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156)

* * *

드디어 대망의 생일 파티였다. 나는 그동안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세 사람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과 엠마에게 휘둘리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오늘로 이것도 끝이야.’

이 성년식 파티가 지나고 나면 나는 완전히 자유였다. 끝없는 피부와 헤어 관리도, 왕도의 답답한 생활도 모두 끝이었다.

파티가 열리는 건 저녁이지만 공작저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어딘가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운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

“결전의 날입니다, 아가씨.”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이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처럼 비장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저희가 갈고닦은 모든 걸 발휘하겠습니다.”

“응. 하지만 너무 노력하지는 않아도 돼.”

‘그러면 내가 힘드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은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시작은 목욕입니다. 장미향이 나는 향유를 준비해 뒀지요.”

제니를 시작으로 데이지와 라나가 바쁘게 오늘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다 해 줄 텐데 뭐.’

내가 할 일은 얌전히 이들에게 몸을 맡기는 것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너무 졸려.’

나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며 눈을 감았다.

* * *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더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게 누구?”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여자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하얀 피부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단정하게 틀어 올린 적갈색 머리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우아하게 떨어지는 붉은색 드레스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

한마디로, 오늘의 나는 엄청나게 예뻤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자화자찬이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 미친 미모는?’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과 엠마 역시 완성된 내 모습을 보며 감격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엠마는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수건에 찍어 내기까지 했다.

사실 이브리아는 원래도 예쁜 얼굴이었다. 사납게 생긴 인상과 싸가지 없는 성격이 그걸 가렸을 뿐이지, 예쁘기는 더럽게 예뻤다.

그에 비해 여주인공 캐서린은 평범한 외모라는 묘사가 있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예쁜 이브리아와 달리 오래 보면 빠져들고, 어딘가 눈길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매력이 꽃피는 얼굴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정말이지, 여주인공의 정석 같은 묘사라니까.’

“자, 아가씨. 이젠 해리 경에게 가셔야지요.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엠마가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살짝 끌어당겼다.

“아. 그러고 보니 파티 시작이 얼마 안 남았지?”

“네. 하지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 너무 서두르진 않으셔도 돼요.”

나는 엠마의 손길에 따라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차려입은 해리가 벽에 기대어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 경.”

엠마가 해리를 부르자, 다소 멍한 얼굴로 벽에 걸린 램프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굳게 닫혀 있던 해리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고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흠흠.”

그 모습을 본 엠마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한 시간 정도 후에 파티장으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충분히 이야기 나누고 오세요. 그렇다고 너무 깊은 대화는 하시면 안 되고요. 화장이나 머리가 흐트러지면 큰일이거든요.”

“어?”

“저희도 눈치가 있으니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방해라니, 그런 거 아닌……”

내 항변에도 엠마가 최고의 레이디 조작단을 데리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나서는 이들의 눈에서 의미 모를 응원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들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해리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내가 그의 앞에 선 뒤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해리?”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아…….”

그제야 해리가 느리게 눈을 껌뻑였다. 어딘가 흐릿했던 눈동자도 제대로 초점을 되찾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피곤한가?”

까치발을 들어 해리의 얼굴을 살피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사람 얼굴이 이렇게까지 빨리 빨개지는 건 처음 봤어.’

“와. 얼굴 터질 것 같아요, 해리.”

신기해서 해리의 빨간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더 붉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하, 하지 마.”

해리가 오른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지금 보니 얼굴을 가린 손도 새빨갰다.

“해리, 오늘 내가 그렇게 예뻐요?”

거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의 파괴력이었다.

“……너무 자신감 넘치는 거 아냐?”

“하지만 예쁜 걸 어떡해요!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예쁜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더 예쁘겠지 뭐.”

평소라면 당장 타박이 들려왔을 말인데도 해리는 말이 없었다.

‘와. 어떡해! 나 오늘 진짜 예쁜가 보다.’

내가 예쁘다는데 싫을 이유는 없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씩 웃는 나를 보고 해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웃지 마.”

“왜요?”

“아, 그냥 웃지 말라면 웃지 마.”

나는 해리의 두 뺨을 감싸 쥐고 그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해리의 눈동자가 아주 크게 흔들렸다.

“왜요? 내가 웃는 거 보니까, 막 설레고, 떨리고 그래서?”

내 눈앞에서 악마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엄청나게 강한 존재가 내 손바닥 위에서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웠다.

‘나한테 이런 변태 기질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이게 다 해리가 너무 귀여운 탓이었다.

“너, 저리 가.”

해리가 나를 밀어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가, 내 어깨에 닿자마자 움찔하며 손을 뗐다.

“싫어요. 난 여기에 있을 건데?”

나는 해리의 요청대로 멀어지는 대신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코앞까지 다가온 나를 보며 해리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그대로 정지.

“……해리? 아무리 악마라도 숨 안 쉬면 죽는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놀렸나?’

나는 걱정스러워져서 해리의 팔뚝을 쿡 찔렀다. 그것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건지, 해리가 움찔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읏!”

어깨가 붙잡힌 채로 몸이 빙글 돌아 등이 벽에 닿았다. 앞에는 내 어깨를 꽉 누르는 해리가 서 있었다. 조금 전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불과 10초 전만 해도 내가 해리를 벽에 몰아넣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런 신세가 됐다.

“야, 너는.”

해리가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쩐지 열기가 느껴지는 해리의 눈빛에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을 피했더니 해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좀, 웃지 말라면 안 웃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면 안 돼?”

해리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았다. 그의 깊은 한숨에 동그랗게 드러난 어깨가 간지러웠다.

“너는 날 좀 무서워 할 필요가 있어. 나 진짜 엄청난 악마거든!”

“내가 해리를 안 무서워해서 좋은 거 아니었어요?”

“그랬지. 그랬는데…….”

해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넌 내가 뭘 할 줄 알고 이렇게 겁이 없어?”

“왜요? 내가 무서워해야 할 만한 일 하고 싶었어요? 나 별로 무서운 거 없어요. 죽는 것만 빼면.”

“난 무서운 게 많아.”

‘악마는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의외라는 듯 해리를 보자 그가 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해리의 손바닥을 울리는 게 느껴졌다. 안정적인 심장 소리에 해리의 눈이 깊어졌다.

“너, 내가 제멋대로 굴면 싫어할 거지?”

“음. 어느 정도로 제멋대로 굴 건데요? 정도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것 같아요.”

“지금은 이 정도?”

해리가 그렇게 말하고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맞잡은 손이 단단했다.

‘손잡는 것 정도야 뭐.’

초등학생들도 하는 일이었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럼 이 정도는?”

해리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나를 꼭 껴안았다.

‘포옹? 이것도 뭐.’

“이것도 괜찮아요.”

“그럼……”

“혹시 다음은 키스할 거예요?”

손잡고, 껴안고, 그다음에는 뭘 할지 뻔했다.

“그것도 괜찮긴 한데요, 지금은 화장이 지워지면 곤란하니까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평소에는 해도 된다는 뜻이야?”

“미리 몇 번이나 했잖아요. 새삼스럽게, 뭘. 틈틈이 쾌락 충전도 하고 좋죠.”

게다가 해리와의 입맞춤을 하면 기분이 좋았다. 키스만큼이나 묘하게 서툰 악마의 애정을 느끼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말로는 매일 투덜대면서, 입 맞추는 건 그렇게 조심스러운 걸 보면 해리는 말보다 몸이 더 솔직한 쪽이었다.

“너 혹시 다른 사람한테도 막 이렇게 쉽게 허락하고 그런 건 아니지?”

해리의 입장에선 만족할 만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가 씩씩대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키스는, 아니, 껴안는 것도, 아니, 손잡는 것도! 전부 허락하면 안 돼!”

“그건 내 맘이죠.”

“안 돼. 내가 허락 못 해.”

“해리가 무슨 내 아버지예요? 아니, 아버지라도 그런 걸 허락하고 말고를 결정하진 못하거든요!”

“하지만 넌 내 계약자잖아!”

“악마랑 계약하면 다른 남자랑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그래! 그러면 아주 큰일 나!”

거짓말.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게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그래요?”

“그렇다니까.”

“흐음. 그렇구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를 쳐다보았다. 거짓말하는 게 찔리긴 했는지 해리가 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럼 어떤 큰일이 나는데요?”

“어?”

“내가 다른 남자랑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면 큰일이 난다면서요? 어떤 큰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서요.”

“어, 그건……”

우물거리며 고민하던 해리가 곧 당당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건 비밀이야! 그러니까 너한텐 못 알려 줘!”

“그렇군요. 비밀이군요?”

“그, 그렇다니까.”

“그럼 다른 남자의 기준은 어디까지예요? 가족도 포함이에요? 손잡고 껴안는 건 아버지나 오라버니와도 하는데, 그것도 포함인가요?”

“……어어?”

아무래도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해리가 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떡 벌렸다.

“어린애들은요? 지나가는 남자애가 귀여워서 손잡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어어어?”

아무래도 이것 역시 생각을 못 한 모양이었다.

‘이 어설픈 악마를 어쩌면 좋지?’

어떡하긴 어떡하겠어?

‘이 험한 세상 잘 이겨 낼 수 있게, 내가 품고 살아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팔을 붙잡았다.

“우선 파티장으로 가요. 이러다 늦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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