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156)

* * *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

열여덟 성인이 되는 날, 성검의 주인으로 각성했다!

그 사람은 바로 오베론 가의 공녀 이브리아다!

소식은 일파만파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 신성한 빛으로 축복을 내려줬다는 생생한 증언에 사람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이브리아의 초대장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약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놓친 역사의 순간이 안타까워 뒤늦게 눈물을 흘렸다.

왕국을 뒤흔든 엄청난 사건에 왕세자의 약혼식 따위는 순식간에 잊혔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했다. 성검의 주인이 나타나셨죠! 왕세자의 약혼식이요?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 사실이 가장 뼈아픈 사람은 역시 약혼의 당사자인 카시안과 캐서린이었다. 엄청난 환호와 관심을 받아야 할 시기인데. 그 모든 것을 갑자기 나타난 성검의 주인, 이브리아가 독차지했다.

카시안은 소파에 늘어져 머릿속을 떠도는 소문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커튼으로 모든 창문을 가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은 매우 어두웠다.

‘왜 일이…….’

약혼식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억지로 한 약혼은 파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미래를 약속했다.

캐서린은 좋은 여자였다.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고, 늘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왕비는 그녀의 부족한 집안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녀가 마력치 9의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태도를 바꿨다.

-카시안. 위대한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해. 사람은 함께 어울리는 자의 급에 따라 평가되거든. 성자와 어울리면 성자가 되고, 악마와 어울리면 악마가 되는 거야.

카시안은 성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성자가 되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모두 선한 자가 왕이 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게 없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선함. 그것을 캐서린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카시안은 캐서린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브리아 오베론?’

이기적이고, 어둡고, 능력도 없었다. 가진 거라고는 집안의 배경과 부유함뿐이었다. 카시안은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다. 이브리아는 위대한 왕이 되어야 할 사람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적당히 이용하기 좋은 여자.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성검의 주인이라니? 모든 이가 그 여자를 찬양하다니? 카시안은 하루아침에 찾아온 변화를 믿을 수 없었다.

“시안.”

어두운 방 안에 빛과 함께 캐서린이 들어섰다.

“린.”

카시안에게 캐서린은 언제나 빛이었다. 그 빛이 되기 위해서 그녀의 곁에 머무른 것인데.

‘다른 사람이, 그 빛이었나? 내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캐서린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카시안에게 다가왔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모두가 우리 약혼을 축하해줬잖아요.”

‘하지만 이젠 모두가 그걸 잊었지.’

카시안은 쓴웃음과 함께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성검의 주인인 사람이 왕위를 잇는 것이 왕국의 법이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캐서린이 따뜻한 손으로 카시안의 뺨을 쓸어내렸다.

“폐하께서도 따로 발표하신 건 없어요. 게다가 이브리아 양이 왕이라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요.

캐서린이 해맑게 웃으며 카시안을 위로했다. 그 말에 카시안도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말이 안 되지. 그 이브리아 오베론이 왕이라니.’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왕도 전체가 이브리아를 성검의 주인이라며 찬양하고 있지만, 여론은 금세 바뀌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날 아직 좋아하잖아. 성검을 내게 양보하라고 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이브리아는 언제나 그랬다. 카시안이 갖고 싶은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해서 자신이 먼저 확보한 뒤, 그것을 갖고 싶으면 애정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요구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입을 맞춰주세요.

-이브리아. 그건 곤란합니다. 처음에는 약혼만 해 주면 된다고 했잖습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입을 맞춰주세요. 껴안고, 날 사랑한다고 말해요. 거짓말이라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도 좋아요.

-이브리아. 난 그렇게는 못 합니다.

-내 말대로 해 준다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마정석 광산 개발의 투자자가 되어 달라고 할게요. 그건 모두 카시안의 공으로 돌아가겠죠. 왕위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어요.

무서울 정도로 영악한 여자였다. 카시안은 자신이 아직도 그 영악한 여자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정석 광산 개발을 중간에 가로챈 것도, 성검을 차지해 왕권에 다가서는 것도.

‘모두 내게 애정을 요구하려는 수작이야.’

에렐에서 만난 이브리아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후의 행보를 보면 여전히 제게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요, 카시안. 전부 잘 될 거예요. 당신의 여신이 여기 있잖아요. 날 믿어요.”

“…그래요, 내 여신님.”

카시안은 자신을 위로하는 캐서린을 꼭 껴안았다. 그럼에도 불안이 떠나지 않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평소와 같은 키스였다. 캐서린은 수줍게 웃었고, 카시안은 그런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는 순간에도 그 여자의 얼굴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 여자 때문에 제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카시안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 * *

파티가 막을 내리고 손님들은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생일 파티의 마지막을 기절-사실은 그런 척을 했을 뿐이지만-로 장식한 나는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날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청이 쇄도했으나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작이 보낸 의사도 그냥 돌려보냈는걸.’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해리와 엠마,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해리와는 대책을 논의해야 하고, 엠마가 없으면 밥을 못 먹으니까.’

무척이나 간단한 이유였다.

“에프론 제레인트 그 사람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속에서 화가 끓어올라 죽을 것 같았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목욕하다가도. 문득문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는 검을 뽑은 적도 없으면서, 무슨 성검을 뽑으면 자기의 재림이래? 태양왕? 웃기시고 있네! 정말.”

며칠째 계속 같은 불만을 반복하며 씩씩대는 나를 두고 해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위로를 해주더니, 화를 낼 때마다 매번 같은 이야기만 쏟아내니 그도 완전히 질려버린 것 같았다.

“너, 그 말 벌써 100번은 한 것 같다.”

“100번 채우려면 아직 9번 남았어요.”

“꼭 100번을 채워야겠어?”

“내 분노가 사라지려면 100번도 모자라요. 1000번 하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딱 100번 채울 때까지만 참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종이 위에 작대기 하나를 더 그었다. 이미 종이 위에 90개의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으니, 91번째 작대기였다.

“아가씨!”

내가 막 91번째 작대기를 긋고 있을 때, 엠마가 구르다시피 내 방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또 누가 날 만나고 싶대?”

들어오는 족족 거부하고 있는데도 제발 단 한 번만, 아니, 단 1분 만이라도 만나 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엠마. 제발 만나 달라는 사람이 오면 어떻게 말하라고 했지?”

“성검의 주인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누구도 만날 수가 없다고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이번에도 그렇게 말해줘.”

“하지만 이번에는 어, 엄청난 분이!”

“그래, 그래. 이 왕도에 엄청나지 않은 분이 어디 있겠어.”

나는 이번 일로 왕도에 유명하고, 대단하고, 엄청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깨달았다. 내게 만남을 청하는 사람 중에 유명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고, 엄청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전부 그들 자신의 주장이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 엄청난 분이에요!”

하지만 엠마가 이렇게 펄쩍 뛰는 걸 보면, 이번에는 정말로 엄청난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누군데? 정말로 엄청나다는 그분.”

“국왕 폐하셔요.”

“국왕 폐하?”

“예. 국왕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당장 왕궁으로 오시라고요.”

끝판왕이다. 끝판왕이 나타났다!

‘아직 그렇다 할 대책도 없는데.’

며칠 동안 해리와 유피테르를 붙잡고 대책을 고심해봤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다 부수고 끝내자니까? 성검이랑 이 나라 전부 부순 다음에 다른 나라로 튀면 되잖아.

이건 해리의 조언이었고,

-주인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신 거 왕이 되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건 유피테르의 조언이었다.

‘둘 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엠마에게 물었다.

“엠마. 그건 이미 시도해봤지? 성검의 주인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그거.”

“예. 거짓말인 걸 아니까 건강 핑계 댈 생각은 하지 말라십니다.”

“만약에 내가 안 가겠다고 하면….”

“감히 국왕의 말을 거역했으니 반역죄로 다스릴 거랍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현실도피도 이 정도면 오래 했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엠마. 간단하게 준비를 마치고 나가겠다고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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