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치볼드가 단 아래로 내려가자, 다른 손님들이 차례로 찾아와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을 건넬 때마다 사람들은 내 목에 걸린 에드실라의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확실히, 이런 대단한 선물을 앞에 두고 소박한 선물을 하는 건 민망하지.’
하지만 말이 소박하다는 것이지, 손님들이 건네는 선물들도 모두 고가였다.
‘에드실라의 눈이 지나치게 비쌌을 뿐이라고.’
평범한 사람은 평생 구경도 하기 힘든 보석이나 장신구들이 내 손에 선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감탄하며 받았지만 비슷한 물건들이 쌓여 갈수록 감흥도 점점 떨어졌다.
‘이렇게 많은 금은보화를 두고 무슨 배부른 소리냐!’
내가 슬슬 선물 증정식에 지쳐 갈 때쯤, 마지막으로 라파쉬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어색하게 친절한 미소를 유지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던 차에 편한 사람들이 등장하니 반가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를 보는 수십, 수백 쌍의 눈만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리쉬!”
나는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라파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고작 두 달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2년은 못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브리아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우리 막내는 이브리아를 보고 코피를 흘렸다니까요, 글쎄!”
라파쉬가 호탕하게 웃으며 제 옆에 선 어린 드워프의 등을 툭 쳤다. 어린 드워프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라파쉬의 뒤로 몸을 숨겼다.
“오늘 라파쉬도 정말 예뻐요!”
늘 작업복만 입고 있던 라파쉬도 오늘은 제대로 멋을 냈다. 드워프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좀 봐 줄 만하죠? 드워프의 전통 복장이에요.”
라파쉬가 자랑하듯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섬세한 문양이 빼곡하게 채워진 옷은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 예뻐요.”
“다음에 이브리아의 옷도 만들어 줄게요.”
“나한테요? 드워프들의 전통 복장인데, 그래도 괜찮아요?”
“뭐, 우리 옷을 만들 때보다 더 많은 천이 들겠지만요. 추가 금액은 확실히 받을 거예요.”
“물론이죠. 얼마든지 지불할게요.”
라파쉬와 내가 농담을 주고받느라 낄낄거리고 있으니 드워프 마을의 수장 누안이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차. 선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파쉬가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해 허리를 살짝 숙이는 드워프식 인사였다.
“내 친구여,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된 것을 일족을 대표하여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작은 친구들.”
나는 라파쉬의 인사를 따라 정중하게 인사했다. 커다란 사람이 자신들의 인사를 따라 하자 어린 드워프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도 선물을 준비했어요.”
“멀리서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요.”
“하지만 우리 드워프들은 예의를 알거든요!”
라파쉬가 그렇게 외치며 제 뒤에 선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라파쉬의 신호에 드워프들이 품 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것을 보면 청요석인 것 같았다. 모두가 준비한 것을 확인한 라파쉬가 자신의 품에서도 청요석 구슬을 꺼냈다.
“이브리아에게 우주를 선물할게요.”
“우주요?”
내가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파쉬가 씩 웃으며 청요석 구슬을 천장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팔 힘이 좋기로 유명한 드워프답게 구슬은 천장 끝까지 닿을 듯 높이 떴다. 그녀를 따라 다른 드워프들도 차례로 청요석 구슬을 던졌다. 순식간에 천장을 채운 청요석 구슬들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아!”
공중에서 청요석 구슬이 터졌다. 하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라 의도한 연출이었다. 차례로 펑펑 터지는 청요석 구슬들의 파편이 별처럼 아름답게 공간을 수놓고 있었다.
조명의 빛에 반짝이는 조각들이 허공을 부유하며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낙하했다. 그것은 하늘의 별처럼 보이기도, 쏟아지는 한겨울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넋을 잃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려면 2시간은 걸릴 거예요. 파티가 끝날 때까지 이 풍경을 즐길 수 있죠.”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드워프들의 기술이 이 정도랍니다.”
라파쉬가 드워프식 인사를 하며 활짝 웃었다.
그 뒤로는 진짜 파티였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신나게 떠들었다. 공간을 별처럼 수놓은 청요석 가루가 사람들을 더욱 들뜨게 했다.
나는 그 속에서 첫 춤을 아버지와 함께 췄다. 두 번째는 아치볼드였다. 가족 모두와 춤을 췄으니 다음은 에스코트를 맡은 파트너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해리가 보이지 않았다.
“해리를 찾으십니까?”
내가 해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리자 데인이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그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저쪽 테라스로 나가는 걸 봤습니다.”
모두 신나게 즐기느라 테라스는 한산했다. 오로지 한 곳만 커튼이 내려진 채 굳게 차단되어 있었다. 저기구나. 덕분에 나는 쉽게 해리가 있는 곳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해리가 있는 테라스로 들어섰다.
고작 커튼 하나 내렸을 뿐인데. 테라스의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해리.”
나는 고요한 테라스 난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해리를 불렀다.
“주인공이 왜 여기 있어?”
“이제 해리랑 춤을 출 차례거든요.”
나는 웃으며 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저었다.
“밖은 싫어. 사람들이 많아서, 냄새가 역겨워.”
“그럼 여기서 추면 되죠.”
테라스는 좁았지만 그리 움직임이 큰 춤이 아니라면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금 손을 뻗어 해리를 재촉했다.
“주인공은 자리 오래 비우면 안 된단 말이에요. 금방 다시 나가 봐야 돼요. 그러니까 빨리 내 손 잡아요.”
하지만 내 재촉에도 해리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왜 그래요? 혹시 춤 못 춰요?”
악마들의 교양에는 춤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난 잘 추니까, 내가 리드하지 뭐.”
나는 춤을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브리아의 몸에 남은 기억 덕분인지,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누가 누굴 리드한다고?”
나의 도발에 해리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내 몸을 제게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바짝 붙어 오자 해리가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가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건! 천 어디 갔어?”
“어디 가긴요. 원래 파여 있었어요.”
“이렇게까지 깊게 파여 있었단 말이야?”
“에스코트하면서 다 봤잖아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건, 그때는, 제대로 못 봐서…….”
해리가 우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옷으로 갈아입은 이후 해리가 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보여 줄 때 잘 좀 보지. 괜히 어울리지도 않게 부끄럼 탄다고 좋은 구경도 못 했죠?”
“시끄러워.”
해리가 이마로 내 이마를 가볍게 부딪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튼 너머로 아주 작은 소리로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해리는 그 소리에 맞춰 조심스럽게 나를 리드했다. 음악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귀를 기울이고 청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주 안은 해리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렇게 가깝다고 상대방 심장 소리가 들리나?’
나는 곧 그게 해리가 아닌 내 심장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들뜬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박동이 빨랐다.
“해리, 춤 되게 잘 추네요.”
나는 민망함을 떨치기 위해 해리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건국왕의 마법사였다는 걸 잊지 말라고. 왕실과 귀족 문화에는 나도 일가견이 있어.”
“그렇게 일가견이 있는 사람처럼은 안 보이거든요. 여러모로.”
“뭐라고?”
해리가 불만스럽게 외치며 내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내가 진짜 예절을 모르는 망나니처럼 해 봐?”
“평소에도 늘 그러고 있거든요!”
“……망나니까지는 아니었을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확신은 없는 눈치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생일 선물 줄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해리가 물었다.
“선물을 준비했어요?”
“왜 놀라? 나도 그 정도 예의는 있는 사람이야.”
“몰라봐서 참 죄송하네요. 그런데 빈손 아니에요?”
나는 눈으로 해리의 모습을 훑었다. 어디를 봐도 그는 빈손이었다.
“손에 들고 올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서.”
해리가 춤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내게 물었다.
“그래서, 받을 거야? 내가 주는 선물.”
“선물은 사양하지 않는 거라고 배웠어요.”
“다행이네.”
해리가 설핏 웃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얼굴과 선명해지는 숨결. 이미 익숙한 상황이라,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키스가 선물이에요?”
“아무튼 내 계약자는 성격도 급하셔.”
해리가 내 질문에 답을 주는 대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그 뒤는 언제나와 비슷했다. 서로의 모든 것이 뒤섞이는 기분.
기분 좋은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입속으로 무엇인가가 밀려 들어왔다. 작고 동그란 구슬 같은 것.
‘어? 이건 뭐지?’
놀라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해리가 내 뒤통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하는 사이 구슬이 꿀꺽, 입안으로 넘어갔다. 내가 구슬을 완전히 삼키고 난 뒤에야 해리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 나 방금 뭐 삼켰어요.”
“알아. 그게 내 선물이야.”
“이 이상한 구슬이요?”
“이상한 구슬이라니. 내 영혼의 조각이거든!”
“영혼의 조각이요? 해리의?”
내 질문에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네가 사라졌을 때 바로 찾지 못했잖아. 하지만 내 조각을 너한테 심어 두면, 언제 어디서든 찾아갈 수 있어. 네가 내 진짜 이름만 부른다면.”
해리의 눈은 진지했다. 내가 납치됐을 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지 미미한 죄책감도 서려 있었다.
“해리.”
“응.”
“……이 좋은 걸 왜 처음부터 안 줬어요?”
“뭐?”
“부작용은 없어요? 이런 거 잘못 먹으면 부작용 생기고 그러던데.”
“뭐, 라, 고?”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보기 싫어 농담을 건네자 해리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이럴 거면 안 줄걸. 다시 내놔. 어서 내놔!”
해리가 당장 내 입을 찢을 기세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빼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농담이에요. 고마워요, 해리.”
내가 한결 진지해진 눈으로 말하자 길길이 날뛰던 해리가 진정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혼의 조각을 주는 거,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내 질문에 해리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영혼의 조각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라서, 아무래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다치면 나도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 정도?”
“뭐라고요?”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해리가 다치면 나한테도 고통이 오고 그래요?”
“그렇게 되려면 네 영혼의 조각을 내게 심어야 하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던 해리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 지금 그런 게 걱정이야?”
“당연히 걱정되죠. 영혼의 조각이 이렇게 대단한 건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생일 선물이지. 악마는 인간에게 평범한 걸 주지 않거든.”
해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저기, 해리.”
“응.”
“내가 다칠 때 해리에게 반응이 간다는 건, 내가 죽을 때도 해리에게 반응이 간다는 거예요?”
내 질문에 의기양양하게 웃던 해리의 입매가 굳었다.
“혹시 내가 죽으면 해리도 죽고 그런 거예요?”
“너 진짜 걱정 많네.”
해리가 주먹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두드렸다.
“악마는 강해. 인간의 부상이나 사망 따위가 내게 영향을 미칠 것 같아? 고작 작은 조각 하나라고.”
“진짜예요? 진짜 해리한테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뭐, 네가 죽으면 그 조각만큼의 힘은 잃겠지.”
“네?”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럼 이거 안 받을래요. 그냥 다시 가져가요. 어떻게 하면 돌려줄 수 있어요?”
나는 목을 매만지며 해리가 준 영혼의 조각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삼켜 버린 조각을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해요? 빨리 가져가라니까요!”
“싫어. 이미 준 걸 왜 가져가라는 건데?”
“나 때문에 해리가 약해지는 거 싫어요. 약해지면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해리의 쾌락을 채워 줄 방법을 찾기 위해 읽었던, 악마의 습성과 세계를 설명했던 책을 떠올렸다.
악마의 세계는 약육강식이었다. 강한 것만 추구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대로 도태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구슬을 줘?’
인간의 수명은 짧았다. 오래 살아도 100년이나 될까? 하지만 그에 비해 악마는 몇천 년을 우습게 산다. 길어야 겨우 100년 함께할 나를 위해서 해리가 남은 몇천 년 동안 사용해야 할 힘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걸 주면서 무슨 선물이라고! 얼른 가져가요!”
“싫다니까. 정말 나한텐 아무런 타격도 없다고. 그 정도 힘을 잃는 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면 왜 처음부터 안 줬는데요? 엄청난 거니까 이제야 주는 거지!”
몇 번이나 실랑이가 오갔지만 해리는 완고했다. 다시 영혼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빨리 가져가요!”
나는 해리의 두 뺨을 감싸 쥐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가져올 때도 이렇게 해서 가져왔으니까, 돌려줄 때도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입을 맞춰도 삼켜 버린 구슬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만해. 가져갈 생각 없다고 했잖아.”
해리가 나를 밀어내며 팔로 입술을 슥 닦았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의 입술이 타액으로 가득했다.
“진짜, 난 이런 거 싫단 말이에요.”
“어떤 거?”
“누굴 책임지는 거요.”
“언제는 나 책임지겠다며?”
“그건 먹고 자는 걸 책임지겠다는 이야기였죠. 내가 해리의 목숨 같은 걸 책임질 수는 없어요.”
“누가 너한테 내 목숨 책임지랬어? 그건 내가 알아서 챙겨.”
“알아서 못 챙길 것 같으니까 그렇죠.”
이기적인 척은 다 하면서. 자신만만한 척은 다 하면서. 결국 해리는 언제나 나한테 졌다. 하찮은 인간인 나도 못 이겨 먹는 악마가, 마계로 돌아가서는 또 얼마나 이리저리 치이고 살겠는가? 그런데 지금보다 힘도 없으면 정말 답이 없었다.
“이봐, 계약자. 너 진짜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고작 그 작은 힘 없다고 내 목숨이 위험하거나 그러지 않아.”
“거짓말. 보나마나 악마 중에서도 엄청 약한 축일 거면서.”
“뭐? 내가?”
해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한테 하는 걸 보면 딱 알겠어요. 하급 중에서도 진짜 하급이 분명해.”
“야. 아니거든! 이 테오하리스 님은 악마들의……”
“됐어요. 또 거짓말이나 하겠지.”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해리를 밀어내고 등을 돌렸다.
“어디 가는데?”
“악마님 거짓말 듣기 싫어서 도망가요!”
나는 그대로 커튼을 열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사람 많은 곳은 힘든지, 해리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레이디 오베론.”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리던과 마주쳤다. 그는 테라스에서 나온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대로 정리를 하는 게 좋겠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거든.”
“그런가요?”
거울이 없으니 내 몰골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머리, 흐트러졌어.”
해리가 키스하면서 뒤통수를 붙잡아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충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전문가의 손길은 전혀 따라갈 수 없었지만, 느슨하던 머리가 조금 단단하게 고정된 거 같았다.
“다른 곳은요?”
내 질문에 리던이 묘한 얼굴을 하고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두드렸다.
“입술.”
“아.”
첫 번째 키스는 꽤 부드러웠지만, 해리에게 조각을 돌려주겠다고 내가 달려들었을 때는 좀 격렬했다.
‘엠마가 화장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랬는데.’
해리에게도 화장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해 놓고, 정작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많이 번졌어요?”
“조금.”
리던이 그렇게 말하며 입가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입술 주변을 몇 번 매만지더니 금세 떨어져 나갔다.
“대충 닦아 냈어. 부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네. 감사해요. 생일 파티에 와주신 것도, 방금 수습 도와주신 것도.”
“생일 파티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리던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공개적으로 힘을 모을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지.”
“왕세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두 모였지. 결집할 계기를 얻은 거야.”
“그런 의미라면 제가 도와드린 게 아니라 카시안 쪽에서 실수한 거예요. 제 생일은 처음부터 날짜가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카시안이 그렇게 어리석은 실수를 하게 만든 건 그대지. 카시안 쪽을 이래저래 많이 자극했잖아.”
“마정석 광산 개발 말이죠?”
내 질문에 리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냐. 얼마 전에 시장에서 마주쳤다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내 친구가 누군지 잊었어?”
소문에 빠른 리던의 친구라면, 루크를 말하는 것이다.
“매번 왕자님을 사칭하고 다니는데 아직까지도 친하게 지내시나 봐요.”
“그 대가로 정보를 가져다주니까.”
“왕자님 정보를 흘리기도 하던데요?”
“내 정보를?”
“네. 잠행을 할 때는 이던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아. 어차피 대충 지은 이름이라 정보랄 것도 없어.”
“저도 참 대충 지은 이름이라고는 생각했지만요.”
내가 동조하자 리던이 픽 웃으며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초대장을 보냈는데 응하지 않더군.”
“사교계 복귀는 생일 파티로 하고 싶었거든요.”
“개인적인 초대였는데.”
“그럼 더더욱 거절이고요. 카시안하고 파혼한 제가 왕자님을 만나면 또 무슨 소문에 휩쓸리겠어요?”
아마 온갖 막장 드라마가 생성되어 왕국을 떠돌 것이다.
‘나는 두 형제를 오가며 유혹한 꽃뱀 같은 사람으로 회자되겠지.’
질린 내 얼굴을 보고 리던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런 건 사양이지만, 다음번 초대는 꼭 응해 줬으면 하는군. 오칼 상회와 에렐, 둘 사이를 이간질한 게 누구였는지 알아냈거든.”
“놀랍네요. 사실 못 알아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능력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
“그 친구의 능력이라면 저도 이미 경험했죠. 그래서 누군데요, 이간질했다는 사람이?”
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리던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서서 급하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보는 눈도 많고.”
리던의 말 그대로였다. 리던과의 대화가 길어지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무어라 수군대고 있었다.
“더 길게 대화를 나눴다간 피차 불편한 소문의 주인공이 될 거야.”
“동의해요. 초대장을 보내 주시면,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을게요.”
“그것 참 감사하군.”
“별말씀을요.”
“그럼 즐거운 성년식의 생일을 즐기길.”
리던이 정중한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부디 즐거운 파티를 즐기시길.”
나 역시 정중한 인사로 화답하자 리던이 설핏 웃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쉽게 모이기 힘든 자신의 지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그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어쩌다 내 파티가 이런 정쟁의 중심지가 되었나, 자괴감이 느껴져.’
나는 신문의 헤드라인 같은 짧은 말로 내 심경을 정리하며 아직까지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엘.”
그중에는 엘 로이츠도 있었다. 리던의 참석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가 나타난 건 정말 의외였다.
“와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초대장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참석한다는 답장은 없었잖아요.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도 있는 날이고. 또 이 파티가 갑자기 이상한 의미를 가지게 돼서…….”
엘을 비롯한 로이츠 가문은 확고한 중립파였다. 그가 이렇게 파티에 나타난 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저는 로이츠 가의 후계자도 아니고, 가문의 이름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경은 그러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것 같거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무튼 와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제 파티 참가자 목록이 생각보다 화려해졌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하늘색 머리와 아직도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청요석 조각들이 썩 잘 어울렸다.
“그럼 저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봐야 해서…….”
그렇게 엘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의 손목에 걸려 있던 팔찌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엘이 놀라서 내 손을 놓자, 팔찌의 반응도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엘의 놀란 눈이 나와 제 팔찌를 오갔다.
‘어째 상황이 불안한데.’
하지만 나는 태연함을 가장해 먼저 팔찌 이야기를 꺼냈다.
“마도구 팔찌인가 봐요? 에렐에서도 곧 그런 팔찌를 판매할 거예요. 시제품이 있는데,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하지만 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반응이 사라진 팔찌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디 오베론.”
엘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손을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선선히 대답했지만 속은 초조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유피테르. 어떡해요? 저 팔찌 뭐인 것 같아요?]
다급하게 유피테르를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유피테르!]
[아. 주인님.]
내가 다시 한번 소리치자 그제야 유피테르가 반응했다.
[안에서 상당히 민망한 광경이 계속되기에 잠시 귀를 닫고 있었습니다.]
유피테르가 차분하게 테라스에서의 사건을 언급했다. 나는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속으로 삼켰다.
[해리와 매일 그러진 않아요.]
[제가 볼 땐 대체로 그러시던데요.]
유피테르는 성검이었지만, 주인의 민망함을 조용히 넘어가 주는 관대함이 없었다.
[흠흠. 아무튼 지금은 저 팔찌가 중요해요. 무슨 팔찌인 것 같아요? 성검인 걸 알아본 걸까요?]
[저와 공명하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유피테르가 불확실하게 말끝을 흐리는 순간, 엘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여지없이 팔찌가 빛을 내며 기이한 소리로 울어 댔다. 엘이 정중하지만 서늘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검을 가지고 계십니까?”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그냥 악역으로 살겠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