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156)

* * *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카시안이 눈앞에 쌓인 서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 서류가 전부…….”

리던도 말문이 막혔는지 손가락으로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나는 그 두 사람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분께서 해결하셔야 할 서류에요. 누가 왕에 더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죠.”

그렇다. 이건 순수하게 누가 더 왕에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한 절차였다. 절대로, 내가 일을 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게 아니었다.

“이건 3개월 동안 처리하는 양이겠죠?”

카시안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리던도 그게 아주 궁금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요. 전부 닷새 안에 보셔야 돼요.”

“뭐? 닷새?”

리던이 경악에 차서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놀라면 어떡하나.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니라…….”

나는 슬쩍 웃으며 서재 안쪽에 달린 작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도 지금 바깥에 쌓인 것만큼의 엄청난 서류 더미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것까지 전부 해결하셔야 해요.”

“무슨 서류가 이렇게…….”

리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에렐은 이제 막 커지고 있는 영지라서요. 개발하고 있는 곳도 많고, 진행 중인 사업도 많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원도 많죠.”

보고서, 기획안, 품의서, 결의서……. 빠르게 발전 중인 에렐에는 온갖 문서란 문서가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졌다.

‘그걸 여태까지 나와 남작 둘이서 해결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늦었다. 우선순위를 개발 쪽에 두고 사업 진행에 집중하다 보니, 특히 민원 쪽의 업무가 많이 밀려 있었다. 두 왕자가 해결할 문서들은 모두 그쪽의 일이었다.

“이게 서류만 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민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나가서 이야기를 듣거나, 추가적인 자료 조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나와 남작이 제일 피곤해하는 업무 1순위였다.

“하지만 왕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왕자님들에게는 좋은 업무가 될 거예요.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그리고 두 사람 덕분에 나와 인세티아 남작은 여유를 즐길 수 있겠지.

“그럼 힘내세요, 왕자님들. 왕위를 위해서 파이팅!”

* * *

“리쉬! 나 돌아왔어요!”

나는 반갑게 인사하며 라파쉬의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왕도에서 지내는 동안 작업장에 들르지 못했으니, 2개월여 만의 방문인 셈이었다.

“이브리아…….”

반갑게 인사하는 나와 달리 라파쉬는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늘 기운찬 라파쉬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기, 우리 때문에 많이 곤란해졌다면서요. 아버지가 눈치 없이 나서는 바람에…….”

라파쉬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누안이 파티장에서 성검의 존재를 밝혀버린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애초에 내가 거기에 유피테르를 가져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놈의 후광효과가 뭐라고…….’

“게다가 성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들켜서, 오히려 잘 됐어요!”

“오히려 잘 됐다뇨?”

라파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덕분에 훌륭한 일꾼을 얻었거든요. 그것도 두 명이나.”

“……설마 왕자님들이요?”

“네. 상당한 고급인력이라니까요.”

역시나 원작의 주요인물답게 두 사람은 아주 일을 잘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력이라, 닷새 안에 처리하라고 준 그 많은 서류를 나흘 만에 모두 해결했을 정도였다.

‘사실 닷새 안에 처리하기에 조금 버거운 양으로 준 거였는데.’

두 사람을 한 공간에 두고 일을 시켰더니, 서로 경쟁이 붙어서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 안에 일을 마무리해냈다.

하지만 내가 또 다시 그만큼의 서류를 주고,

-역시 닷새는 너무 길었죠? 같은 양의 서류니까 이번에는 나흘 안에 부탁할게요!

라고 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웃긴 표정이었지.’

“아무튼 오히려 일이 잘 풀렸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고, 누안에게 꼭 말해주세요.”

“그 말을 들으면 한결 마음을 놓겠네요.”

라파쉬도 안심했다는 듯 그제야 평소다운 활기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워프 마을에는 오히려 제가 신세를 많이 졌는걸요. 이렇게 라파쉬를 보내준 것도 그렇고, 우리 브로치도…….”

브로치 이야기를 하니 확인할 것이 하나 떠올랐다. 아치볼드의 브로치 홍보가 대성공을 거둔 이후 쏟아진 주문량은 라파쉬 혼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그러자 라파쉬가 먼저 드워프 마을에 외주 작업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라파쉬에게 드워프 마을의 도움을 부탁하고 싶었던 나는 당장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라파쉬가 부탁한 덕분인지, 드워프들은 쉽게 에렐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의뢰 내용은 브로치에 장착할 가문 문장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드워프 마을에서 틀을 제작해 에렐로 보내면, 이곳에서 흑철목 수액을 부어 가문 문장 형태의 청요석을 제작하는 순서였다.

그런데 드워프 마을 쪽에서 제시한 틀 비용이 너무 저렴했다. 장인의 실력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틀 가격이 그렇게 저렴하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틀 만드는 비용이 너무 저렴해요!”

내 외침에 라파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렴한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럼요. 일했으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요.”

“드워프들은 물욕이 없어요. 어차피 드워프 마을에서만 살고, 작업이 즐거우면 그만이죠. 그러니 우리에겐 그 정도도 충분히 많은 금액이에요.”

“하지만…….”

“틀 가격이 저렴하면 브로치에서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잖아요.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이브리아에게 도움이 되는 게 더 좋다고요.”

“리쉬…….”

“마음이 불편하다면 성검 문제로 이브리아를 곤란하게 한 값이라고 쳐도 되고요.”

“드워프들은 전부 천사예요!”

나는 감격에 차서 라파쉬를 끌어안았다.

“나도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리쉬가 행복한 게 더 좋아요.”

“그럼 문제없네요.”

라파쉬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 이브리아.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요?”

“시간이야 있죠.”

‘잡다한 일을 전부 다 노예 왕자들에게 떠넘겨서.’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음, 네. 일이 있죠. 아주 좋은 일이요.”

“좋은 일?”

라파쉬가 씩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몸을 낮춰 라파쉬와 높이를 맞추자, 그녀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성인이 됐으면, 그걸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 * *

“정말 괜찮은 걸까요?”

엠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영주님이 우리의 공범이잖아요. 그 영주님은 무려 성검의 주인이시니까, 누구도 뭐라고 못 해요.”

라파쉬는 작은 꼬챙이로 자물쇠를 따는 데 집중하면서도 너스레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범이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두 분께 끌려왔을 뿐이라고요.”

“그래요. 그렇게 끌려와서, 결과적으로는 공범이 됐군요.”

“그러니까 저는 공범이…….”

“아, 열렸다!”

철컥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열리자 엠마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으로 변했다.

“저는 지금이라도 돌아갈래요.”

“엠마의 마음은 알겠으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죠. 계속 서 있다간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들켜요.”

“라파쉬 님. 제 마음을 안다면 그냥 보내주셔야죠!”

엠마의 항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파쉬는 강한 팔 힘을 한껏 발휘해 엠마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저는 결백해요…….”

엠마가 질질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물론 들어줄 사람이 없는 허공의 메아리였다. 나는 복도가 고요하다는 걸 확인하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소문대로였군요. 남작의 보물창고는 훌륭해요.”

내부를 충분히 둘러 본 라파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외쳤다.

“자. 이제 남작의 보물을 약탈합시다!”

그랬다. 우리는 지금 인세티아 남작의 보물창고를 터는 중이었다. 남작의 보물창고를 가득 채운 것은 그가 각지에서 수집한 술이었다.

“시작은 역시 이게 좋겠어요. 라노페시 34년산! 산뜻한 맛이 일품이거든요.”

우리 중 술에 가장 해박한 라파쉬가 선두가 되어 술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오, 이것도 있었네요. 조앤 115. 달콤한 맛에 속아서 먹다가는 금세 취하죠.”

술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라파쉬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하지만, 성년식을 잣 치른 분께는 이게 가장 좋죠. 라펠리체 3세.”

라파쉬가 병을 살짝 흔들며 웃었다.

“왜 그게 성년식을 갓 치른 사람에게 좋은데요?”

“술로 끝장을 볼 수 있거든요. 자기 주사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이걸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사람은 못 봤답니다.”

“앞으로의 음주 생활에 큰 도움이 되겠네요. 그걸로 하죠.”

“훌륭한 선택이에요.”

라파쉬가 웃으며 라펠리체를 개봉했다. 뚜껑만 열었을 뿐인데도 벌써 얼근하게 취할 것 같은 독한 향이 퍼졌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술인 건 확실하죠?”

엠마가 두려움에 찬 눈으로 라파쉬에게 물었다. 라파쉬는 대답 대신 라펠리체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때요? 죽진 않죠?”

다음 타자는 엠마였다.

“자, 엠마. 이제는 완벽한 공범이 될 시간이에요.”

잠시 고민하던 엠마가 라파쉬가 내민 라펠리체를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으엑.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야.”

입안에 술이 들어가자마자 엠마가 헛구역질하며 질색했다.

라파쉬는 엠마의 엄살이 심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드디어 주인공 차례네요.”

라파쉬에 엠마의 손에서 라펠리체를 가져와 나에게 건넸다. 짙은 갈색의 술병이 가까워지자 그렇지 않아도 독한 술 향기가 더 진해졌다.

‘이 몸으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야.’

진짜 이브리아는 성인이 되기 전에 자살하기 때문에 원작에서도 그녀가 술을 마시는 에피소드는 없었다.

‘나도 이 몸의 주량을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지.’

이브리아가 되기 전의 나는 술이 꽤 강했다. 모두가 취했을 때도 나 혼자만 살아남아 일행을 집에 돌려보내는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술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런 내 영혼을 담았으니 이브리아의 몸도 술에 강하지 않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라펠리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하, 한 번에?”

끊임없이 내 목을 넘어가는 라펠리체를 보며 엠마는 물론이고 라파쉬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기어이 라펠리체 한 병을 모두 비워낸 나는 빈 병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첫 병은 원래 원샷이에요.”

“이브리아. 그거, 첫 병이 아니라 첫 잔이잖아요.”

“어쨌든 처음인 건 똑같잖아요, 라파쉬.”

“아뇨. 의미가 아주 다르거든요.”

* * *

부어라, 마셔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닥을 뒹구는 빈 병이 많아진 것으로 우리가 여기에 오래 있었나보다 짐작을 할 뿐이었다.

엠마는 이미 오래전에 술에 취해 바닥에 뻗어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누가 봐도 술을 진탕 마신 꼴이었다. 라파쉬도 술에 절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깨끗하게 비워버린 술병들을 끌어안고 술이 사라졌다며 엉엉 울었다.

“내 술, 우리 착한 술이, 도대체 어디 갔니…….”

그에 비해 나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정신이 멀쩡했다.

‘이브리아도 술에 강한가 봐.’

나는 술에 취해 널브러진 두 사람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들이 여기 있으니 나 혼자 떠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상하게 방으로 돌아가고 싶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 취하지 않았다. 그저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렬한 본능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남작의 보물창고를 빠져나와 무작정 내 방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내 방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낯선 길만 계속 나타났다.

한참이나 낯선 곳을 배회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눈에 익은 복도로 접어들었다. 깊은 밤이라 모두 불이 꺼진 와중에 한곳에서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

내 방은 밝다. 밝은 건 빛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저 빛이 나오는 곳이 내 방이다. 완벽한 논리였다. 나는 확신에 차서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눈에 익지 않은 가구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누가 내 허락도 안 받고 가구를 바꿨구나.

‘이거 정말 내 취향 아닌데.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 너무 깊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오늘은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에 딸린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침실의 가구도 전부 처음 보는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이것도 정말 내 취향 아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이것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밤이 너무 깊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오늘은 여기서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침실에는 가구 말고도 낯선 게 하나 더 있었다.

‘웬 남자?’

어떤 남자가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감히 내 방에 침입한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침입자가 내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까치발을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바닥이 폭신한 카펫이라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게다가 침입자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잔뜩 집중해, 펜을 놀리는 팔 외에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거의 다 됐다.’

내가 아무런 문제 없이 침입자의 등 바로 뒤까지 다가섰을 때. 무엇인가를 느낀 것인지 침입자의 등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그가 재빨리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침입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레이디 오베론?”

침입자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나의 노예 왕자 1호, 리던이었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지?”

내 방에 침입한 건 자기면서. 노예 왕자 1호가 도리어 내게 화를 냈다.

“게다가 이 냄새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몸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댔다.

“당신, 술 마셨나?”

“술…….”

말을 하니 입 밖으로 더운 숨이 훅 빠져나갔다.

“……술 마셨군.”

리던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나와 거리를 벌리고 문 바깥을 힐끗댔다.

“누구랑 마셨지?”

“엠마랑, 라파쉬랑…….”

“술이 어디서 나서?”

“남작의 보물창고, 술 많아서…….”

“그거, 남작은 허락한 일인가?”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약탈자야. 엠마도. 라파쉬도.”

“……훔쳤다는 말이군.”

깊게 한숨을 내쉰 리던이 머뭇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내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았다.

“응접실에 앉아 있어. 네 하녀를, 아니, 그 하녀도 같이 마셨다고 했으니…… 아무튼 사람을 불러오겠어.”

리던이 붙잡은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여기가 내 방인데, 왜 내가 밖으로 나가야 한단 말인가.

“나 잘 거야.”

“뭐?”

“침대, 졸려, 잘 거야.”

나는 그대로 침대를 향해 직행했다. 커다란 침대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포근해 보였다. 지금 당장 저곳에 뛰어들어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뭐? 절대 안 돼!”

하지만 리던이 필사적으로 내 앞길을 막아섰다. 내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을, 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을 가로막았다.

“졸리면 응접실 소파에서 자고 있어. 침실은, 절대 안 돼.”

편한 침대를 두고 내가 왜 불편한 소파에서 잠을 자야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잔뜩 담아 리던을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봐도 안 돼.”

그렇게 말했던 리던이 곧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것도 테스트 중의 하나인가? 참을성이나 도덕성을 테스트하는 그런…….”

“테스트?”

갑자기 무슨 테스트?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멀뚱멀뚱 눈을 껌뻑이자 리던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얼굴만큼이나 붉어진 목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여기에서 잘 거야?”

“응. 침대…….”

“……그럼 여기서 절대 나오지 마. 이상한 오해 받기 싫으면.”

“침입자면서.”

“침입자? 내가 무슨 침입자라는…….”

거기까지 말한 리던이 복잡한 얼굴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됐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무슨.”

리던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를 빤히 쳐다보고 방을 나섰다.

뭔가를 특별히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침입자가 물러났다. 내가 훌륭하게 침입자를 쫓아낸 것이다.

좋았어. 나는 만족스럽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을 감자마자 급격히 몸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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