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156)

* * *

미쳤어! 미쳤다고!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술에 취해서 진상을 부린 기억 같은 건 편리하게 사라지는 거 아니었어? 필름이 끊기고, 그런 건 없는 거야?’

쓸데없는 내 기억력. 모두 생생하게 기억났다. 어제의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리던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까지 전부 기억날 정도였다. 대화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보던 리던의 표정과 행동까지 모두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이거 무슨 미친 여자냐고 생각했을 거야…….’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술 취해서 남의 침대를 차지한 진상이었다.

‘어? 침대?’

그럼 지금 이거 리던의 침대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뛰쳐 내려왔다. 하지만 내려와서 확인한 침대는 내 것이 확실했다.

“뭐지…….?”

침대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리자 뒤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긴, 뭐겠어.”

곧장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해리가 팔짱을 낀 채 싸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해리?”

“오, 어제 자기 방도 못 알아보시던 분이 웬일이야? 나를 다 알아봐 주시고?”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삐딱한 해리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지끈거려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해리가 손을 뻗어 무심하게 휘청거리는 내 팔을 붙잡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라파쉬가 성인이 됐으면 음주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요.”

내 말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브리아, 너 걔랑 놀지 마.”

“7살이에요? 무슨 친구랑 놀지 말래.”

“너한테 나쁜 걸 가르치니까 그렇지.”

“같이 한 거지, 라파쉬가 가르친 거 아니에요.”

나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해리의 손을 떼어 내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으, 머리야…….”

소파에 힘없이 늘어진 내 이마에 해리가 손을 얹었다. 내 머리가 뜨거운 건지, 해리의 손이 서늘한 건지. 적당한 온도 차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고개를 조금 틀어 해리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해리의 손이 후다닥 멀어졌다.

“너, 너, 너!”

“내가 뭘요?”

“너 아직도 술 안 깼어?”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지금은 완전히 깼어요.”

“그럼 방금 그건 뭔데!”

“뭐요? 설마 손에 얼굴 댄 거, 그거 말하는 거예요?”

나는 허공에서 어색하게 굳어 있는 해리의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차가워서 기분 좋단 말이에요. 조금만 빌려줘요. 어차피 내 거잖아요.”

내 말에 해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굳어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다시 내게 돌아온 해리의 손을 이마에 대고 기분 좋게 늘어졌다.

“근데 어제는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어제.”

해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왕자가 여기로 찾아왔더라. 엠마 말고 다른 하녀는 없냐고 하길래, 왜냐고 물었더니 네가 그러고 있다잖아.”

“그래서 데려온 거예요?”

“공주님처럼 곱게 모셔왔지.”

“내가 해리한테는 술주정 안 했어요?”

“술주정은 무슨. 그 자식 침대에서 잘만 자던데.”

하긴. 침대에 눕자마자 아주 깊게 잠들긴 했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헛기침하다 해리의 말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찾아냈다.

“그런데 해리, 어제 내 방에 있었어요? 그 늦은 시간에?”

“그랬는데?”

“이제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왜? 난 네 소유물 중에 하나잖아. 저 책, 저 옷, 저 구두처럼.”

해리가 내 방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네 방에 있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개로 있을 때나 그랬죠. 이젠 서리기사단의 해리 경이 됐으니까 각자의 방에서 자는 거로 합시다.”

해리가 개일 때에는 온종일 내 곁에 붙어 있어도 괜찮았다. 방을 같이 쓰는 것도 문제없었다. 원래 애완견과는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사람 해리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해리가 서리기사단의 해리 경으로 변한 뒤로는 잠을 제대로 그에게 배정된 방에서 자도록 했다.

“어젯밤에 내 방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내 소유물씨?”

“저 물건들이 여기 있는 이유가 있어? 네 거니까, 그냥 있는 거잖아. 이를테면 나도 그런 거지.”

“하지만 해리는 물건이 아닌데요. 내 거는 맞지만.”

“내가 물건이랑 다를 게 뭔데? 난 네가 사용할 때만 할 일이 생기잖아.”

“해리는 하고 싶은 거 없어요? 나와 관련된 거 말고요.”

“그런 게 왜 필요한데? 난 계약자에 관한 일만 하면 돼.”

해리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난 해리에게 내가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왜? 부담스러워서?”

“아뇨. 해리가 더 많은 걸 해봤으면 좋겠어서요.”

해리는 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해리. 처음 인간계로 넘어왔을 땐 뭘 하고 살았어요?”

“전쟁을 했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고.”

“그게 계약자가 원한 거였으니까?”

해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뭘 하죠?”

“어?”

“난 해리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잖아요. 처음에 불을 붙여 달라고는 했지만, 그건 오래전의 일이고요.”

잠시 고민하던 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하지 말라는 건 많은데?”

“네. 그런데, 그것만 빼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잖아요. 나 때문에 하는 일 말고, 그냥 해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돼요.”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해리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움찔거렸지만, 결국 어떤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내 해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네. 원하는 걸 해요. 사람 죽이는 건, 음, 내 기준에서 조금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그런 건 빼고요. 나머지는 정말 어떤 거든 괜찮아요. 그게 내 소원이에요.”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하면 어쩌려고?”

“안 그럴 거잖아요?”

해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왜?”

그의 얼굴이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내가 아는 해리는 안 그럴 것 같아서요.”

해리는 나에게 제 영혼의 조각을 나눠줬다. 내가 죽으면, 그 힘은 그에게 돌아가지 않고 소멸한다. 해리가 이기적이고 잔인하기만 한 악마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본 해리는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잘 생각해보면 해리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계약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해리가 하고 싶은 거요. 마계에서 하던 일을 여기서도 해도 되고…….”

마계에서의 해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 해리에게도 해리만의 삶이 있었겠지.’

사소하고 평범한 것. 나는 해리가 여기서도 그렇게 지내기를 바랐다.

“아무튼 난, 계약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해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와 계약해서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랑 친구여서 잠깐 인간계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친구. 친구라…….”

해리가 눈을 내리깔고 친구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에 잠겼다. 깊이 가라앉은 그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해리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노예 왕자들 덕분에 일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이 정도의 시간은 쓸 수 있었다. 다행히 해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싫어.”

희미한 목소리와 함께 내리깔았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응. 나는 싫어.”

해리의 눈이 완전히 나를 향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미약하나마 확신을 담고 있었다.

“나랑 친구 하기 싫다고요?”

“그래. 나 너랑 친구 같은 거 안 해.”

“도대체 왜요? 나처럼 좋은 친구가 어디 있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해주는 좋은 친구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된다고.

‘사람이 신경 써서 말해줬더니 그걸 거부해?’

심통이 난 나를 보며 해리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해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런 건 친구끼리 절대 하는 게 아니랬으니까.”

“이런 게 뭔데요? 가까이 다가오는 거?”

“아니. 이런 건…….”

해리가 말끝을 흐리며 씩 웃더니, 내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이런 거야.”

* * *

나는 오후 무렵 노예 왕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서재를 찾아갔다. 손에는 그들에게 줄 따끈따끈한 새 서류가 들린 채였다.

“안녕하세요, 왕자님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내 손에 들린 서류의 양을 확인했다. 재빨리 눈대중으로 서류의 수를 확인한 카시안이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 일이죠? 서류가 이렇게 적다니.”

카시안의 말대로였다. 내 손에 들린 서류는 지금까지 내가 그들에게 맡긴 양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였다. 그러니까, 수로 따지자면 말이다.

“지금까지 계속 민원서류를 처리하셨으니, 이 영지에 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는 잘 아시겠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 뭘까요?”

나는 먼저 카시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고민도 없이 곧장 답을 제시했다.

“당연히 제방이겠죠.”

내가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의미로 카시안을 보자, 그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렐은 1년에 2번이나 우기가 있습니다.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져서 강우량이 엄청나죠. 그런데, 이런 지역에 작은 강줄기가 흐릅니다.”

검은 숲과 마을을 구분 짓는 강이었다.

“그쪽에 제대로 된 제방이 없죠. 그래서 우기만 되면 그게 범람하고요. 강이 범람하면 검은 숲은 늪처럼 변하고, 마을에는 홍수가 납니다.”

카시안이 지금까지 제가 처리한 서류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봄 우기에 생긴 피해가 아직도 복구가 안 됐더군요. 당연합니다. 봄 우기의 피해가 복구되기 전에 가을 우기가 오고, 가을 우기의 피해가 복구되기 전에 봄 우기가 오니까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렇군요. 1왕자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나 역시 강의 범람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생각한 해결책은 다르군.”

리던의 말에 카시안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제방 말고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형님?”

“조금 더 넓게 볼까.”

리던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지도 앞에 섰다.

“이게 에렐에 흐르는 강줄기지. 우린 하류에 있어.”

그의 손가락이 검은 숲과 마을 사이의 강을 향했다. 잠시 멈춰있던 손은 금세 강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걸 타고 위로 올라가면 상류가 나와. 벨모른 백작령.”

목적지를 찾은 리던의 손이 가볍게 지도를 두드렸다.

“우기는 딱히 에렐만의 문제가 아니더군. 이 일대 모든 영지의 문제였어. 하지만 다른 영지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지. 왜?”

나는 웃으며 리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들은 상류와 중류에 있으니까.”

리던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인 셈이지. 상류에서 중류, 중류에서 하류. 하류인 에렐은 폭탄 돌릴 곳이 없으니, 그대로 펑.”

리던이 카시안을 쳐다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상류에 있어.”

“그걸 누가 몰라서 제방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까?”

카시안이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우기는 지역적 문제고, 상류와 중류에 보(洑)를 건설하면 제방을 짓지 않고도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정책을 이야기하자는 거 아닙니까? 다른 영지에다 보를 지으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왜 꼭 명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리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협력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게 쉬운 일입니까? 각 영지는 독립적이어서 영지 간 협력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시도도 않겠다는 건가?”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서로의 의견이 너무 명확해서 누군가 굽힐 상황이 아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나 같은 중재자지.’

“둘 다 하면 어때요?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나는 두 사람의 의견교환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간을 틈타 제3의 의견을 제시했다.

“네?”

“뭐?”

두 사람이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벨모른 백작령과 손잡고 보를 만드는 것과 우리 스스로 제방을 세워 방비하는 것.”

두 사람이 뛰어난 덕분에 내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대책을 실현해주세요. 이게 바로 두 번째 테스트입니다. 이제 여름의 끝물이니, 곧 가을의 우기가 시작되거든요.”

“예산은 얼마나 돼?”

리던이 계산 빠르게 물었다.

“예산도 능력껏 편성 받으세요. 재정은 인세티아 남작이 담당하고 있으니, 그를 설득시킨다면 충분한 예산을 얻을 수 있겠죠.”

쉽게 말했지만, 인세티아 남작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어쭙잖은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도 왕위를 위해 힘내세요, 왕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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