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156)

* * *

인세티아 남작이 냉랭한 얼굴로 보고서를 내밀었다. 평소에도 딱딱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라파쉬와 내가 인세티아 남작의 술 창고를 약탈해서였다.

“돈 많이 벌어서 그 창고 다시 채워 준다니까요.”

“한 번 잃은 빈티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중고거래 있잖아요. 내가 웃돈 주고 중고거래해서라도 구해줄게요.”

내 말에 남작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술을 마시고 싶으셨으면 말을 하시지, 왜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잠입해서 술을 드십니까?”

“말했으면 좋은 술은 다 숨겨놨을 거잖아요.”

“그건 당연합니다. 어차피 술맛도 모르시잖습니까. 마시고 취하면 어차피 다 같은 술인데.”

‘하긴. 틀린 말은 아냐.’

지금 와서 기억나는 건 처음 마신 라펠리체 하나뿐이었다. 술에 완전히 취해서 마신 다른 술들은 무슨 맛이었는지는커녕, 어떤 병에 들어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 분께는 맥주가 딱입니다. 싸고, 양 많고, 빨리 취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성년의 첫 음주를 맥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그게 왜 하필 제 술이었느냐는 겁니다.”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제 보물창고를 약탈하지 못하실 겁니다. 더 강력한 자물쇠를 달아뒀으니까요.”

“음. 그 자물쇠 사람이 만든 거죠?”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겁니다. 당연히 사람이고요.”

“그럼 그것도 쉽게 따지 않을까요? 라파쉬는 드워프잖아요.”

“……드워프 마을에 자물쇠를 만들어 달라고 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의뢰를 하러 갈 태세였다.

“의뢰하러 가는 건 좋은데, 그 전에 두 왕자님 이야기나 해 봐요. 최근에 두 사람이 남작을 찾아가지 않았어요?”

내 말에 남작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던 님이 오셨습니다. 예산을 요청하셨고, 저는 근거자료가 부족하다며 거절했습니다. 다시 자료를 보충해서 오시겠다더군요.”

‘사회의 쓴맛을 보았군, 노예 왕자 1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노예 왕자 2호의 소식도 물었다.

“왕세자는요?”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예 방문조차 안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남작에게 예산을 쉽게 타내지 못할 건 예상했지만, 아예 찾아오지도 않을 거라는 건 예상 답안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날 예산에 관해 물어 본 사람도 리던 뿐이었다.

‘애초에 예산은 고려 사항에도 없는 사람처럼 굴긴 했지.’

상류와 중류에서 여과 없이 흘러드는 물로 불어난 강의 범람을 막으려면, 제방의 높이를 상당한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제방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비용도 올라갔다. 만약 상류, 중류와 협의에 그쪽에 보가 생긴다면, 흘러오는 물의 양 자체를 줄일 수 있으니 제방의 높이도 반 이상 줄일 수 있었다. 에렐에서 단독으로 제방을 지으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고, 상류와 중류에 보만 짓게 하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라면 둘 다 할 거라고 한 거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카시안의 계획을 알기 힘들었다.

‘나야, 뭐. 두 사람이 어떻게든 강의 범람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 하면 되지만.’

아직은 지켜볼 시기였다.

* * *

톡. 토독.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으으, 시끄러워.’

나는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요란한 소리를 피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곧이어 ‘쿠르르릉!’하고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오자, 더 버틸 수가 없어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잠에 취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에 다가섰다.

‘어?’

굳게 닫힌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자마자 눈앞에서 번개가 번뜩이고, 뒤이어 다시 한번 ‘쿠르르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던 소리의 정체가 바로 천둥이었던 것이다. 밖에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

나는 현실감 없는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창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영주님!”

내가 창밖의 풍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인세티아 남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당장 일어나셔야 합니다! 영주님!”

그가 평소의 예의를 잊은 채 요란하게 내 방문을 두드려댔다. 나는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후드 로브를 입은 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어찌나 푹 젖었는지, 그가 서 있는 자리 아래로 동그랗게 물웅덩이가 생겼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당황해서 그에게 물었다.

“비가 내립니다.”

“그건 나도 알아요. 비 내리는 것 정도는 확인했으니까.”

“단순한 비가 아닙니다. 이 정도의 비는, 우기에나 내리는 폭우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비일 수도 있잖아요.”

원래 소나기일수록 이렇게 강한 법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비가 내린 게 벌써 다섯 시간째입니다, 영주님.”

“네? 다섯 시간째라고요? 아직 우기는 아니잖아요. 여름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에렐의 우기는 두 번. 봄과 가을이었다. 내가 왕도에 머무르던 봄과 여름 사이 우기가 한 차례 지나간 뒤였다. 아직 다음 우기는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저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유를 찾기보다 피해에 대처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떤데요?”

“아직 강이 범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시간문제입니다.”

강이 범람하면 검은 숲의 흑철목 수액을 채집하는 것이 한동안 불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우기 동안 수액 채집에 어려움을 겪어 청요석 물량 맞추기가 빠듯한 상황이었다. 이번에 또 수액 채집이 더뎌지면, 약속했던 납품 일자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장사의 기본은 신뢰인데.’

게다가 이번 납품에는 브로치를 미끼 상품으로 거래를 튼 신규 귀족 고객들이 많았다.

‘첫 거래부터 기한을 어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든 범람을 막아야만 했다.

“직접 상황을 봐야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남작이 내게 미리 준비해 온 후드 로브를 건넸다. 나는 베개 아래 넣어 둔 성검을 꺼내 들고, 그가 건넨 후드 로브를 대충 꿰입은 뒤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미 저택 사람들 대부분은 깨어 있었다. 덕분에 한밤중인데도 저택이 대낮처럼 밝았다. 후드를 눌러쓰고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서자, 이미 서리기사단 전원이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해리의 모습도 보였다. 서리기사단을 소집할 때 함께 불려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서리기사단을 향해 당장 급한 명령을 내렸다.

“서리기사단은 당장 임시 제방을 쌓으세요. 와이번을 이용하면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작업이 가능할 거예요. 큰 돌을 찾아서 강둑에 쌓아요.”

“예, 알겠습니다!”

서리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와이번을 타고 날아올랐다.

“무슨 일이야?”

그들의 뒤를 따라 나 역시 강 쪽으로 이동하려는데, 저택에서 리던과 카시안이 뛰어나왔다. 그들 역시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다.

“지금 상황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나는 남작에게 탈 것을 가져오라고 눈짓하고 두 왕자에게 질문했다.

“도울 거예요, 말 거예요? 도울 거면 따라오고, 말 거라면 그냥 저택에서 조용히 기다리세요.”

“당연히 돕지! 무슨 소리야?”

리던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남작이 말 두 마리를 가져오자, 리던이 그중 하나에 올라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타. 너 승마 못 하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이브리아 오베론이 말 못 타는 건 유명한 이야기 아니었나? 아무튼 빨리 타! 급하다며?”

리던의 말이 맞았다. 나는 황급히 리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리던이 힘을 주어 한 번에 나를 말 위로 끌어 올렸다. 다른 말에는 인세티아 남작과 카시안이 올라탔다.

내가 안정적으로 말 위에 앉자마자 리던이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말이 쏜살같이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들이치는 비 때문에 시야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리던은 길을 잃지 않고 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서! 서둘러!”

“뭐 하는 거야? 빨리 움직여!”

강변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릴레이 하듯 돌을 달라 강둑에 쌓아 올렸다. 하늘 위에서는 먼저 출발한 용기사들이 커다란 돌들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지옥 같은 풍경에 리던마저도 입을 쩍 벌린 채 잠시 넋을 잃었다.

“리던! 정신 차려요!”

나는 말에서 구르다시피 뛰어내리며 리던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다급한 나머지 존칭도 생략한 채 이름을 불렀지만, 리던도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그대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합류했다. 비가 쏟아지는 데다 밤까지 깊어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피테르! 후광이요!”

나는 성검을 쥐고 빛을 불러냈다. 그러자 어두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져 시야가 환해졌다. 밝아진 시야에 드러난 풍경은 더 절망적이었다. 급격하게 불어난 물이 어느새 강둑의 가장 높은 곳까지 들어차 있었다. 나는 이를 질끈 깨물고 사람들과 함께 돌을 옮겼다. 하지만 돌이 쌓이는 속도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로 수위가 높아지는 게 더 빨랐다.

그때, 사람들을 뚫고 인세티아 남작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몰골 역시 강둑에 달라붙어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엉망이었다.

“영주님! 선택하셔야 합니다!”

“선택? 뭘?”

“민가입니까, 검은 숲입니까? 강둑 양쪽 모두를 지키는 건 무리입니다. 한쪽에 집중하면, 하나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작이 빗소리를 뚫고 내게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이 두 조로 나뉘어 양쪽 강둑 모두에 돌을 쌓는 지금 속도라면, 금세 물이 차오르는 속도에 역전당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나?

사람의 목숨, 삶의 터전. 그런 걸 생각한다면 당연히 민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검은 숲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 검은 숲이 침수당하면 청요석 거래처 수십 곳을 한 번에 잃게 될 것이다.

민가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검은 숲을 지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에 맞춰 모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사람의 목숨은 살아도 그들이 일군 터전은 엉망이 돼버린다.

“영주님! 시간이 없습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크게 소리치며 나를 재촉했다. 나 역시 이런 고민의 시간조차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고민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사람을 위한 쪽일 수밖에 없잖아.’

“민가!”

나는 결심을 굳히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검은 숲은 버려! 민가를 지킨다! 다들 이쪽의 강둑에 돌을 쌓아!”

“……알겠습니다!”

남작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나의 명령을 사방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다들 민가를 지켜!”

“검은 숲의 강둑은 버려!”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내 명령이 전해졌다.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던 사람들이 점점 민가 방향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확실히 작업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미 검은 숲의 강둑은 범람이 가까워졌지만, 민가 쪽의 강둑은 여유가 있었다.

“이브리아.”

그때. 돌을 들고 강둑을 향해 달려가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비에 푹 젖은 해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리? 와이번을 타고 간 거 아니었어요? 뭐해요! 어서 해리도 도와요!”

“이브리아. 너 또 내가 누군지 잊은 거 아냐?”

무표정하던 해리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내게 부탁하면 민가와 검은 숲, 양쪽 모두를 살릴 수 있어.”

“어떻게요?”

“나는 불의 마법사고, 물은 강한 불에 증발하니까?”

나는 해리가 내 몸의 물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던 것을 떠올렸다.

‘왜 이 생각을 진즉에 못 했을까!’

나는 해리의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그에게 소원을 빌었다.

“강이 범람하지 않도록 도와줘요, 해리.”

“접수했어, 내 계약자의 소원.”

해리가 제 손을 붙잡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입맞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담백한 행위였다. 해리의 붉은 눈이 오묘하게 번뜩였다.

“이 개는 주인님의 뜻대로 따르지요.”

해리가 웃으며 내 손을 놓은 뒤 강둑 위로 뛰어올랐다. 갑자기 등장한 해리를 보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그에게 어서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내려와!”

“지금 물이 넘친다고! 위험해!”

하지만 사람들의 경고에도 해리는 유유자적했다. 이 자리에서 태평한 건 나와 해리, 단 둘뿐이었다.

해리는 강둑 아래의 나를 바라보며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해리가 눈을 감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자, 세찬 비가 그의 얼굴을 씻어냈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유피테르가 만들어낸 후광이 강둑 위에 선 해리를 비추고 있었다.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서 멍하니 해리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악마인데. 은발의 청년은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성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홀리기 때문에 악마인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해리의 양손 끝에서 푸른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작 흑철목을 태우기 위한 불꽃과는 달랐다. 지금의 불꽃은 아주 순수한 푸른색이었다. 해리의 손에서 시작된 푸른 불꽃이 강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도 푸른 불꽃에 사그라들었다.

조금씩. 강물의 수위가 내려갔다.

조금씩. 쏟아지는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넋을 놓고 해리가 만들어 낸 놀라운 기적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리를 신이라 부르며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사람들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던 비가, 정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 강물이 사라졌어!”

누군가의 경악에 찬 외침처럼 강물이 완전히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리가, 이 공간을 해치는 물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도대체 저 사람은, 아니, 저 존재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심, 그 어딘가의 감정이 담긴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임무를 완수한 해리가 두 팔을 내리고 턱을 아래로 당겼다. 해리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두 눈 사이로 붉은색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군중 속의 누군가가 탄성처럼 해리의 오래전 이름을 내뱉었다.

“전설 속의 그 마법사?”

“저 사람이?”

그렇게 시작된 이름은 독한 감기처럼 빠르게 모두의 입에 옮겨붙었다.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다!”

“전설의 마법사가 우릴 구했어!”

모두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찬양하는 와중에도 새빨간 두 눈동자는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 선연한 붉은빛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기이한 불안함과 낯섦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도대체 뭐지?’

아무리 봐도 해리는 평소의 그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가슴이 불안한 건 그저 쓸데없는 직감인가? 하지만 나의 불안에 논리적인 근거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해리…….”

나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해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대로 그에게 달려갔다. 높은 강둑을 오르느라 손과 무릎에 생채기가 났지만, 아픔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나는 강둑 위에 올라서는 것에 성공했다. 해리의 시선은 줄곧 나를 따라 무심히 움직였다. 그는 내가 제 앞에 다가서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단 한마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말.’

나는 그제야 내 불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법을 쓰고, 이 기적을 만들어 낸 이후로 해리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벌써 제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느냐고 떠들어 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면 나는 해리를 타박하고, 해리는 내가 저를 무시한다며 떼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풍경은 일상을 벗어났다.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해리……?”

나는 불안함에 조심스럽게 해리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그제야 해리가 씩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 하나에 천 년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해리! 뭐예요. 이상해서 걱정했잖아요!”

“걱정은 무슨. 내가 누군지 잊었어?”

목소리는 평소보다 묵직했다. 하지만 말투는 평상시의 해리 그 자체였다.

“진짜 해리다!”

나는 평소와 똑같은 해리의 모습에 안심해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빗물도 태우고, 비구름도 태우고, 아마 강물도 상류까지 전부 메말랐을걸?”

“진짜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정말로 물이 전부 다 사라졌…….”

“쿨럭!”

하지만 나의 안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 품의 해리가 기침하기 시작했다. 소리만 들어도 보통 기침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해리……?”

나는 다시 불길해져서 몸을 조금 뒤로 뺐다. 그러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해리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옷이 검붉은 핏덩어리로 엉망이었다.

“해리!”

내가 놀라서 소리치자 해리가 내 옷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옷, 더러워졌어.”

그 말에 내 옷을 바라보니, 해리가 기침하며 내뱉은 피가 오른쪽 어깻죽지에 흥건했다.

“지금 옷 더러워진 게 문제에요? 피…… 피 토했잖아요, 해리!”

경악에 찬 내 목소리에 해리가 별거 아니라는 듯 피로 엉망이 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거는 힘을 급격하게 많이 써서…….”

해리의 말끝이 힘없이 늘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무엇인가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전, 그래, 충전할까요?”

나는 해리의 어깨를 붙잡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가져갔다. 하지만 서로의 입이 맞닿기 전에 해리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피 묻어.”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당장 충전하자고요!”

“멍청아. 충전은 기분 좋은 거지, 힘을 채우는 게 아니거든? 이건 그냥 좀 쉬고 나면…….”

다시금 해리의 말끝이 맥없이 늘어졌다. 이번에는 해리의 몸이 늘어진 말꼬리와 함께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해리!”

크게 비틀거린 해리의 몸이 그대로 나를 향해 기울었다. 나는 그대로 두 팔을 벌려 해리를 껴안았다. 내 품에 축 늘어진 그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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