에 해리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지금 자신과 나의 자세를 확인했다. 눈을 깜빡이며 몇 초간 굳어 있던 해리가 곧 정신을 차렸다.
“으어?!”
해리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내 팔을 제압했던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씨이…… 진짜 나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을 구석이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어, 어어어…….”
해리는 여전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울지 마.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해리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정말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람 달래 본 적 없어요?”
“어, 그게, 누가 울면 짜증 나서 다 죽여 버렸는데…….”
“우는 게 짜증 난다고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우는데!’
나는 화가 치밀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우는 건 짜증 안 나!”
해리는 당황한 얼굴을 하고는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얼굴에 닿는 해리의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너무, 기분이 이상해.”
눈물을 닦는 해리의 손이 천천히 느려졌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울한 것 같은 해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해요.”
“어? 네가 사과하는 거야?!”
해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너무 큰 소원을 빌어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미안해요.”
내 말에 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미안해? 내게 소원을 말하는 건 네 당연한 권리야.”
“하지만 나는 해리에게 계약자가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정작 다급한 상황이 왔을 때는 계약자로서 악마에게 소원을 빌었다.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나 말걸.’
사람 좋은 척을 한 게 너무 창피했다. 하지만 해리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서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 건데? 난 네 소원 들어주는 게 좋아.”
“그게 왜 좋아요.”
“모르겠어. 그런데 그게 좋아.”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해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하고 싶은 거 생겼어.”
“뭔데요?”
“친구끼리는 절대 안 하는 짓. 해도 돼?”
“설마, 키스하자고요?”
“응.”
“지금이요? 이 상황에?”
“지금 이 상황이니까 하는 거 아냐? 누가 봐도 그런 거 할 분위기야, 이브리아.”
해리가 우리의 자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으로 민망한 자세로군.’
“침대에서 내려가서 하면 안 돼요? 지금 이 자세는 좀.”
“싫어. 지금 할래.”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붙잡아 침대에 내리눌렀다. 조금 전 나를 강제로 제압할 때와 똑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전혀 안 무서워.’
그건 서서히 가까워지는 해리의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가서인지도 모른다. 해리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입을 벌렸다. 해리는 서두르지 않고 내 안에 제 숨결을 불어넣었다. 다정하고 능숙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는 놀라서 완전히 얼어있었으면서.’
아무래도 악마는 배우는 게 빠른 것 같다.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해리를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젠 키스하는 게 상당히 자연스럽네요?”
“아, 그렇지? 열심히 공부했거든.”
“공부? 키스를요?”
“어, 음……. 키스를 비롯한 남녀의 일들을?”
해리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걸 어떻게 공부하는데요?”
“어? 그건 엠마랑…….”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네? 엠마? 엠마랑 그런 걸 공부한다고요?”
“아. 이거 비밀이었는데.”
해리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굴에도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뭐야. 이런 걸 공부를 해? 그것도 엠마랑?’
“하.”
속에서부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는 인간이 역겹다더니. 나하고만 할 수 있다더니.’
입맞춤으로 기분 좋게 달아올랐던 뺨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왜 그래?”
해리도 내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낀 듯했다. 그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일어날래요.”
“어?”
“일어날 거니까, 비켜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목소리가 싸늘했다. 완전히 바닥을 기는 목소리에 해리가 머뭇거리며 내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몸을 누르고 있던 해리의 무게가 사라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내가 뭐 잘못 했어?”
해리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나 아무 잘못도 안 한 것 같은데…….”
해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해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혹시 내 키스가 별로였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해서 문제였다.
‘누가 공부까지 하면서 키스 연습을 해오랬냐고. 왜 어울리지도 않는 모범생 행세야?’
나는 속이 배배 꼬여서 코웃음을 쳤다.
“아뇨. 아주 많이 잘하시던데요.”
“하지만 엠마는 내가 잘 못 하니까 화를…….”
또 엠마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듣기 싫은 해리의 말을 제지했다.
“그 이야기 좀 그만할 수 없어요?”
“그럼 왜 화났는지 말해줘.”
“화 안 났어요.”
“지금 이게?”
해리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래. 사실 누가 봐도 나는 지금 화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말해봐. 왜 화났는지 말해줘야 내가 또 실수 안 하지.”
“아니에요. 해리는 계속 해리가 하던 대로 하면 돼요. 내가 기분 나쁜 건 내 문제니까.”
해리는 누구와도 키스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유가 있었다. 비록 해리가 내 악마, 내 개, 내 호위라고는 하지만, 그게 해리와 다른 사람의 키스를 막을 명분은 아니었다.
‘사실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인데.’
하지만 해리가 너무 특별하다는 것처럼 나와 입맞춤을 해서 바보 같은 착각을 했다.
착각.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한 거야.’
누군가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만큼 부끄러운 게 없었다. 해리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것도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해리가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인간 따위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으니.’
해리는 나와 친구와는 절대 안 하는 짓을 하겠다고 했다.
‘난 친구가 아니라 쾌락을 줄 수 있는 계약자. 딱 거기까지인 거지.’
말하자면 간편한 도시락 같은 게 아닐까? 가까이 있고, 거부감도 안 들고. 손쉽게 쾌락을 채울 수 있었다.
‘해리 입장에서는 도시락이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면서 친구가 되자고 한 거 아냐.’
민망했다. 너무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불킥 5년 감, 아니 10년 감이다, 진짜.’
나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브리아?”
해리가 나를 부르며 무어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게 느껴졌지만, 귓속에 들어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