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7/156)

* * *

나는 리던의 도움을 받아 해리를 침실로 옮겼다. 리던이 나를 도우며 ‘네 침실?’하고 놀라워했지만, 쓰러진 해리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정신이 없었다.

“의사를 부를까요?”

나와 리던의 뒤를 따라온 인세티아 남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의사를 불러도 좋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해리는 악마인데. 의사를 불러도 되는 건가?’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의사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멍하니 선 내게서 답을 듣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지 남작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방에서 사라졌다.

침대에 누운 해리의 얼굴이 아주 창백했다. 거기다 옷은 빗물과 핏물로 엉망이었다. 나는 해리가 이렇게 초라한 꼴로 누워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강한 악마가 왜?

나는 해리가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해리가 펼쳤던 기적의 순간을 떠올리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신의 규칙도 거스르는 것 같았던 그 풍경.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인가?”

옆에 선 리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왕실 신전에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가 남긴 불꽃이 남아 있어. 선명한 푸른색의 불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던을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오늘 본 불과 똑같았어. 완전히, 똑같았어.”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았다는 말만 반복하는 리던의 뒤로 의사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의사는 주변을 살펴볼 것도 없이 곧장 해리에게 직행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 공간에서 의사가 제일 필요한 사람은 해리였으니까.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해리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한참의 진찰 끝에 의사는 애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때요? 무슨 문제인가요?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죠?”

내 질문이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의사의 얼굴이 더 이상해졌다. 그 점이 더욱 내 불안을 부추겼다.

“저…….”

의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며 제가 진찰한 결과를 입에 올렸다.

“멀쩡합니다.”

“……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벙쪘다. 이거 돌팔이 아냐? 모두의 눈빛이 그런 소리를 담아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그런 우리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난처하게 웃었다.

“이런 말을 하는 제가 돌팔이 같아 보일 거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아무리 진찰해도 이상이 없습니다. 아주 멀쩡합니다.”

오히려 의사가 누워 있는 해리를 힐끗거리며 우리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분 손이며 옷에 묻은 피가 다른 사람 피는 아닙니까?”

의사가 그렇게 의심할 정도로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아무 이상이 없는 데 왜 쓰러진 거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건 보증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의사가 제 결백을 주장하며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세티아 남작.”

“예.”

“이 의사 돌팔이네요. 다른 의사 데려와요.”

“……네.”

“아니, 정말입니다! 정말로 저분은 이상이 없다니까요?”

의사가 끝까지 억울하다는 소리를 외치며 멀어졌다.

* * *

그 뒤로도 세 명의 의사가 더 찾아와 해리를 진찰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해리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의사들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며칠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여전히 굳게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종에게 명령해 더러워진 옷은 갈아입히고, 비에 젖은 몸은 따뜻한 물로 씻어냈다. 덕분에 외관상으로 해리는 멀쩡했다. 누가 보면 평범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이게 큰 힘을 사용한 악마가 다시 힘을 충전하는 방식이 아닐까? 악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의사들이 신체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확신했으니까. 아마 힘을 다시 채우고 있는 거겠지.’

쓰러지기 전에 힘이 채워지니 어쩌니 하는 말을 했던 것도 생각났다. 나는 해리가 충전 모드의 휴대폰 상태에 들어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소원을 비는 게 아니었어.’

내가 너무 큰 소원을 빌어서 이 사달이 난 거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매일 같이 해리를 찾아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해리는 이 충전으로는 힘이 충전되지 않는다고 얘기했지만, 그래도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충전 방법이었다. 나는 해리의 충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있는 힘껏 입술을 갖다 댔다.

‘기야 넘어가라, 넘어가! 내 힘을 가져가라!’

나는 기훈련을 하는 도사처럼 연신 주문을 외우며 해리에게 힘을 불어넣으려고 애썼다.

‘여태까지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리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사람들은 내게 해리에 관해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직도 그가 깨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해리가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나는 때아닌 폭우의 원인을 찾기 위해 나섰다. 해리가 비구름까지 전부 태워버려 며칠째 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저 멀리서 다시 몰려오는 먹구름을 이미 발견했다. 원래의 법칙보다 훨씬 이르게 우기가 찾아온 것이 확실했다.

사람들은 해리가 벌어준 며칠의 시간 동안 민가와 검은 숲 양쪽에 임시 제방을 쌓았다. 와이번들도 여기에 큰 힘을 보탰다. 덕분에 강둑의 한계선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미 상류와 중류 할 것 없이 강이 바짝 말라 있으니, 이 정도 방비면 이번 우기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 나와 인세티아 남작이 마주 앉았다.

“이렇게 우기가 일찍 온 적은 없나요?”

“1, 2주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의 변덕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상식적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자연은 말도 안 되는 변덕을 부린다. 이번의 이른 우기가 그 변덕일 수도 있었다.

“혹시 이번 우기가 다른 때와 다른 점은 없어요? 시기가 다른 건 이미 이야기했으니 제외하고요.”

“예년의 우기와 이번 우기의 차이 말입니까….”

남작이 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내게 맞췄다.

“그러고 보니 비가 시작된 방향이 이상합니다.”

“방항이요?”

“예. 항상 비구름이 북에서 남으로 왔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였습니다.”

예년보다 이른 시기와 달라진 비구름의 방향. 단순한 자연적 현상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구름이 온 방향, 그러니까 우리 에렐의 남쪽에 뭐가 있죠?”

“글쎄요. 다들 평범한 영지들이라…….”

인세티아 남작이 말끝을 흐리며 벽에 걸려 있던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쳤다. 대륙 전체의 모습이 담긴 지도. 남작의 눈길이 에렐에서 시작해 비구름이 몰려온 남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금 특이한 거라고 한다면, 마법사 협회의 본부와 루셀탑이 있겠군요.”

“아. 루셀탑.”

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루셀탑은 이 대륙의 모든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탑이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지었는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루셀탑을 세운 사람이 이 세계를 수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평화와 균형을 부수는 존재가 등장하면, 루셀탑의 정상에서 대륙을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나타나 세계의 이물질을 제거한다고 믿었다. 오래전의 예언에는 루셀탑이 무너지는 날, 세계의 멸망이 찾아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 현재의 루셀탑은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루셀탑을 이처럼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역시 <레이디 캐서린> 덕분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장소가 바로 루셀탑의 정상이었다.

‘왕이 된 카시안이 캐서린에게 루셀탑의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이 탑이 무너지는 날까지 널 사랑하겠다고 말하지.’

그리고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입맞춤.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그쪽보다는 마법사 협회 쪽이 좀 더 의심스럽네요. 그쪽은 예전부터 날씨를 조종하는 힘에 관심을 가졌잖아요.”

어느 인간 사회를 가든 가장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였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하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농사가 제대로 이뤄지는 게 중요했다.

농사가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날씨였다. 다른 조건들은 인간의 힘으로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는 인간의 힘을 벗어난 신의 영역이었다.

마법사들은 신의 영역에 관심이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가지지 못한 마력. 그것을 갖고 있는 마법사.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신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었고, 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날씨를 조종하려는 실험도 이런 생각 끝에 나온 것이었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지.’

그래서 더 위험했다.

‘실험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거니까.’

“최근에 마법사들이 그런 시도를 했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만약 실험했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말하진 않을 텐데요.”

“당연히 그렇겠죠. 뒷세계의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일에는 역시 정보 길드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내가 의뢰하면 이번에도 시큰둥하게 반응하겠지. 돈을 많이 주면 태도를 바꾸긴 하겠지만…….’

이번에는 드워프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처럼 많은 금액을 지급할 수가 없었다.

‘그땐 리던이 준 백지수표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리던이 준 백지수표 대신 리던이 있잖아.’

루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지금은 우리 에렐의 노예 왕자 1호를 담당하고 있는 그 남자 말이다. 리던이 부탁한다면 루크는 기꺼이 무상으로 정보를 캐내어 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마법사들이 실험을 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래서 우리 쪽에 피해가 온 거라면요?”

인세티아 남작이 심각하게 물었다. 마법사 협회는 우리의 큰 고객이었다. 대륙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이기도 했다. 정말 마법사 협회가 이번 일의 원흉이라면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것이 녹록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구석에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 건 싫었다.

“진심 어린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요구해야죠. 한 대 맞았는데 항의조차 못 하는 건 너무 화가 나는 일이잖아요.”

내 말에 남작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한 대 맞았으니 항의는 해야지요.”

하지만 남작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분 말입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남작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언급할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입단속을 하긴 했습니다만…… 본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완벽하게 소문을 차단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강의 상류까지 말라버린 큰 사건이니, 어차피 계속 감출 수도 없었을 거예요.”

“그분의 정체에 대한 소문도 다양합니다.”

“그래요? 다들 뭐라고 하는데요?”

“그분이 전설 속이 대마법사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대마법사의 후손이나 제자일 거라고 하지요.”

“남작의 생각은 어떤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후손이나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남작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저한테는 정답을 말씀해주실 거죠-라는 눈빛이었다.

“해리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아마 신나서 떠들걸요.”

상상만으로도 해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야. 내 힘 봤냐? 완전 대단했지?]

[이게 바로 푸른 불꽃의 마법사 테오하리스님의 힘이라고!]

[그동안 네가 얼마나 날 무시했었는지 이제 알겠어?]

해리의 성격을 생각하면, 깊게 잠들어 있느라 제 자랑을 못해 입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서 자랑이나 늘어놓으라고요. 이번에는 몇 시간이든 그냥 들어줄 테니까.’

10장. 푸른 불꽃

마을은 복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해리가 중간에 비를 멈추기는 했으나 그전에 쏟아진 비가 엄청나서 비가 그쳤을 무렵에도 이미 일부 피해가 발생한 뒤였다.

마을은 산과 숲에서 밀려온 흙과 돌로 엉망이었다. 침수 피해를 입은 민가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돌을 줍고 흙을 닦아 냈다. 침수 피해로 익사한 동물들의 시체를 처리하거나 눅눅해져 쓸 수 없어진 식량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 카시안과 리던도 있었다. 리던이야 이래저래 밖으로 나돌 일이 많았지만, 카시안은 정말 왕비의 치마폭 아래에서 곱게 자란 편이었다.

‘고생을 모르는 전형적인 왕도 귀족이라고나 할까.’

몸 쓰는 일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카시안이 생각보다 능숙하게 복구를 돕고 있었다.

‘하긴. 한 소설의 남자주인공이잖아. 이런 면이 있긴 하겠지.’

소설 속 카시안은 이브리아에게는 가혹하고 냉정한 남자였지만, 그 외의 모두에게는 선량한 왕자님이었다.

“왕자님이 이런 걸 해도 돼요?”

내 질문에 카시안이 황당하다는 듯 내 손에 들린 돌을 가리켰다.

“그러는 당신은요? 공작 영애가 이런 것도 합니까? 내 옆에서 얼쩡거리려고 이러는 거라면 그냥 저택에 돌아가세요. 걸리적거리기만 합니다.”

“전하. 제가 전부터 그랬잖아요. 이제 전 저하께 관심 없다니까요?”

예전 같으면 당장 ‘거짓말하지 마라’는 의심이 돌아왔을 텐데, 오늘의 카시안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대신 조금 가라앉은 카시안의 두 눈이 내게 닿았다.

“이젠 거짓말이라고 안 하네요? 드디어 믿기로 한 거예요?”

“……눈앞에서 그런 걸 봤는데 어떻게 안 믿습니까.”

“그런 거라뇨?”

“몰라서 묻습니까? 당연히 강둑에서의 당신과 그 남자죠.”

“아.”

‘그러고 보니 거기에 사람들 진짜 많았지.’

그때는 해리의 분위기가 이상해서 주변에 신경을 기울일 틈도 없었다.

‘내가 정확히 뭘 했더라?’

해리가 쓰러지고, 비의 원인을 고민하고, 마을의 복구까지 돕느라 그날의 일을 되새길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선 해리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은 건 확실했다.

‘그 뒤에는 해리에게 키스를 하려다가 거부당했지.’

이건 좀 민망했다. 해리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기에 충전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그건 충전이 아니라 그냥 키스니까 말이지.’

카시안도 그걸 보고 내가 이제 자신이 아닌 해리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해이기는 하지만, 나한테 나쁜 오해는 아니니까 그냥 둬야지.’

어쨌든 내가 카시안에게 마음이 없는 건 진실이니까 반 정도는 진실이었다.

“이제라도 내 마음이 떠난 걸 알아줘서 고맙네요. 이렇게 마을 사람들 도와주러 나온 것도요.”

내 말에 카시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날 왕자님으로 보고 있죠.”

“진짜 왕자님이시잖아요?”

“아뇨. 그런 의미의 왕자님이 아니라, 왕자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잖습니까. 당신은 날 딱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잖아요.”

카시안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아주 전형적인 왕자님이었다. 귀족적이고, 우아하고, 친절하다. 이브리아에게는 그러지 않았지만, 소설을 본 나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왕자님이시잖아요?”

내 말에 카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당신의 그런 부분이 싫었던 겁니다. 내게서 끊임없이 왕자님의 모습을 찾았죠.”

확실히 이브리아는 그런 면이 있었다.

‘언제나 카시안을 나의 왕자님-이라고 불렀지.’

무뚝뚝한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오라버니. 이브리아는 상냥한 왕자님의 미소를 본 순간 그의 애정을 모두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그렇게 악역이 탄생했지.’

“그런 나와 달리 캐서린은 그렇지 않은 당신의 모습을 찾아내고, 받아들이고, 사랑했겠죠? 그래서 캐서린을 선택한 거고요.”

소설이 그려낼 법한 아주 정석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유였다.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신기하군요.”

“오늘따라 왕자님이 제게 까칠하지 않으신 덕분이죠.”

“그건 오늘 그대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카시안의 눈이 내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으로 떨어졌다. 머리는 산발에, 옷은 흙투성이였다.

“이런 이브리아 오베론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사람은 변하는 법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리던이 마을 사람을 도와 지붕이 반쯤 날아간 집을 보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는 이만 저쪽으로 가볼게요.”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카시안이 리던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와서 보니 리던과도 꽤 친밀하더군요.”

“네. 리던 님이 제게 백지수표를 주셨거든요. 백지수표를 주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어요. 왜냐면 백지수표는 백지수표잖아요?”

“……네? 리던이 당신을 돈으로 매수한 겁니까?”

나는 카시안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제가 다른 일로 왕자님에게 도움을 드린 게 하나 있어서요. 대가는 돈으로 달라고 했더니, 백지수표를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참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카시안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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