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사의 말로는 그가 왕궁에서 돌아오자마자 벌써 세 시간째 아무도 들이지 않고 이곳,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어쩌면 나도 안 들여보내 줄지도 몰라.’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그럴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평소의 공작도 무서운데, 화난 상태의 공작은 또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겨 집무실 앞에 도착하니 어두운 표정의 보좌관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에렐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공작이 나를 찾아왔을 때도 함께 왔던 사람이었다.
‘이름을 모르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보좌관님? 경?
“아가씨?”
다행히 호칭을 고민하며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나를 보좌관이 발견했다.
“아버지 안에 계신가요?”
“예. 계십니다. 그런데…….”
보좌관이 난처한 얼굴로 집무실 안을 힐끗거렸다.
“분위기가 안 좋은가요?”
“예. 아주 많이.”
조금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이 안 좋다니.
‘이런 상황에 선물 증정식은 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버지께 드릴 것이 있어서요.”
내 말에 보좌관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 시제품으로 가져온 것이라 포장조차 안 되어 있는 투박한 상자였다.
“제가 전해 드릴까요? 지금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보좌관이 난처하게 웃었다.
‘아치볼드는 직접 달아 주라고 했는데.’
어차피 아치볼드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선물 증정 현장을 관찰하는 게 아니었다.
‘뭐, 선물을 준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직접 줬냐고 물으면 그때 사정을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치볼드도 이해할 것이다. 나는 결론을 내리고 보좌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안에 든 건 커프스단추인데…….”
내가 보좌관에게 선물과 함께 사용법을 대신 전하려는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지?”
열린 문 사이에서 공작이 나와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의 싸늘한 시선이 내 손, 정확히는 내가 보좌관에게 내미는 상자로 향해 있었다.
“아, 그게, 아가씨께서……”
“들어와라.”
보좌관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공작이 그의 말을 끊는 게 먼저였다.
“다행이네요, 아가씨.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함께 공작의 싸늘한 표정을 봐 놓고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공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아마 벽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책장 때문인 것 같았다. 심지어 책장에는 빈 공간도 없이 자료들이 빼곡했다.
“앉아라.”
공작이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는 내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나는 금방 집무실을 떠날 생각이라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에요. 이것만 드리고 돌아갈 거라서요.”
나는 공작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가 멀뚱거리며 상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받으세요?”
그렇게 물었는데도 공작은 말이 없었다.
‘받기 싫으신가?’
나는 머쓱해져서 슬그머니 상자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청요석으로 만든 커프스단추인데, 클린 마법을 각인한 거라 일할 때 입는 옷에 다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전히 공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대처를 할 거 아닌가? 하지만 공작은 내가 앞에 있는 걸 잊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방 안의 공기가 된 것 같은 이 기분.’
나는 점점 더 머쓱해졌다.
“어, 그러니까, 달아 드릴까요?”
나는 마지막으로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무시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질문한 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아치볼드는 내게 공작의 셔츠에 커프스단추를 직접 달아 주라고 말했지만, 공작이 거부하면 나는 방법이 없었다.
‘공작의 팔을 억지로 붙잡고 커프스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시도했고, 공작은 거부했다. 이 얼마나 깔끔한 상황 정리인가? 그러면 아치볼드에게 나는 그가 제시한 조건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런데 이번에는 공작이 대답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바라보자, 같은 말이 다시 한번 더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지금까지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면서. 다시 한번 흘러나온 말은 상당히 다급한 구석이 있었다.
“어…… 그러니까, 달아 달라는 말씀이시죠?”
공작이 고개를 끄덕여 내 질문에 긍정했다. 이렇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줄은 몰랐던 터라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자를 열었다. 커프스단추를 꺼내 공작을 바라보니 그가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내 앞에 있었다.
‘팔을 내밀어 줘야 이걸 끼우는데.’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신호를 줬는데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버지, 팔이요.”
“아.”
짧고 간단한 요청에 공작이 주먹을 쥔 채 양쪽 팔을 모두 내 앞으로 내밀었다.
“한쪽 팔만 먼저 주셔도 되는데…….”
“아.”
공작이 다시 짧은 침음을 흘리고 슬그머니 왼팔을 내렸다.
‘시중받는 게 안 익숙한가? 공작이면 매일 이런 시중 받는 거 아냐?’
그런 사람치고는 시중을 받는 자세가 너무 뻣뻣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고 공작의 셔츠에 커프스단추를 달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간단하게 해냈지만, 왼쪽은 단추가 제대로 결합이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잠겨?’
낑낑대는 내 모습을 보는 공작의 입매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이었다.
‘윽. 빨리빨리!’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내 머리 위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혼식을 한다는군.”
“누가요?”
그렇게 묻는 순간 겨우 단추가 부드럽게 결합됐다.
‘드디어!’
겨우 불편한 할 일이 끝났다.
“누가 약혼식을 하는데요?”
나는 큰 짐을 덜어 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왕세자.”
“어…… 캐서린 우드베르슨 양과요?”
“그래.”
두 사람의 약혼식이라면 원작의 중후반부에나 등장하는 사건이었다.
‘벌써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러간 모양이네.’
진짜 이브리아라면 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아직도 약혼을 안 했던가 싶을 정도라고.’
그러나 공작의 기분이 이처럼 저조한 이유가 더 있었다.
“약혼식 날짜가 네 생일 파티와 같다.”
“네?”
“벌써 왕도 곳곳에 안내문이 붙었다. 약혼식 날짜가 변경될 일은 없을 거다.”
“생일 파티는 애초에 날짜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왕세자의 약혼식과 공작 영애의 생일. 어떤 사람이라도 약혼식의 손님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제 생일 파티에는 손님이 거의 없겠네요.”
거의 없는 게 아니라 파티장이 텅텅 빌 것 같았다.
‘약혼식이 끝나면 축하연을 또 하게 되니까, 다들 거기에 갈 거야.’
우연히 겹쳤다기에는 너무 공교로웠다.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우리 쪽을 망신 주려는 거겠지.”
나는 그제야 공작의 기분이 나빴던 이유를 알아챘다.
‘오늘 왕궁에 가서 왕세자가 굳이 내 생일을 골라 약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구나.’
왕도의 귀족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그러니 어떤 집안에 어떤 행사가 있는지는 서로가 뻔히 알고 있었다. 참석할 손님들도 거기서 거기였다. 만약 파티가 겹치면 양쪽 모두 참석할 손님이 줄어 곤란해지므로, 서로 잘 피해서 잡는 게 예의였다. 우연히 파티가 겹치면 나중에 초대장을 발송한 쪽이 날짜를 바꾸는 게 불문율이었다.
우리 쪽은 이미 초대장을 발송했다. 왕실에도 분명 초대장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똑같은 날짜를 선택했다.
‘대놓고 엿 먹으라는 거네.’
국왕의 의견인지, 카시안의 의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엿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국왕이라면 이 기회에 오베론 가문의 기를 눌러 놓으려고 한 것일 테고, 카시안이라면 마정석 광산 개발이 완전히 날아간 복수일 것이다.
‘하지만 난 손님이 별로 없어도 괜찮은데.’
어차피 ‘내’ 생일이 아닌 이브리아의 생일이었다. 다들 성년이 되는 중요한 생일이라고 말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참 전에 성인이 된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소박한 생일 파티가 되겠네요.”
내 말에 공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실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뭐라고 할까, 얼음이 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질 때의 표정 같은 느낌인데.’
“……반응은 그게 전부인가?”
“전부인데요.”
“그게, 정말로 전부라고?”
“네.”
내 말에 공작의 입이 일자로 곧게 다물렸다. 또다시 그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손님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다.”
‘왕세자가 아니라 1왕자를 지지하는 쪽이라면, 약혼 축하 파티에서 빠져나와 내 생일 파티에 올 수도 있겠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빤히 쳐다보던 공작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위로하듯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공작도, 그 손길을 받고 있는 나도. 서로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공작이 금세 내 머리에서 손을 떼 나는 이 엄청난 어색함에서 생각보다 빨리 해방될 수 있었다.
“약혼식도 그들의 생각만큼 아름답게 치를 순 없을 거다.”
공작이 음산한 목소리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쪽 파티에 찬물을 끼얹었으면, 그쪽 파티에도 찬물을 부어 드려야 공평하겠지.”
싸늘한 공작의 목소리에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5도 아래로 내려갔다.
‘무서워…….’
역시 이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