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하.”
나는 사다리 위에 올라 지붕 보수를 돕고 있는 리던을 불렀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본 그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레이디 오베론?”
“왜 못 볼 것을 본 듯한 반응이세요?”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다들 마을 보수에 힘쓰고 있는데, 영주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나요.”
“하지만, 그 남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어.”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사람 옆을 지키고 있어서 뭐해요. 나중에 깨어나면 내가 옆을 지켜줬다는 사실도 모를 텐데.”
마냥 걱정만 하며 곁에 붙어 있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전 상대가 눈 뜨고 있을 때 잘해주는 쪽이에요. 억울하면 당장 눈 뜨고 달려오겠죠, 뭐.”
“그런가.”
리던이 애매하게 웃으며 사다리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주변에서 함께 집을 보수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조용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사실은 그 남자와 어떤 사이냐고 물으려고 했어. 잠들어 있는 당신에게 너무 당연하게 손을 뻗기에.”
아마 내가 술에 취해 리던의 방에서 잠들었던 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물으려고 했었다는 말은, 이제 그 질문이 필요 없어졌다는 거네요.”
“그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 것 같아서, 질문을 바꾸기로 했어.”
“어떤 질문인지 알 것 같아요. 그 남자가 누구냐. 그걸 묻고 싶겠죠?”
리던 뿐만이 아니었다. 그날의 풍경을 지켜본 모든 사람이 묻고 싶을 이야기였다.
“그래. 그 남자, 누구야?”
“제 말을 믿으실 거예요?”
“대답에 따라서는.”
“대답이 뭔지에 따라 달라지는 신뢰는 진짜 신뢰가 아니죠.”
“……대답 안 하겠다는 거군.”
“네.”
당당한 대답에 리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어.”
“우리 꽤 친해진 거 아니었어요? 그런 사이에는 강제적인 수단 같은 거 안 써요.”
“우리가 친해졌다고 누가 그래?”
“카시안 전하요. 우리가 사이좋아 보인대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사이인 거 아니겠어요?”
“뭐?”
리던이 황당하다는 듯 멀리서 사람들을 돕고 있는 카시안을 힐끗거렸다. 나는 그런 리던을 지켜보다가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내 질문에는 답 안 하면서, 부탁은 하겠다?”
“전하께서도 궁금하시지 않아요? 우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온 이유.”
헛웃음을 흘리던 리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가 엄청난 비로 인해 엉망이 된 마을을 한 번 둘러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계속 말해봐.”
“비구름 방향이 예년과 달랐어요. 평소에는 북에서 남으로 오는데, 이번엔 그 반대였죠. 에렐의 남쪽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리던의 표정이 변했다.
“……마법사 협회.”
“그리고 그들은…….”
“날씨를 조절하는 실험을 하지.”
나는 완전히 달라진 리던의 표정을 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궁금해하실 줄 알았어요.”
리던이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확신하고 있는 건가?”
“아직은 아무것도요. 하지만 하나씩 알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어떻게 알아볼 생각이지?”
“왕자님은 좋은 친구를 하나 두고 계시잖아요.”
“……루크.”
어렵지 않게 제 친구의 이름을 생각해낸 리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내가 아니라 루크의 도움이 필요한 거였군.”
“그 루크를 움직일 수 있는 게 전하시니까, 전 전하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해리가 들었다면 ‘넌 역시 전생에 여우였어’라고 했을 만한 대답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나, 레이디 오베론?”
“예전에도 전하께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나요?”
와이번 문제로 리던과 거래 아닌 거래를 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럼 아마 그때부터 말을 잘했나 봅니다.”
“뭐라고?”
내 말에 리던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좋아. 나도 그 문제는 알아보고 싶으니 루크에게 연락을 해보지.”
“감사합니다.”
“말로만 감사를 표현하는 건 이브리아 오베론의 철학에 어긋나지 않나?”
루크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동정과 보답은 돈으로. 그게 그대의 철학 아니었어?”
“돈이 필요하세요?”
“그래.”
리던이 도움의 대가로 돈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놀라서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그가 조금 풀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내가 꼭 어린애 용돈 뺏는 양아치가 된 것 같군. 그대의 개인적인 돈을 달라는 게 아냐.”
“그럼요?”
“예산.”
“설마 에렐의 예산을 빼서 전하에게 달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무리 영주라도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할 수는 없었다. 공작을 대신해 운영을 맡고 있을 뿐, 에렐의 모든 것은 공작의 소유였다.
“내가 아니라, 내가 하려는 사업에 예산을 달라는 말이야.”
“그 말은…….”
“상류와 중류에 보를 만들겠다고 했잖아. 남작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어.”
“그래서 지금 영주인 저에게 청탁하시는 거예요? 이런 거 엄청난 감점인 거 아시죠?”
“누가 영주에게 청탁하는데?”
리던이 픽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난 이브리아 오베론에게 부탁하는 거야. 남작을 설득할 제안서를 함께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전 영주인데요?”
“제안서에 이브리아 오베론이라는 이름을 안 넣으면 되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겨우 노예 왕자들에게 떠넘긴 일이었다. 그걸 다시 떠맡을 수는 없었다.
“이건 원래 제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왕의 자격을 시험하는 거니까, 왕자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셔야죠.”
나는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하지만 리던의 일격이 아주 거셌다.
“왕은 혼자서 일하지 않아. 능력 있는 사람을 잘 쓰는 것도 왕의 덕목 아닌가?”
그것도 참 맞는 말이었다. 이어지는 맞는 말 퍼레이드에 나는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대에게 다 떠맡기겠다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도움이 필요해. 어째서 남작이 내 예산 요청을 거절했는지, 뭘 더 보충하면 될지. 난 전혀 모르겠거든.”
그렇게 말하는 리던의 얼굴이 아주 진지했다. 가만히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궁금해졌다.
“전하께선 왕이 되고 싶으세요?”
“아니라고 생각하나?”
“아뇨. 그렇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적으로 왕이 되고 싶다는 걸 말씀하신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리던이 무슨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입 밖으로 말하면 반역죄야. 나 같은 경우는 특히 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소설에서의 이야기였다.
<레이디 오베론>에서 리던은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냥 살아남고 싶어했어, 리던은.’
그 수단이 왕이 되는 거라면 그렇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면. 그때도 리던은 왕이 되고 싶어 할까? 어떻게 이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리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죽기 싫어.”
그리고 그 말은, 의외로 솔직했다.
“아마 사람이라면 다 그런 생각이 있겠지.”
“그렇죠. 저도 죽기는 싫으니까요.”
“혹시 그대는 그런 쪽이야?”
“그런 쪽이요?”
“왕이 되려는 사람이 대단한 이상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 말이야. 세상을 이롭게 만들고 싶다거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겠다거나.”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런가?”
리던이 오히려 내게 묻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 기준에 맞지 않을 거야. 난 내가 살기 위해 사는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리던의 말을 듣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은 거네요.”
“그래. 하지만 왕이 되고 싶어.”
리던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고 보니 정말 이런 말을 한 건 처음이군.”
그가 민망한 듯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대가 협조를 좀 해줘야겠어. 하나씩 도움을 주고받는 게 공평하잖아?”
“……조언 정도는 해 드릴게요.”
“치사하군.”
리던이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냥 왕에 더 적합한 건 카시안이라고, 마지막에 대충 그렇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원작에서는 카시안이 왕이 됐고, 그가 왕이 된 제레인트는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니까 왕이 되면 아주 잘 하겠지.’
카시안이 왕이 되는 건 확실한 정답이었다. 나는 그 확실한 정답을 선택하려고 했다.
‘시험이니, 자격이니 했던 것도 그냥 두 사람을 열심히 부려먹기 위해서였는데.’
누구도 결과를 알지 못하는 완벽한 미지수가 내 가슴 한구석을 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