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생일
예상했던 것처럼, 카시안은 해리에게 호되게 당했던 그날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해리를 찾아내 왕족 폭행죄로 처벌하는 것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의 18번째 생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성대한 파티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오베론 저택은 벌써부터 떠들썩했다. 파티장이 될 대연회장에는 벌써부터 다양한 장식품들이 쉴 새 없이 옮겨지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참석자들의 명단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사람은 초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제외하는 것. 파티를 주최하는 호스트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능력이 꽝이지.’
나는 왕국의 모든 귀족 가문의 가계도가 실려 있는 귀족 도감을 뒤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도 적, 저 사람도 적.’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뿐이니 도무지 누구를 초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브리아, 너 과거에 왜 이렇게 막 산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귀족 도감의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친분으로 가르면 초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겠어.’
나는 결국 지위와 명성에 따라 참석자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베론 가문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받는다면, 아무리 나와 사이가 나쁘더라도 참석은 할 것이다. 그러면 파티장이 그렇게 썰렁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꼭 왕도 귀족들만 초대해야 하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초대장을 받을 사람 목록에 슬그머니 인세티아 남작과 나타 백작의 이름을 집어넣었다. 드워프인 라파쉬도, 인간의 신분을 따르지 않는 이종족이니 어떻게 가능할 것 같았다.
‘라파쉬에게는 다른 드워프들도 함께 초대하고 싶다고 전해야지.’
기사들도 문제없었다. 아무리 평민이라도 영지의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 준귀족으로 대우받았다.
‘우리 훌륭한 와이번들도 초대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대연회장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질 테니, 안타깝지만 제외였다.
‘그런데 캐서린의 물고기들은 어쩌지?’
루크는 뒷세계의 사람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나머지 인원들이 문제였다. 왕세자인 카시안, 1왕자 리던, 왕립 기사단장 엘, 재상 메이슨에게는 예의상으로라도 초대장을 보내야 했다.
‘그건 캐서린에게도 마찬가지고.’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생일 파티인데, 왜 이렇게 피곤한 사람들 이름이 많이 보이는 건지.
‘그냥 에렐에서 파티하고 싶다.’
에렐에서 생일 파티를 한다면 이런 격식은 신경 쓰지 않고 저택 사람들 모두 어울려 한바탕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야외 정원에 자리를 만든다면 훌륭한 우리의 와이번들도 한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생일은 매년 돌아오는 거니까.’
성년식의 생일은 왕도에서 하는 게 관례였다. 왕도에 저택이 없는 지방 귀족은 먼 친척의 집을 빌려서라도 파티를 열었다. 귀족 가문의 아이가 진정한 어른으로서 사교계에 소개되는 날. 그날은 국왕도 짧은 시간이나마 참석해 앞날을 축복해 주고는 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평생 왕의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지방 귀족들은 그걸 평생의 영예로 여겼다.
나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 찬 초대장 목록을 대충 마무리하고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서랍 속에는 어제 받은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발신인은 왕립 기사단장, 엘 로이츠였다.
그는 용기사들의 데뷔가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을 축하한다며, 실례가 되지 않으면 완성한 용갑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부탁해 왔다. 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부탁이었다. 와이번에게 갑옷을 입혀 기사를 태우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처음 낸 사람이 그였으니까.
‘아마 엘이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용기사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아직 엘이 내게 빌려준 마갑 도감을 돌려주지 못했다.
‘혹시 몰라서 왕도에 가져왔는데. 역시 돌려줄 기회가 있을 줄 알았어.’
나는 엘에게 기꺼이 그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오래 지나지 않아 괜찮은 날짜와 시간을 묻는 편지가 왔고, 내가 적당한 날짜와 시간을 몇 가지 제의하자, 엘이 그중 하나를 골라 약속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성사된 방문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나는 마갑 도감을 챙겨 약속 장소인 대훈련장으로 향했다. 총 세 마리의 와이번 중 두 마리는 정원에서 휴식 중이었고, 남은 한 마리를 엘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와이번을 탈 사람은 해리였다. 왕국 최고의 기사에게 어설픈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최고의 기수가 나서기로 한 것이다.
대훈련장에 다다르니 해리가 먼저 도착해 와이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기도 우스웠다. 해리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와이번은 고개를 젓거나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와이번과 대단한 교감을 하고 있는 줄 알겠지.’
게다가 해리는 그림이 좀 된다. 스쳐 지나가면서 힐끗 보기만 해도 멋진 용기사였다. 해리가 대훈련장에 나타난 탓인지, 근처를 배회하는 하녀들의 수가 부쩍 많아졌다.
‘역시 내 개는 참 잘생겼다니까.’
다들 내 개를 예뻐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해리를 구경하는 하녀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하녀들이 뭔가 음산한 기분을 느낀 것처럼 흠칫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 아, 아, 아가씨!”
“저, 저, 저,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요, 요, 요, 용서해 주십시오!”
하녀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에게 사죄했다. 너무 익숙한 반응이라 이젠 억울하지도 않았다.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무표정한 얼굴이 덜 무서웠다. 그러자 안심한 하녀들이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저 멀리 사라졌다.
덕분에 해리를 구경하던 하녀들로 가득하던 대훈련장 근처가 텅 비어 버렸다.
‘음. 의도치 않게 해리를 독점하게 됐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나는 웃으며 해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 악역 미소에도 별 감흥이 없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해리!”
내 부름에 와이번과 이야기를 나누던 해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훈련을 한 모양인지 그의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훈련했어요?”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악마 해리는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훈련이라기보다는, 가벼운 놀이?”
해리가 와이번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하늘에서 짧게 대련을 했지.”
그 말에 와이번이 ‘끼유-’ 하고 불쌍하게 울었다. 말이 대련이지, 일방적인 샌드백 노릇을 한 게 틀림없었다.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같이 논 거라니까.”
“해리 입장에서나 그렇겠죠.”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으로 젖은 해리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해리가 투덜거리며 내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갔다. 손수건을 쥔 해리의 손끝이 붉었다.
‘해리는 손도 예쁘네.’
길고, 하얗고, 그렇지만 연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왜 쳐다봐?”
내가 빤히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해리가 제 손을 슬그머니 손수건으로 감쌌다.
“치사하네요. 보면 닳는 것도 아니면서.”
“치사할 정도야?”
“난 내 손 마음껏 보게 해 주잖아요.”
나는 해리에게 내 손을 쭉 내밀었다. 가늘고 긴 편이라 형태는 봐줄 만했지만, 튼튼해 보이는 해리의 손과 달리 어딘가 파리하게 느껴졌다.
“난 네 손 보고 싶다고 한 적 없거든.”
해리가 투덜거리면서도 내 손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성의 없게 내 손을 들여다보던 해리가 곧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덥석 잡았다.
“뭐냐, 이건?”
“너무하잖아요. 사람 손을 보고 이건 뭐냐니요.”
“이게 사람 손이야? 창백해서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
해리가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내 손을 살폈다. 손가락도 하나씩 만져 보고, 손톱도 모양을 따라 훑었다.
“너 요즘 밥을 제대로 먹긴 해?”
“그럼요. 주는 대로 잘 챙겨 먹어요.”
“주는 것만 먹지 말고 네가 먼저 달라고도 해.”
“그냥 주는 것만 먹어도 엄청 많은데요.”
공작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공작과 아치볼드를 기준으로 돌아갔다. 식사량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는 매 끼니마다 배가 터져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살도 쪘을 거야.’
에렐의 추위를 견뎌 내느라 조금 빠졌던 살이 다시 원상 복귀한 것 같았다. 에렐에서 입었던 옷이 조금 끼는 기분이었으니까 확실했다.
“살이 쪄서 큰일이에요.”
식사량을 예전처럼 줄이면 될 일이지만,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역시 공작저의 주방장은 달라.’
왕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라고 했다. 나를 위해 애써 주는 에렐의 주방장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이쪽의 음식은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살이 쪄? 네가?”
해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 내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말 그대로, 번쩍. 두 다리가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나를 들어 올린 해리가 기가 차다는 듯 보았다.
“아직도 이렇게 가벼운데?”
“기준이 너무 관대한 거 아니에요? 해리가 못 들어 올릴 정도로 살이 찌려면 와이번보다 훨씬 더 무거워야 할 텐데.”
그렇게 해리의 손에 들려 허공에 동동 떠 있는 내 뒤로 약속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오베론?”
엘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해리가 눈만 돌려 내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내려 줘요.”
내가 가볍게 발버둥치자 해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역시 두 발이 땅에 닿는 게 안정적이지.’
나는 두어 번 발을 굴러 땅의 감각을 느낀 뒤, 엘을 향해 돌아섰다.
“로이츠 경,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기사단 일정이 지체되어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요.”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훈련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엠마가 서 있었다.
‘왜 엠마가 여기?’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껌뻑이는데, 엠마가 내게 찡긋 윙크하더니 입을 크게 벌려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천천히 엠마의 입모양을 따라 읽었다.
아, 가, 씨, 로, 맨, 틱, 성, 공, 적!
‘엠마, 아직 내 로맨스를 포기하지 않은 거니?’
왕자님과 기사님을 오가며 열심히 내 로맨스를 응원하는 엠마를 보고 있자니 눈이 흐려졌다.
‘엠마, 둘 다 나하고 로맨스를 하긴 글렀어.’
이미 캐서린의 어장에 풍덩 빠져 버린 물고기들과 무슨 로맨스를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흠.”
함께 엠마를 바라보고 있던 엘도 나처럼 그녀의 입모양을 읽어 내렸는지, 민망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죄송해요. 제 하녀가 좀 소녀다운 면이 있어서. 로맨스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로이츠 경한테만 저러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하고도 전부 엮으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내 말에 엘이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눈을 굴리던 그가 할 말을 정한 듯 입을 떼는데, 해리가 더 빠르게 치고 나왔다.
“해리입니다. 에렐의 서리 기사단, 최근에는 용기사단으로 불리고 있죠.”
해리가 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보니 해리가 이 모습으로 엘을 만나는 건 처음인가?’
이렇게 상대에게 예의 바르게 나오는 해리의 모습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참, 해리는 엘에게 호감이 있었지.’
엘처럼 강한 인간은 재미있다고, 재미있는 게 좋다고 말했었다.
‘그럼 엘도 다른 인간처럼 역겹지 않은 건가?’
먼저 악수를 청한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왕립 기사단장 엘 로이츠다.”
엘이 해리의 손을 맞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해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은발에 붉은 눈.”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래 이어지던 대치는 엘의 목소리와 함께 마무리됐다.
“당신을 본 적이 있어.”
“그럴 리가요.”
무덤덤한 폭탄 발언에 해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해리를 어디에서 봤다는 거야? 설마 해리의 모습을 남긴 기록 같은 게 있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사진 같은 게 있는 세계도 아니고, 나라가 건국되던 그 시기 해리의 모습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은발의 붉은 눈이 흔하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게 성가신 성냥으로 격하되기는 했으나, 사실 그는 악마 테오하리스였다. 왕립 기사단장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일이 그냥 귀찮은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조금 긴장한 기분으로,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엘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초조한 나와 달리 엘은 동요 하나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입을 뗐다.
“그림이 남아 있거든.”
“그림?”
“젠 로이츠.”
익숙한 이름에 해리의 입매가 굳었다.
“내 선조께서 그림을 잘 그리셨지. 집안에 그분의 그림이 남아 있고.”
잠시 생각하던 엘이 해리에게 물었다.
“대마법사의 후손인가? 그림 속의 그 남자와 닮았군.”
엘의 질문에 긴장이 탁 풀렸다.
‘그렇지.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
오래된 그림에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과 꼭 닮은 얼굴을 발견한다면, 그림 속의 사람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제레인트의 시조는 해리가 악마라는 걸 누구에게도 안 밝혔어. 과거의 해리는 모두에게 위대한 대마법사로 기억되고 있지.’
건국 신화 속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가 악마라는 사실만 알려지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과거의 그림 때문에 해리의 정체가 탄로 날 일도 없었다.
“뭐, 제 선조께서 마법을 쓰긴 하셨죠.”
해리가 그렇게 대답하며 악수하던 엘의 손을 놓았다.
“와이번 타는 모습을 보러 오셨다고요?”
“그렇다.”
엘이 여전히 해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해리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와이번을 가리켰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건 재미없지 않습니까? 한번 타 보시죠.”
해리의 시선 돌리기가 성공했는지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엘의 눈이 와이번으로 향했다.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왕립 기사단장님 정도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해리의 시선을 받은 와이번이 길게 울며 날개를 흔들었다. 거대한 모래바람과 함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괜찮겠습니까?”
엘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하고 있는 내게 물었다.
“원하신다면요. 그런데 대부분은 안 원하시더라고요.”
와이번은 지붕이 없는 비행기와 비슷했다. 라파쉬가 만든 안장에 안전벨트 역할을 하는 장치가 있긴 했지만, 말이 안전벨트지 추락하면 소용이 없었다. 추락과 함께 머리가 깨져서 즉사. 즉사가 아니라면 반신불수가 유력했다.
‘우리 와이번들은 자기 등에 탄 사람을 거칠게 집어 던지지 않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설명해도 못 미더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인세티아 남작이 그렇지.’
그는 아무리 와이번이 안전하다고 말해도 절대 위에 올라타지 않았다. 소중한 자기 목숨을 이런 불확실한 이동 수단에 맡길 수 없다나? 자신이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는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전 제일주의인 인세티아 남작과 달리 모험을 즐기는 부류도 있는 법.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용감한 왕립 기사단장님은 기꺼이 와이번 위에 올라타기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조종은 힘듭니다. 제가 앞에 앉아 조종하죠.”
오늘따라 친절한 해리가 앞장서서 와이번 위에 올라타자, 엘 역시 가벼운 동작으로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와! 우리 기사들은 올라타는 것만 한 달을 연습했는데.’
해리의 동작을 보자마자 바로 따라 하는 게 엄청난 실력자다웠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해리가 그렇게 외치며 씩 웃었다.
‘어째 불안한데.’
나는 알고 있었다. 해리가 저런 식으로 웃을 때면 속에 이상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걸.
나의 불안함과 함께 와이번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