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156)

* * *

‘평소랑은 좀 다른데?’

나는 하늘 위를 자유자재로 노니는 와이번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와이번은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곡예를 선보이고 있었다.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고, 위아래를 뒤집고, 거기에 5연속 회전까지.

‘밑에서 보기에는 참 좋은데…….’

와이번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제대로 멀미를 할 것 같았다. 악마가 멀미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해리는 예외로 치더라도, 엘은 땅에 내려오자마자 구토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대단한 기사여도 공중에서 저렇게 빙빙 돌면 못 견딜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번에는 와이번이 급격히 속도를 높이며 아래로 수직 강하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면 가까이 날아온 와이번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날갯짓으로 땅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마침내 착륙.

“이야, 정말 훌륭한 비행이었습니다.”

해리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와이번 위에서 내려왔다. 그에 비해 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내 예상대로 심하게 멀미했는지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란빛을 띄고 있었다.

“로이츠 경,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엘이 그렇게 말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땅에 발을 디딜 때는 잠시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나는 이 사태의 원흉인 해리를 슬쩍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해리의 심술이었다.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해리는 딴청을 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많이 어지러우실 거예요. 잠시 차 한잔 하면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다시 왕궁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왕궁이요?”

나는 극구 티타임을 사양하는 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대훈련장에 나타날 때도 기사단 일이 지체되어 약속에 늦었다고 했다.

“기사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기밀이라 말하기 힘들다면 그러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이미 주요 귀족들 사이에는 퍼진 이야기라, 오베론 공작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고…….”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조금 사정이 나아진 엘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평소와 비슷한 혈색이 되어 있었다.

‘역시 엄청난 실력자라 회복도 빠르구나.’

“혹시 안개산에 꽂혀 있는 성검에 대해 아십니까?”

엘의 말에 심장이 덜컥했다.

‘그냥 잘 아는 게 아니라, 그걸 내가 뽑았는데요.’

나는 진실을 속으로 삼키며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당연히 들어 봤죠.”

“그 성검이 뽑혔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모르는 척 감탄성을 흘렸다.

“그건 아무도 못 뽑는다고 들었는데요.”

“예. 다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안개산을 찾은 도전자가 이미 성검이 뽑히고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는 사라진 성검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성검을 뽑은 사람도 함께요.”

“힘들겠네요.”

나는 적당히 동조하며 엘의 안색을 살폈다.

성검이 뽑힌 것은 충분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아무리 뽑으려고 시도해도 꿈쩍하지 않던 검이 뽑혔으니, 엄청난 관심사겠지. 하지만 고작 그거 아닌가? 어째서 왕립 기사단이 성검과 성검의 주인을 추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왕립 기사단이 왜 성검을……?”

슬쩍 건넨 질문에 오히려 엘이 이상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성검의 전설에 대해 모르십니까?”

“전설이요? 그냥 그게 잘 안 뽑힌다는 것밖에는…….”

나는 말끝을 흐리며 해리를 쳐다보았다. 혹시 그라면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리 역시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이 제가 아는 전부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왕실에 가깝지 않은 자라면 모를 수도 있겠죠. 이건 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엘이 곧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성검은 제레인트의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검과 제레인트의 왕이요?”

제레인트의 시조, 초대 왕 에프론이 성검을 뽑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성검을 뽑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갔다. 해리가 옆에서 지켜봤다고 했으니 확실했다.

‘초대 왕이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성검을 뽑지 못했습니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건 아닐 테고.’

의아해하는 내게 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성검은, 곧 제레인트의 왕위 계승을 의미합니다.”

“네?”

뭐라고요? 왕위 계승? 그게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와?

* * *

왕실에 전해지는 성검의 전설은 이러하다.

오래전, 왕국의 위대한 시조이자 용맹한 초대 왕, 에프론 제레인트는 안개산에 꽂힌 성검을 뽑는 데 성공한다.

[나는 성검의 주인, 위대한 왕이 되어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가져올 에프론 제레인트다!]

제레인트의 시조는 성검을 하늘 높이 들어 만천하에 자신이 성검의 주인임을 알렸다. 태양 아래에서 고귀한 성검의 길고 유려한 검신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러나 나는 검으로 나라를 세우지 않겠다. 인의와 신의, 나의 무기는 그것이니. 이 검은 나의 후손을 위하여 남겨 둘 것이다.]

에프론 제레인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뽑았던 성검을 다시 바위에 꽂아 넣었다.

[후손들이여, 이 검을 뽑아라. 만약 나를 이어 이 성검을 뽑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자는 건국왕 에프론 제레인트의 재림으로,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아 새 번영의 시대를 가져올 태양왕이 될지니!]

그리하여 건국왕은 위대한 성검을 스스로 안개산에 놓아두고 의연히 하산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와. 완전 새빨간 거짓말.’

에프론 제레인트는 성검을 뽑았다가 다시 돌려놓은 게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검을 뽑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성검이 장검이 아니라 단검인 것도 몰랐지.’

태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길고 유려한 검신이라니. 진짜 성검을 봤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묘사였다.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엘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상황을 전했다.

“왕실은 그 전설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검을 뽑는 자에게 1순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고 있지요.”

“고작 검 하나 뽑았다고, 1순위 왕위 계승권을요?”

“그 검이 성검이니까요.”

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성검의 의미가 큰 것 같았다.

“그럼 왕립 기사단이 성검의 주인을 찾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그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1순위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면 왕위를 노리는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되니까요. 우선 성검이 있던 안개산부터 수색하고 있습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산에 무단 투기된 쓰레기가 있어서, 그게 위험하게 땅에 꽂혀 있기에, 다른 사람도 나처럼 걸려 넘어질까 봐 치워 주려고 한 죄밖에 없는데. 1순위 왕위 계승권이요? 목숨을 노려?

머릿속이 빙글 돌았다.

* * *

나는 탁자 위에 올려 둔 유피테르와 그 옆에 태평하게 선 해리를 노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손에는 성검을, 왼손에는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를.

어쩌다 보니 제레인트 건국왕의 풀 세트를 가지게 됐다.

‘난 이런 거 바란 적 없는데.’

내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귀족의 딸로 호의호식 한번 하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그거 하나 들어주기가 그렇게 힘들었냐!’

입에 주먹을 넣고 오열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안 들켜.”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달리 해리는 무척이나 태연했다.

“걔들은 성검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잖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검을 어떻게 찾겠어?”

“예전에 드워프들이 성검에 반응하는 검집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왕립 기사단도 그런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죠.”

설마 왕립 기사단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작정 수색에 나서지는 않을 거다. 분명 자신들만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게 있으면 오작동한 것 같다고 잡아떼. 걔들도 너 같은 어린 여자애가 성검을 뽑았다고는 생각 못 할 거 아냐?”

“잡아떼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잖아요.”

이건 아무리 봐도 아닌 일이다.

“유피테르는 어떻게 생각해요?”

[드디어 제게 물어봐 주시는 거군요. 언제 나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유피테르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뭔가 알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 저의 기운에 반응하는 도구는 드워프 마을에 있는 검집뿐입니다. 더 확실하게 하려면 드워프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 당사자에게 묻는 방법이 있었다.

“당장 리쉬에게 편지를 보내야겠어요.”

나는 재빨리 책상 위에 앉아 라파쉬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들었던 황당한 이야기와 함께 걱정스러운 부분에 대한 조언까지 요청하니 금세 편지지가 가득 찼다.

나는 완성한 편지를 봉투에 넣어 봉하고, 종을 울려 엠마를 불렀다. 원래 완성한 편지는 책상 위의 쟁반에 올려 두면 매일 아침 엠마가 수거해 발송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가씨?”

내 부름에 빠르게 응답한 엠마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가, 심각한 내 얼굴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요?”

“아냐. 급하게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이걸 라파쉬에게 보내 줄래?”

“라파쉬 님에게요? 많이 급하신 거라면, 라이오넬 경에게 부탁해 볼까요?”

엠마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라이오넬 경에게?”

“네. 우편으로 보내면 주고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라이오넬 경이 와이번을 타고 에렐에 다녀오면, 오늘,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라파쉬 님의 답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었다. 라이오넬을 에렐로 보내 라파쉬에게 편지를 전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답장을 받아 돌아오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엠마.”

“예, 아가씨.”

“왜 하필 라이오넬 경이야?”

“예?”

“아니, 그렇잖아. 와이번을 탈 수 있는 사람이 라이오넬 경만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왕도에 온 용기사단이라면 데인과 리제토도 있었다.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 해리가 있지 않은가?

‘이런 건 보통 눈앞에 있는 사람을 먼저 말하게 되지 않아?’

하지만 엠마는 제일 먼저 라이오넬을 지목했다.

“특별히 라이오넬 경을 떠올린 이유가 뭐야?”

나는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시선에 엠마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기사분들 중에서는 라이오넬 경이 아가씨와 가장 가까우시니까…….”

“난 여기 있는 해리와 가장 가까운데?”

“해리 경은 아가씨의 호위니까요. 24시간 곁에 붙어서 안전하게 아가씨를 호위해야죠. 편지 심부름 같은 잡다한 일은 라이오넬 경이 딱이에요, 네.”

엠마가 눈을 굴리며 열심히 변명을 쏟아 냈다.

‘로맨스는 내가 아니라 이쪽에서 쓰고 있었군.’

나는 필사적인 엠마를 보며 이쯤에서 속아 넘어가 주기로 결정했다.

“뭐, 듣고 보니 그렇네.”

“역시 그렇죠?”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가 반색하며 동조했다.

“그럼 전 부탁하신 편지 라이오넬 경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엠마가 내 손의 편지를 낚아채듯 빠르게 가져가 설레는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봄이로구나, 봄이야.”

[그렇습니다. 봄이네요.]

흐뭇하게 웃으며 엠마의 로맨스를 응원하는 나와 유피테르에게 해리가 물었다.

“갑자기 웬 봄 타령이야?”

눈을 껌뻑이는 해리를 보며 나와 유피테르가 차게 식었다. 이 녀석, 정말 눈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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