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왕의 자격
엘의 팔찌에서 나온 이상 반응으로 연회장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있었다. 흥미와 걱정이 뒤섞인 눈빛.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방금 그건 뭐였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우선 손부터 놓고 이야기할까요?”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계속 엘의 팔찌가 음산한 소리로 울어댈 테니까. 엘은 맞잡은 손에서 힘을 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와 손을 놓자 팔찌는 다시 조용해졌다.
“무슨 팔찌인가요?”
“검을 가지고 계십니까?”
서로의 질문이 허공에서 섞였다. 나는 엘이 먼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임무에서는 누구보다 완고한 엘 로이츠였다. 그는 결코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네. 검은 가지고 있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가 가진 패를 먼저 꺼냈다.
유피테르는 팔찌와 자신이 제대로 공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엘의 팔찌는 성검을 알아보는 장치가 아니라, 단순히 마법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검에 반응하는 장치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당당하게 나가는 게 상책이지.’
“호신용 단검을 지니고 다니거든요. 여기저기 워낙 적이 많아서.”
나는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태연함을 가장했다. 물론 속으로는 거리낄 것이 너무 많아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쿵 뛰고 있었다.
‘아오, 그놈의 후광 효과가 뭐라고. 그냥 비밀 서랍에 두고 올걸.’
엘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면 절대로 성검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광 효과가 엄청나긴 했어. 다들 여신의 강림을 지켜보는 듯한 얼굴이었지.’
하지만 그 대가가 내가 성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키는 거라면, 역시 후광 효과를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왕립기사단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요청입니다.”
엘이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물었다.
“물론이죠.”
나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좀 그래요. 보관하고 있는 위치가 여기거든요.”
나는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엘에게 물었다.
“급하신 거라면, 여기서 바로 보여드릴까요?”
내가 당장이라도 치마를 뒤집을 기세로 손을 뻗자, 엘이 서둘러 손을 들어 나를 저지했다.
“아닙니다. 테라스에서 해제하고 나오십시오. 커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죠.”
나는 천천히 커튼이 내려가 있는 테라스 안으로 들어갔다. 해리가 있는 그곳이었다.
나는 커튼 안으로 완전히 몸을 넣자마자 지금까지의 유유자적한 태도를 던져 버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해리!”
거짓말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것이 고작 10분 전이었다. 해리는 단 10분 만에 안면몰수하고 제게 매달리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네가 여기서 어떻게 나갔는지 기억하지?”
“그럼요.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서둘러 치마를 들어 올려 허벅지에 장착한 유피테르를 해제했다. 예전에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해리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지 그의 턱이 평소보다 더 도드라져 보였다. 무사히 유피테르를 해제하고 치마까지 정돈한 뒤에야 해리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어쩌죠? 엘한테 마법검이 있다는 걸 들켰어요.”
“어쩌다가?”
“팔찌를 차고 있더라고요. 아마 마법의 기운이 담긴 검을 감지하는 것 같아요. 엄청 음산하게 울면서 빛을 냈어요.”
“성검은 뭐래?”
“자기랑 공명하는 장치는 아닌 것 같다고, 단순히 마법검을 알아보는 것 같대요.”
“흐음.”
해리가 턱을 매만지며 성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이걸 없애버리는 건 어때? 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산산조각낼 수 있을 것 같아.”
살벌한 해리의 말에 유피테르가 다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인님. 저 악마 놈의 유혹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우선 그 기사에게 절 보여주시죠. 제가 최대한 얌전히 잠들어 있겠습니다.]
“보여줘서 문제가 생기면 어떡할 건데? 그때는 이미 늦어. 성검 가지고 있으면 왕이 된다며. 너 그거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소멸시켜버리자.”
[악마의 문제 해결 방법은 늘 이렇게 무식합니까? 뭐든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그러다가는 곁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너 때문에 곤란해졌는데 이게 어디서 훈계야? 내가 계약자 때문에 참고 있다고 너까지 날 우습게 봐?”
[저야말로 당신을 엄청나게 참아주고 있습니다. 제 정화기능을 그 쪽에게 쓰면 몸이 남아나질 않을걸요?]
“이게 정말!”
이 다급한 와중에, 한 마리의 악마와 한 자루의 검이 치고 막고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만! 둘 다 그만!”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소리치며 한 마리의 악마와 한 자루의 검을 말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싸우는 건 위기를 극복한 뒤에 합시다, 우리.”
“누가 우리야? 저 성검이랑 내가?”
[누가 우리입니까? 저 악마 놈과 제가요?]
양쪽에서 동시에 불만이 튀어나왔다.
“정말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커튼 밖을 힐끗거렸다. 입구에서 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만 나가야 돼요. 우선 엘한테 유피테르 보여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반응하지 말고 잠들어 있어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저 죽은 척 잘합니다, 주인님.]
“좋아요.”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해리에게도 중요한 지령을 내렸다.
“해리.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벌어지면?”
“나 그냥 기절한 척할 거니까, 요란하게 뛰쳐나와서 나 데리고 튀어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재빨리 튀어야 해요. 알았죠?”
“응. 알았어.”
나의 비장함이 전염된 것인지 해리도 나를 따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계획은 모두 정리됐다. 나는 두어 번 심호흡하고 다시 태연한 척 가장한 얼굴로 커튼을 걷었다.
역시나 엘이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이 검이요.”
내가 유피테르를 내밀자 엘이 조심스럽게 단검을 받아 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피테르를 꼼꼼하게 살폈다.
“무슨 마법이 걸린 검입니까?”
“빛을 내뿜는 능력이요.”
“…그런 쓸모없는 기능을 이렇게 좋은 검에 각인합니까?”
엘이 유피테르의 유려한 검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피테르는 드워프들이 만들어 낸 걸작답게 대충 살피기만 해도 훌륭한 검이었다.
“생각보단 꽤 쓸모 있는 기능이에요. 불의의 공격을 받았을 때 강한 빛을 내뿜으면 상대가 눈을 못 뜨거든요.”
실제로 나타 백작령에 납치당했을 때, 그 기능을 사용해 간수를 제압했었다.
“그렇습니까.”
엘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어 아름다우면서도, 잡는 것이 불편하지 않도록 잘 설계된 칼자루였다.
“많은 화가가 성검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린 건 아십니까?”
엘이 칼자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물론이죠.”
혹시나 유피테르를 가지고 다니는 데 문제가 생길까 봐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성검을 담은 그림은 많았다. 내가 화가였더라도 한 번쯤은 성검을 그려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진짜 성검을 담은 그림은 전쟁을 거치며 모두 소실됐다. 남아 있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00년 정도 전의 그림이었다.
‘그때는 이미 유피테르의 칼자루에 누가 꼬질꼬질한 붕대를 감아놨었지.’
그래서 붕대 아래 진짜 유피테르의 모습이 담긴 그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화가는 아니었지만, 제 조상님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분의 화첩에는 다양한 것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는 성검도 있었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림이라니? 그림이라니!
엘의 조상인 젠 로이츠가 성검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면, 그건 유피테르에 꼬질꼬질한 붕대가 감기기 전이었다.
‘젠 로이츠. 당신 기사라면서, 왜 이렇게 그림을 많이 그린 거야?!’
내가 경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바위틈에 꽂혀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검파(劍把)밖에 보지 못했지만….”
엘의 시선이 칼자루를 지나 내 두 눈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겠군요. 이게 그 그림 속의 성검이라는 걸.”
엘의 말에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성검이래. 누가 성검을 가지고 있는데? 오베론 공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벌써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어떻게 이게 성검이에요?”
나는 재미있다는 듯 일부러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비슷하게 생긴 검이겠죠. 게다가 성검은 장검이라면서요?”
“누구도 뽑힌 검을 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장검이라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단검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 검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우기고 나서자 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좋습니다. 만약 이게 성검이 아니라면, 제가 여기서 파괴해도 상관없겠군요.”
“제 검을 부수겠다고요?”
“검은 새로 구해드리겠습니다. 가격이 얼마든, 원하시는 거로 구입해드리죠. 이게 성검이 아니라면 레이디 오베론에게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건 시험이었다. 엘은 저 검을 진짜 부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좋은 검으로 보상해준다면 상관없어요.”
“그렇군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엘이 유피테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실내를 밝힌 불빛에 반짝이는 검신이 때에 맞지 않게 아름다웠다.
“왕립기사단장의 검에 붙은 별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엘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물었다. 하지만 딱히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쇄파(碎破). 모두 부순다는 뜻입니다. 와이번의 이빨로 만들어서, 정말 단단하거든요.”
엘이 검을 들어 바닥에 놓인 유피테르를 겨누었다.
“이걸로 내려치면 저 단검의 손잡이는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완전히 부서지겠죠.”
엘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탐색했다. 내 심정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게 엘의 시험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유피테르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침묵을 지켜달라는 내 부탁을 잘 지켜주고 있었다.
“그럼 부수겠습니다.”
엘이 검을 높이 들었다가,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의 검 끝이 정확히 유피테르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에 방향을 틀어서 옆 바닥을 찍겠지.’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험해서 죄송합니다. 역시 이건 성검이 아니었군요’라고!
‘그러면 나는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돼’
나는 태평하게 엘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드워프들이었다.
“안 돼!”
초조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던 누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튀어 나왔다.
“그게 어떤 검인데, 절대 파괴해선 안 돼! 그건 누구도 다시 만들지 못할 걸작이란 말일세!”
하지만 누안의 외침은 엘의 움직임을 멈추기에 너무 늦었다. 그의 검은 그대로 목표에 내리꽂혔다. ‘콰광!’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그 황망한 광경에 누안이 자리에 주저앉아 숫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성검이…… 우리의 걸작이!”
‘아이고, 기어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나는 머리를 짚었고, 자욱한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 예상대로 엘의 검은 단검이 아니라 그 옆의 돌바닥에 찍혀 있었다.
“역시 이게 성검이었군요.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엉엉 울고 있던 누안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엘이 바닥에 꽂힌 검을 거두어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유려해서, 역시나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엘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단검을 들어 두 손으로 내게 바쳤다.
“단장 엘 로이츠를 비롯한 저희 왕립기사단이 지금 이 시각부터 성검의 주인을 지키겠습니다.”
엘의 말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던 누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히끅! 끄윽! 끅!”
누안이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리는 계속 새어 나왔다.
“힉! 히윽!”
누안의 딸꾹질 소리가 두 번 더 공간을 울린 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사람들이 엘을 따라 우르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세상에,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어!”
“건국왕 에프론 제레인트의 재림!”
“왕국을 구할 태양왕!”
쏟아지는 사람들의 찬양 속에 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것을 가져가십시오.”
일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로, 단단히 미쳐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이 상황의 원흉인 유피테르를 집어 들었다. 손에 유피테르를 꽉 쥐는 순간. 검신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유피테르.]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연출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불 꺼요, 당장.]
[예.]
뿜어져 나온 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하지만 이미 빛을 본 사람들은 황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야말로 에라 모르겠다-라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눈을 감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