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156)

* * *

오베론 저택의 대연회장은 왕궁의 중앙 연회장에 뒤처지지 않는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했다. 많게는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곳이지만 오늘은 그 수의 5분의 1도 채우지 못했다.

“역시 다들 왕궁으로 갔나 봐요.”

참석한 귀족들이 불안한 얼굴로 속삭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1왕자를 지지하는 소수의 리던 일파였다. 여태까지 중립을 지키던 사람들도 일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역시 왕궁으로 갔어야 하는 거 아냐?”

누군가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고요한 대연회장을 울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유명 인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유력 귀족들이 모두 왕세자를 지지하는 카시안 일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자님도 안 오셨잖아.”

왕도의 유명 인사들이 왕궁으로 향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리던마저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

“지금이라도 왕궁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연회장이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그때 대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건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역시 썰렁하군.’

당초 그는 이브리아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에렐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실질적 영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마저 에렐을 떠나면 영지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초대장을 받고는 위의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참석을 거절했다. 이브리아 역시 기분 좋게 이해해 줬고 말이다.

하지만 왕세자의 약혼식과 이브리아의 생일 파티 날짜가 겹치게 됐다는 걸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왕세자의 약혼 파티에 몰려갈 테니 이브리아의 파티장이 텅 비는 건 당연한 일.

‘나라도 자리를 채워 주는 게 좋겠지.’

그래서 그렇게 질색하던 와이번을 타고 에렐에서 왕도까지 날아온 것이다.

“와! 저것 봐! 저기 와이번이 있어!”

“저 사람들이 그 유명한 용기사들인가 봐요.”

뒤이어 하얀 제복을 입은 제5 서리 기사단의 기사들이 대연회장으로 발을 들였다. 창밖에는 그들이 타고 온 와이번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하얀 제복의 기사들 뒤를 따른 건 라파쉬를 선두로 한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었다. 인간과의 교류를 꺼려서 드워프 마을에 틀어박혀 사는 그들이었지만, 이브리아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드워프들이야.”

“드워프들은 산속 깊은 곳에 숨어서 산다던데요?”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드워프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다시 한번 대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지방의 유력 귀족, 나타 백작이었다.

“저 사람이 나타 백작이에요.”

사람들이 재빨리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마정석 광산을 가진?”

“그래. 이번에 제 아버지를 죽인 숙부를 몰아내고 백작이 됐잖아.”

멀리 지방에서 들려온 나타 백작의 스토리는 왕도에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6년이나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해 작위를 돌려받은 것이 마치 소설 같았다고, 사람들은 한동안 그에 대해 떠들었다.

“아직 파티는 시작 전인가?”

소란을 뚫고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경악에 차서 대연회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1왕자 리던 제레인트와 왕립 기사단장 엘 로이츠가, 왕궁이 아니라 이곳, 오베론 저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왕자의 등장까지는 예상 가능했지만 왕립 기사단장까지 이곳을 찾을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틀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위 귀족은 많이 빠졌지만, 이 정도면 제법 화려한 손님들이었다. 자신들은 그 화려한 목록 속에 조용히 묻혀 있을 수 있게 됐다.

파티 시간이 임박해 오베론 공작과 소공작 아치볼드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연회장은 완전히 평화를 되찾았다. 연주는 훌륭했고, 음식도 맛있었다. 고급스러운 장식과 커다란 유리창으로 보이는 저녁 하늘도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모두가 파티를 즐기며 떠들고 있는 그때.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던 대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올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이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문이 열리자 뒤에서 빛이 쏟아졌다. 누가 일부러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눈부신 빛이었다. 그 빛을 뚫고 이브리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옆에는 용기사의 제복을 입은 해리가 함께였다.

“아…….”

“세상에.”

사람들은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마시고 있던 샴페인도 내려놓고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을 좇았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이브리아는 타오르는 불꽃의 여신 같았다. 강렬한 붉은색의 드레스 덕분인지, 평소에는 매섭게 보이던 인상도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기사의 아름다움도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하얀 제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 이브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대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찾아준 손님을 모두 기억하겠다는 듯 모두와 눈을 맞춘 이브리아가 슬쩍 미소 짓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늘 무섭다고 생각했던 미소가 이지적이고 우아하게 느껴졌다.

‘오베론 영애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이브리아는 언제나 오베론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되었다. 그도 아니라면, 왕세자 카시안에게 일방적으로 애정 공세를 퍼붓는 그의 약혼녀로 불렸다. 카시안은 청순하고 가련한 여인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이브리아도 언제나 그런 옷을 입었다. 옅은 하늘색, 아련한 분홍색, 순수한 하얀색. 서늘한 이브리아의 얼굴에는 전부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렇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 미모가 가려진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 이브리아는 달랐다. 비로소 진짜 이브리아 오베론의 모습이 소개되는 날이었다.

* * *

[이건 과한 연출 아닐까요?]

나는 뒤에서 쏟아지는 후광을 느끼며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등장에 힘이 실립니다.]

오랜만에 만난 유피테르가 당당하게 주장했다.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유피테르를 꺼내 온 건 해리였다.

-어차피 왕립 기사단 놈들은 여기에 안 올 거잖아? 성검을 사용해도 안전해.

해리는 성검의 잡다한 기능이 멋진 등장에 효과가 있을 거라고 주장했고,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모두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지.’

나는 후광을 헤치고 연회장 안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지 못할 것 같다던 인세티아 남작도, 기대하지 않았던 드워프들도, 제5 서리 기사단원들도 모두 참석해 줘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왜인지 그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무슨 일이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제자리에 서 있는 내게 공작이 다가왔다.

“주인공다운 등장이었다, 이브리아.”

공작이 팔을 내밀어 나를 에스코트했다. 파트너인 해리는 공작에게 나를 넘겨준 뒤 한쪽으로 비켜섰다. 공작은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소매에는 내가 선물했던 커프스단추가 달려 있었다.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사용인들이 요즘 공작님께서 늘 같은 커프스단추만 고집하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나는 공작과 함께 대연회장 앞의 단 위로 올라섰다.

“오늘은 내 딸 이브리아의 18번째 생일이오. 찾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오.”

공작이 손님들을 향해 인사하고 사람들 앞에 나를 소개했다.

“이 아이가 나의 소중한 딸, 이브리아 오베론이오.”

나는 소개에 맞춰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게 그렇게 놀라운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공작이 내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내 선물이다, 이브리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그의 선물을 받아 들어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었다. 성인식에서 받은 첫 선물은 받은 자리에서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이 관례였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안에 든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화려한 목걸이였다.

‘가운데 엄청 큰 보석이 박혀 있네.’

핑크빛이 감도는 보석을 빤히 보고 있으니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맙소사, 에드실라의 눈이잖아!”

‘어…… 에드실라의 눈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생일 선물 목록에 넣었으니까.

‘그 목록이 결국 공작을 위한 거였던 거야?’

내가 놀라서 아치볼드를 쳐다보자 그가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문제는 목록이 공작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에드실라의 눈은…… 그건…….’

엄청나게 비싸잖아!

단순히 비싸기만 한 게 아니었다. 에드실라의 눈은 잃어버린 왕국의 가보로, 전쟁 당시 제국으로 넘어가 그쪽의 박물관에 전시 중인 목걸이였다.

‘아니, 지금은 여기 있으니까 전시 중이었다고 해야 하나?’

에드실라의 눈은 왕국의 첫 여왕이 대관식에서 사용했던 목걸이였다. 제레인트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 몇 번이나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제국이 막대한 금액을 요구해서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 있냐?’

내가 생일 선물 목록에 에드실라의 눈을 적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 원해서 쓴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물품을 30개나 쓰라고 해서, 그런데 도무지 채울 게 떠오르지 않아서. 옆에 있던 책을 뒤져 대충 쓴 것이 에드실라의 눈이었다. 그냥 자리 채우기용이었다는 뜻이다.

“진짜야? 진짜 에드실라의 눈이야?”

사람들은 벌써부터 난리가 났다. 당연했다. 내가 저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다면, 나부터 저 소란에 동참했을 것이다.

“목에 걸어 주마.”

하지만 공작은 그 소란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아버지, 이건 너무 비싸요.”

“하지만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애가 갖고 싶다고 했다고 이렇게 비싼 걸 사 오면 어떡해! 오베론 공작 당신, 생각보다 대책 없는 사람이었구먼!

이걸 살 돈이면 웬만한 영지 하나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지만, 그게 꼭 갖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나를 보며 공작이 상자 속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상자 밖으로 나온 목걸이의 영롱한 자태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작은 모두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 이브리아.”

공작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내 목에 에드실라의 눈을 걸어 주었다. 수많은 보석들이 만들어 내는 광채가 빛의 조각이 되어 눈앞을 떠다녔다.

“……아버지.”

그렇게 공작을 부르자 그가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무섭지도, 서늘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냥 미소였다.

제자리에 못 박혀 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공작에게 아치볼드가 다가왔다.

“너무하십니다, 아버지. 처음부터 그렇게 큰 선물을 주시면 다음 사람이 부담스럽습니다.”

아치볼드가 나른하게 웃으며 내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줄리덴 상점의 에메랄드 귀걸이다. 이것도 목록에 있었지?”

그것도 목록을 채우기 위해 대충 집어넣은 거지만, 그걸 보고 정말로 선물을 사 온 것이 고마웠다.

“내가 이걸 줬으니, 다음에 선물을 건네는 사람들도 덜 민망하겠지.”

“아버지가 엄청난 선물을 하실 줄 알았다는 이야기 같은데요.”

“당연히 알았지. 그 목록에 있는 것 중 가장 비싸고 희귀한 것을 구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에드실라의 눈일 줄은 몰랐지만.”

아치볼드의 시선이 내 목에 걸린 에드실라의 눈으로 향했다.

“내 생일 땐 검을 주셨는데, 그건 왕도의 대장간에서 제작한 거였거든. 네 목걸이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일 거다.”

내 생일에만 좋은 선물을 준 것이 속상한 것일까? 나는 걱정스럽게 아치볼드의 눈치를 살폈다. 내 눈빛을 읽은 건지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는 작위를 받으니까. 다른 것들은 네게 많이 가는 게 맞다.”

“그래도 차이가 너무 심하니까…….”

“내가 공작이 되면 너한테 한 푼도 안 줄 테니까, 지금 아버지께 많이 받아 두라고.”

“그건 농담을 가장한 진심이죠?”

“알아들었다면 다행이다.”

아치볼드가 내 손에 상자를 쥐여 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튼 제대로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 여동생. 이제 어리다고 봐주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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