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이오넬은 곧장 에렐로 날아가 라파쉬에게 내 편지를 전하고, 답장까지 받아 공작저로 돌아왔다.
라파쉬는 직접적으로 성검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도구는 처음 성검을 만들 때 세트로 만든 검집뿐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성검이 기본적으로 마법의 힘을 담고 있으므로, 마법을 감지하는 장치에는 반응할 수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 편지를 읽고 나는 불안함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검에 마법 반응이 있는 것만으로는 누구도 유피테르가 성검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법을 각인한 검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직접적으로 성검의 기운을 감지하는 도구가 드워프 마을의 검집뿐이라면, 내가 가진 단검이 성검인 것을 들킬 일은 없었다.
‘사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유피테르를 잠시 다른 곳에 맡겨두는 건데…….’
딱히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안개산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드워프 마을이 가장 좋은 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왕립 기사단이 안개산을 열심히 수색하고 있었다. 성검을 맡기러 갔다가 왕립 기사단에게 수상한 눈초리를 받으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었다.
‘우선 최대한 안 들키게 가지고 있다가, 의심을 받으면 해리 말대로 아니라고 우기는 수밖에 없겠네.’
단순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혹시 몰라 성검 이야기로 가득한 라파쉬의 편지를 벽난로에 넣어 태워 버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평범한 서랍처럼 보이지만, 안쪽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면 바닥이 열려 작은 공간이 나타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열쇠로 비밀 공간을 열어 그 안에 유피테르를 넣었다.
“유피테르, 상황이 이래서 한동안 가지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주인님. 떨어져 있는 것은 아쉽지만 주인님의 평안이 저의 가장 큰 기쁨이니까요.]
유피테르가 의젓하게 말했다.
[부디 제가 없는 동안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악마 놈은 눈치가 없고 다혈질이라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힘 하나는 확실하니 위험할 땐 그 곁에 꼭 붙어 있으시면 됩니다.]
“다시 꺼내는 날에 열심히 닦아서 광을 내 줄게요.”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군요. 저는 잠시 잠들어 있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건 아마 에렐로 돌아갈 때쯤이겠지.’
나는 유피테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비밀 서랍을 닫아 열쇠로 단단히 걸어 잠갔다.
* * *
다음 날 의외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오베론의 소공작이자 이브리아의 하나뿐인 오빠, 아치볼드였다.
아치볼드와 이브리아의 사이를 정의하자면, 뭐, 그냥 흔한 현실 남매였다. 서로의 존재는 인식하고 있지만 딱히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사이라고나 할까.
아치볼드는 이브리아가 무슨 사고를 쳐도 무심했다. 제 여동생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브리아가 살인 미수라는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사회가 발칵 뒤집힌 그 사건에서, 그는 캐서린의 편에도, 이브리아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약간 괴짜 같은 사람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어쨌든 결론은 이거였다. 아치볼드와 이브리아는 별일도 없이 찾아와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
“여동생, 너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어?”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대화 말이다.
“생일 선물…… 말인가요.”
약속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갑자기 생일 선물 타령이라니.
“그걸 물어보려고 오신 거예요?”
“그래. 곧 네 생일이잖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줘. 네 생일 선물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기긴 싫거든.”
아치볼드가 길게 하품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갖고 싶은 걸 목록으로 정리해 주면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선물하면 되겠지.”
“목록으로 정리해 달라니…….”
뭐, 이런 건가? 저는 생일 선물로 아래의 품목 중 하나를 원하오니, 검토 후 결재 부탁드립니다. 기안자, 이브리아 오베론. 결재자, 아치볼드 오베론.
‘무슨 품의서 쓰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누가 이런 식으로 선물을 줘?’
아무튼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오라버니께서 주고 싶은 걸 주시면 돼요. 선물은 뭘 받아도 기쁘니까요.”
“아니. 난 목록이 필요해.”
아치볼드가 나른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선물 때문에 미결재 서류가 쌓이고 있어. 그 서류가 다 어디로 가겠어?”
애초에 내 선물 때문에 미결재 서류가 쌓이는 이유도 모르겠는데, 그 서류가 어디로 가는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글쎄요……?”
“바로 나다.”
아치볼드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집사가 울면서 내게 서류를 가져온다고. 그걸 대신 처리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사라졌어. 덕분에 나는 사흘째 진도를 못 나가고 있고.”
어쩐지 위로를 해야 할 타이밍 같았다. 나는 내 직감을 믿고 아치볼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 그거 참 안됐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목록을 정리해 줬으면 해. 최소 30개 이상으로, 웬만하면 왕국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네? 30개나요?”
“그 정도는 돼야 충분히 네 생각을 알게 됐다고 생각할 분이시라서.”
아치볼드가 질린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그 목록은 아치볼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게 될 모양이었다.
‘이브리아의 생일 선물로 고민할 만한 아치볼드 주변 사람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딸의 생일 선물로 뭘 줘야 할지 몰라 끙끙대는 공작이라니. 상상이 안 된다.
‘뭐, 나야 목록을 받을 사람이 누군지는 상관없으니까.’
“제가 목록을 채워 주면 뭘 해 주실 건데요?”
내 질문에 아치볼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뭔가를 해 줘야 하나?”
“당연하죠. 부탁을 할 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넌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겠지.”
“전 어떤 선물을 받든 상관없어요. 굳이 목록을 작성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아치볼드는 빠르게 내 의도를 알아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목록을 받고 싶으면 대가를 달라?”
“뭐, 그런 이야기죠.”
잠시 고민하던 아치볼드가 곧 결론을 내렸다.
“좋다. 목록의 대가로 뭘 받고 싶지?”
“오라버니의 하루요.”
“……뭐?”
“오라버니의 하루를 제게 주세요. 그럼 목록을 작성해 드릴게요.”
* * *
현재 청요석의 납품처는 단 두 곳. 왕실과 마법사 협회뿐이었다. 마법사 협회는 가격 협상으로 장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왕실에 납품한 건 단발성 계약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청요석 거래처가 마법사 협회 한 곳뿐이라는 소리였다. 엄청난 물량의 납품을 장기로 계약해 줬으니 이보다 고마운 거래처가 없었다. 단발성 계약이지만, 왕실도 엄청난 양의 청요석을 주문했다. 한 번에 그 물량을 맞출 수가 없어 아직도 바쁘게 작업장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래처 수가 적은 건 너무 위험했다.
‘어쩌다 거래가 틀어졌을 때 우리가 받는 타격이 너무 커.’
100개의 거래처 중 한 곳과 틀어지는 것과 10개의 거래처 중 한 곳과 틀어지는 것. 당연히 후자의 타격이 훨씬 크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청요석을 판매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거래처를 보유해야만 했다. 그래서 인세티아 남작이 왕도에서 새 판로를 개척해 오라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청요석을 홍보하고 거래처를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내 악명 때문이었다. 살인 미수 사건에 이은 왕세자와의 파혼으로 왕도에서 내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그런 사람이 파는 물건? 그게 무엇이든 별로 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청요석을 판매할 때도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 모든 거래는 에렐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그 뒤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에렐에서 가까운 지방 귀족들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에렐에서 멀리 떨어진 왕도 귀족들은 아직도 인세티아 남작이 에렐 영주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내가 에렐에서 영주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식으로 임명식을 하고 왕실에 등록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왕실의 공식 서류를 살피면 아직도 인세티아 남작이 에렐의 영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영주와 실질적인 영주를 따로 두는 것. 귀족들이 자신의 후계자를 교육할 때 많이 쓰는 방법이었다. 실질적인 영주인 후계자가 영지 운영상의 실수를 해도, 그 벌은 공식적인 영주가 받게 되어 있었다. 이를 에렐에 적용하면, 실질적인 영주는 나이고, 공식적인 영주는 인세티아 남작이었다.
‘내가 영주로서 잘못을 저질러도 그걸 전부 인세티아 남작이 뒤집어쓴다는 뜻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세티아 남작이 이런 역할을 받아들인 것이 신기했다.
‘나라면 절대로 맡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이 한 짓 때문에 내가 벌을 받는 건 역시 억울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내가 직접 나서서 청요석을 홍보하고 판로를 개척하는 건 어려웠다. 나를 대신해 내세울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오베론 소공작 아치볼드라면, 아주 효과가 좋겠지.’
나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는 아치볼드를 바라보았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옷에 에렐에서 가져온 청요석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브로치 가운데 장착된 청요석은 오베론 가문의 문장 형태로 가공했다. 섬세한 작업이지만, 라파쉬는 어렵지 않게 해냈다.
“생각했던 대로예요. 역시 잘 어울려요.”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내 칭찬에도 아치볼드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아침 일찍 들이닥쳐서는 갑자기 이게 뭐지?”
“오라버니의 하루를 제게 주기로 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내 하루를 주는 것과 이렇게 꾸미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
“엄청난 연관성이 있죠.”
나는 눈에 졸음을 담고 있는 아치볼드에게 5개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파티 초대장이에요. 오늘 오전부터 밤까지 아주 다양한 파티가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오라버니께서 여기에 참석해 주시면 돼요. 그럼 제가 드릴 생일 선물 목록의 대가를 지급하시는 거예요.”
“뭐?”
아치볼드가 내 손에서 봉투를 가져가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하루를 가득 채운 파티 초대장들이었다.
“오라버니의 24시간을 모두 써야 합당한 거래지만, 관대함을 발휘해 딱 12시간만 오라버니를 받을게요.”
“퍽이나 관대하구나.”
아치볼드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제 품속에 초대장을 우겨 넣었다.
“하루에 파티 5개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여러 파티가 겹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선별해 그곳에만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 머무르진 않으셔도 돼요. 파티장을 두어 바퀴 정도 돌고 나오시면 충분해요.”
“더 있고 싶어도 시간이 이래서야 그럴 수도 없어.”
아치볼드의 말이 맞았다. 파티 장소 사이의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한 파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한 시간 정도였다.
“파티에 참석만 하면 된다는 거지?”
“네. 조건이 두 개 더 있지만요.”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뒤에 서 있던 해리를 가리켰다.
“조건 하나는, 이 사람과 함께 다니는 거예요.”
“제대로 파티에 참석하는지 감시하는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꽃다발 효과를 노리는 거죠.”
“꽃다발?”
“예쁜 꽃이 같이 모여 있으면 더 예쁘게 보이니까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해리와 절로 미소가 나올 정도로 훈훈한 아치볼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길을 걸으면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에렐의 청요석을 홍보해 줄 대단히 훌륭한 모델들이지.’
내가 눈짓으로 신호하자 해리가 아치볼드의 뒤에 섰다. 해리는 용기사단의 새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가슴팍에도 아치볼드가 한 것과 같은 청요석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역시, 그림이 훌륭했다.
“두 번째 조건은 뭐야?”
“그건…….”
나는 아치볼드와 해리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에서 은은하게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꽃에는 향기가 필요하죠. 파티 내내 이 브로치를 활성화한 채로 있어 주세요. 제 조건은 그게 끝이에요.”
은은한 향기의 정체는 브로치에 각인한 마법이었다.
‘유피테르가 가진 악취 제거 마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는 사람의 호감을 불러온다. 그래서 귀족들은 대부분 비싼 향유로 목욕을 하거나 강한 향수를 뿌렸다. 하지만 그런 향기는 일시적이었다. 유지 시간이 반나절도 되지 않아 쉴 새 없이 향수를 뿌려 대거나, 아주 강한 향수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청요석 브로치에 각인한 마법은 다르다. 청요석의 힘이 다할 때까지 같은 향기를 오랫동안 계속 발산할 수 있었다. 각인할 향기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이 가능했다. 우선 아치볼드의 것에는 시원한 숲의 향기를, 해리의 것에는 비누 향기를 각인해 두었다.
‘마도구를 이렇게 하찮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마도구는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다. 고작 몸에서 향기를 내는 데 그렇게 비싼 돈을 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법사 협회에 청요석을 조금 싸게 판매하는 대신, 마법 각인 비용을 할인받기로 협약을 맺었다. 게다가 청요석도 자체 생산 중이니 파격적인 가격으로 향기 나는 브로치 제작이 가능했다.
‘드레스 다섯 벌 가격이면 충분히 이 브로치에 지갑을 열 거야.’
아치볼드가 내게 지불할 진짜 대가는 이 브로치의 홍보였다. 따로 호객 행위를 할 필요도 없었다. 아치볼드와 해리가 이 브로치를 달고 몇 개의 파티장을 활보하고 나면, 게임은 끝이었다.
‘다들 향기 나는 브로치를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