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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홀로 집중 조명을 받았을 두 개의 파티가 같은 날 열린다는 사실은 금세 사교계에 퍼졌다. 엠마의 이야기로는 사람 둘만 모여도 그날 누가, 어느 파티에 갈 것인지를 속살댄다고 했다.
왕세자의 약혼 파티냐, 오베론 공작 영애의 성인식이냐?
도박이 성행하는 클럽 하우스에서는 누가 어디에 갈지를 두고 돈을 거는 내기판까지 생겼다고 한다. 내 예상대로, 1왕자를 지지하는 쪽은 성인식을 겸하는 내 생일 파티를 많이 선택했다.
‘참석 확정을 알리는 답장만 봐도 그래. 전부 1왕자파인걸.’
둘 중 내 파티를 선택해 준 건 고마웠지만, 그들의 목적이 진심으로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그냥 왕세자파와 대립하기 위한 수단인 거지.’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미묘해졌다. 아마도 카시안을 지지하는 자들은 왕세자의 약혼 파티에, 리던을 지지하는 자들은 내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 어떤 파티에 참석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위 말하는 중립파의 입장이 애매해진다. 어쩔 수 없이 두 파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고수했던 중립은 끝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내 생일 파티는 단순한 파티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난 이런 거 바라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치열하고 첨예한 왕위 계승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버렸다. 조용히 생일 파티를 치르고, 다시 조용히 에렐로 돌아간다는 나의 계획도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소문에 빠른 사용인들이었다. 엠마는 비장한 얼굴로 나를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도 귀족 모두의 관심이 아가씨에게 쏠려 있어요. 그 눈들을 충족하려면, 보통 준비로는 힘들죠.”
“엠마, 어쩌다 내 파티가 폭풍의 눈이 되고 말았지만, 다들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아냐.”
사람들이 궁금한 건 내가 어떤 모습으로 파티에 나타날 것인지가 아니라, 누가 내 파티에 참석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엠마의 생각은 달랐다.
“이렇게 유명한 파티라면 그날의 모든 것이 화제가 된다고요. 주인공인 아가씨의 모습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평범하게 파티 준비를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엠마가 단호하게 말하며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이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는 듯 세 사람이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소개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라나, 데이지, 제니입니다.”
세 사람은 엠마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데 맞춰 내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자들인데?’
다행히도 엠마가 금세 내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각각 의상 디자이너, 헤어 디자이너, 메이크업 디자이너랍니다.”
“뭐?”
의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귀족들에게 파티용 드레스는 일회용이었다. 한 번 입은 드레스를 다시 착용하는 건 굉장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매 파티마다 의상을 새로 맞췄다. 하지만.
“머리와 화장은 엠마가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데.”
“절대 안 됩니다.”
엠마가 또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날 아가씨는 누구보다 아름다우셔야 해요. 그날 같은 시간에 파티를 여는 왕세자 전하의 약혼녀보다 더요. 전 우리 아가씨가 지는 건 절대 못 봐요.”
아.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지고 싶지는 않다. 내 눈빛이 변한 걸 알아챘는지 엠마가 웃으며 세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럼 시작하지요.”
* * *
“피부는 밝고 잡티도 없는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수분이 부족하네요. 남은 시간 동안 수분 케어를 집중적으로 하겠습니다.”
제니가 얼굴에 정체불명의 하얀 크림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그러나 뒤에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데이지의 한숨이 그보다 더 컸다.
“머리카락은, 세상에 이렇게 푸석푸석할 수가…… 머리카락 끝이 전부 갈라졌어요.”
상태를 살피기 위해 빗질을 시작하자 얼마 가지 않아 빗이 머리카락에 박혀 버렸다.
“악!”
머리가 당겨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엉켜서 빗질도 제대로 안 되네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데이지가 가위로 상한 부분을 모두 잘라 냈다. 금세 바닥에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쌓여 먼지처럼 나뒹굴었다.
“두 사람이 관리를 해 드릴 동안 저와 디자인 북을 보시죠, 아가씨.”
라나가 앞에서 커다란 디자인 북을 펼쳤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드레스가 그려져 있었다.
“성년식의 생일 파티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라나가 빠르게 내 모습을 훑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는 짙은 계열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얀 피부가 더 돋보이실 거예요.”
게다가 하얀색이라면 같은 날 약혼식을 올리는 캐서린과도 겹친다. 색이 겹치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내가 카시안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서 꼭 웨딩드레스 같은 흰색을 입었다더라- 같은 헛소문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나도 짙은 계열이 좋아. 푸른색은 어떨까?”
“그보다, 붉은색은 어떠신가요?”
“너무 성숙한 느낌 아닐까?”
“성년식이니까요. 오히려 이미지가 잘 맞을 겁니다.”
라나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 붉은색의 드레스를 찾아냈다.
“목과 가슴은 단정하게 감싸고, 대신 뒤쪽의 선을 깊게 파서 과감하게 등을 드러내는 겁니다. 앞에서 보면 단아한 숙녀 같지만, 뒤에서 보면 과감한 여인이 된답니다. 반전이 있는 거지요.”
“뒤를 강조하실 거라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시는 게 좋겠네요.”
머리카락을 잘라 내고 향유를 치덕치덕 바르고 있던 데이지가 라나의 말을 거들었다.
“아니면 같은 디자인으로 청록색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음. 결정이 쉽진 않네.”
고민하는 나를 보며 데이지가 물었다.
“에스코트는 어떤 신사분께서 하실 건가요? 그분과 의상 콘셉트를 통일하셔야 하니, 그분께 어울리는 색으로 결정하시면 더 좋지요.”
“아. 그렇구나.”
파티에 참석하는 파트너들끼리는 미리 드레스 코드를 논의해 색상을 맞추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내 파트너에게도 어울리는 색으로 드레스를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파트너는 내 호위 기사가 맡을 거야.”
내 말에 엠마와 세 여인의 시선이 순식간에 해리에게로 향했다. 지겨운 얼굴로 방 한쪽에 서서 내가 관리받는 모습을 지켜보던 해리가 갑작스러운 시선에 자세를 바로 했다.
“어머나, 세상에.”
“저 제복은 에렐에서 오셨다는 그 용기사님…….”
“용기사님 중 아주 빼어나신 분이 있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그런데 이분이 아가씨의 호위…….”
해리를 바라보며 속닥거리던 세 여인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왕도에서 유행하는 의미의 그 호위로 받아들인 거군.’
이것 역시 너무 익숙한 오해라, 나는 익숙하게 사실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 의미의 호위가 아냐. 해리 경은 정말 뛰어난 기사니까.”
“이름이 해리 경이셨군요.”
“저 은발, 제가 다듬어 드려도 될까요?”
“이분께는 어떤 색의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도무지 어떤 색을 골라야 할지 저로서는 전혀…….”
세 여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제대로 들어 준 게 고마울 정도였다.
[난 에스코트 같은 이야기 못 들었는데?]
세 여인의 목소리를 뚫고 해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당연히 못 들었겠죠. 지금 처음 말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멋대로 정하는 법이 어디 있어?]
[왜요? 파티에 가는 거 싫어요? 다른 사람하고 갈까요? 난 당연히 해리를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인간을 역겨워했다. 사람 많은 파티장은 당연히 싫을 것이다.
‘시장에 나갔다가 그 난리를 겪어 놓고는 또 깜빡했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달리 파트너를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가깝게는 공작이나 아치볼드가 있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음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가족의 에스코트를 받으면, ‘나는 아직도 어린애니까!’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절대 그렇게 보이고 싶진 않아.’
그렇다면 에렐에서 함께 온 기사들도 좋은 대안이었다. 특히 라이오넬은 귀족 출신이기도 하니 예법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었다.
[누가 안 간대?]
[하지만 사람 많은 곳 싫잖아요. 시장에서도 엄청 힘들어했고.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라이오넬이랑 같이 가면 되니까.]
내가 제안하면 라이오넬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오넬?]
해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어설픈 기사를 데려갔다간 망신만 당할걸.]
[요새는 어설픈 것도 많이 나아졌어요. 유피테르가 열심히 가르쳐 준 덕분에 제법 늠름한 기사 태가 난다고요.]
[아직 부족해.]
[하지만 데인과 리제토는 평민이라 예법을 새로 배워야 하거든요.]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답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라이오넬이 낫겠죠?]
[내가 같이 가 줘야지.]
나와 해리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해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데?]
[해리는 안 간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나는 재빨리 해리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정확하게 안 간다는 말은 안 했던 것 같았다.
[어…… 그런 말 안 했나?]
[안 했어.]
해리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해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라나도 결론을 내렸다.
“붉은색으로 하세요. 기사님의 눈동자가 붉은색이라,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붉은색으로 할게.”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아가씨. 기사님의 옷도 함께 맞추실 거지요?”
“음. 제복을 입고, 붉은색으로 포인트만 주면 어떨까?”
용기사를 제대로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옷이니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에선 제복을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해리에게는 제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뭐, 어떤 옷이 안 어울릴까 싶긴 하지만.’
“그렇다면 한쪽 어깨에 붉은 망토를 걸치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럼 치수는 아가씨만 재면 되겠네요. 오늘 잰 치수로 가봉을 하고, 파티 사흘 전에 다시 치수를 재서 몸에 꼭 맞는 아가씨만의 드레스를 만들 겁니다.”
내가 라나의 계획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와 데이지도 자신의 계획을 짧게 브리핑했다.
“저는 매일 와서 피부를 관리해 드리겠습니다. 등을 드러내셔야 하니까, 얼굴과 함께 보디 케어도 받으셔야 해요. 시간이 정말 촉박하네요.”
“저는 이틀에 한 번씩 오겠습니다. 특제 헤어 팩을 만들어 올 테니 기대해 주세요.”
“뭐? 그렇게 자주 오겠다고?”
내가 기겁을 하자 제니와 데이지가 엄격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 평소에 관리를 잘 해 주셨어야지요, 아가씨.”
“에렐에서는 완전히 관리에 손을 놓고 계셨죠?”
그랬다. 에렐에서는 이런 파티도 없고, 열심히 관리하고 꾸며 봐야 며칠 밤낮을 서류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리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
데이지가 그렇게 말하자 제니와 라나도 동의한다는 듯 빙긋 웃었다.
“저희가 아가씨를 최고의 레이디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세상에. 엠마 같은 사람이 셋이나 더 있었어.’
나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