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156)

* * *

수많은 사교계의 초대장을 거절한 대신, 나는 왕도의 거리를 탐방하기로 결정했다.

‘유행은 확실히 왕도가 빠르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왕도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엠마의 도움을 받아 평민들이 입는 옷을 차려입고 해리와 함께 외출에 나섰다. 해리도 용기사단의 제복을 벗고 평범한 평민 청년처럼 옷을 갖춰 입었다.

저택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썩 훌륭한 위장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해리의 외모에 입을 떡 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내가 어떻게 이 얼굴을 간과했지?’

이 얼굴은 어디에 서 있어도 단번에 눈에 띌 외모였다. 매일 보다 보니 너무 익숙해져서, 그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나는 해리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주변을 지나가는 남자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 번을 봐도 오징어였다. 그 사이에서 해리는 아무리 봐도 평민들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위장하고 나온 귀족 도련님처럼 보였다.

‘진짜 귀족인 나는 하녀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흔한 적갈색 머리를 질끈 묶고 엠마의 옷을 빌려 입은 나는 평범한 사람들 틈에 제법 잘 섞여 들었다. 아마 해리가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왕도 탐방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해리 때문에 다 망했어요. 이렇게까지 잘생길 건 뭐예요?”

“얼굴이 잘생기면 어디든 쓸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쩔 수 없지. 그냥 평민으로 위장한 귀족 나리를 모시는 하녀 행세나 해야지.’

해리에게 시선이 쏠린 덕분인지 상대적으로 내게는 관심이 덜했다.

‘덕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오히려 잘된 건가?’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며 거리를 살폈다. 에렐의 시장도 활발했지만, 왕도의 시장은 그와 비교하기 힘든 활기가 있었다.

‘우선 사람 수부터 다르지.’

에렐의 10배 정도일까?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활기찬 대도시는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정신 사납기는 해도, 가끔은 이런 분주함을 즐기고 싶은 법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팔고 있는 물건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에 더 많이 눈길을 두는지, 어떤 물건에 주머니를 여는지.

‘단순히 짐작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관찰하는 쪽이 더 확실하지.’

원래도 나는 사람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휴일에는 커다란 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의 인생이나 사연을 상상하는 놀이를 했었다. 하지만 즐거운 나에 비해 해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영 괴로운 눈치였다.

“토할 것 같아.”

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야 해리가 인간을 역겨워한다는 걸 떠올렸다.

“괜찮아요? 잠깐 골목으로 들어가서 쉴까요?”

“됐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해리랑 같이 쉬고 싶어요. 됐죠?”

나는 해리의 팔을 잡아끌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해리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온 뒤에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많이 힘들어요?”

나는 벽에 기대 눈을 감은 해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같이 와 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힘들어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말했으면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왔을 거예요.”

라이오넬에게 부탁했다면, 잔뜩 신이 나서 나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게 싫어서 말 안 한 거잖아.”

“네?”

“날 두고 왜 다른 놈을 데리고 나가는데? 그 어설픈 녀석들의 뭘 믿고?”

“다들 이제 많이 늘었잖아요.”

“그래도 안 돼. 못 맡겨.”

해리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해리의 상태가 나아질까 고민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뜬 해리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두 팔을 벌렸다.

“안아 줘. 네 냄새 맡게 해 줘.”

“그럼 좀 나아지겠어요?”

“응. 역겨운 인간들 냄새 말고, 네 냄새가 필요해.”

나는 골목 바깥을 힐끗거렸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큰길이지만, 좁은 골목까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뭐, 괜찮겠지.’

나는 두 팔을 벌린 해리의 품으로 들어가 그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해리가 나를 마주 안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해리의 고른 숨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살 것 같아.”

“음. 지금 상당히 변태같이 보이지만, 살 것 같다니 다행이네요.”

내 말에 해리가 픽 웃었다. 여자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는 게,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 변태 같긴 한가 보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응.”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놓아주었다. 여전히 창백하긴 했지만,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요?”

“어디 가려고?”

“잠깐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그럼 토할 것 같은 게 좀 나을 수도 있잖아요.”

“나도 같이 갈래.”

“저긴 사람이 너무 많아요. 또 상태 안 좋아지면 어떡해요? 내가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혼자 남겨지긴 싫은지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달콤한 거 좋아하잖아요. 달달하고 시원한 거 사 올게요.”

“달콤한 거?”

달콤한 것엔 혹하는지 해리가 눈을 빛냈다. 나는 해리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달콤한 거 사 올게요.”

“알았어.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

“네.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큰길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오는 길에 시원한 과일 주스를 파는 곳을 봤다. 나는 과일 주스 장수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바난다 주스 두 개 줘요.”

바난다는 이 세계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과일로, 딸기와 바나나를 합친 것 같은 맛이 났다. 센스 좋은 엠마가 미리 작은 단위의 동전을 준비해 줬기 때문에, 나는 별 무리 없이 원하는 주스를 구매할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본 상인이 ‘히익!’ 하고 질겁하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양을 담아 주기는 했지만.

‘뭐 어때!’

이런 현상은 이제 익숙했다. 나는 값을 치른 주스 두 잔을 들고 해리가 기다리고 있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리가 없으니 확실히 내게 꽂히는 시선도 별로 없었다. 나는 여유롭게 사람들을 지나쳐 해리가 기다리고 있는 골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골목에는 해리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등을 보인 채 해리의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를 보면 여자인 것 같았다. 여자가 해리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는 듯했지만, 거리가 멀어서인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찌푸린 해리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은데.”

해리의 앞에 선 여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이걸 어디에서 들었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앞으로 걸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저기,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데. 많이 아픈 거면 의사한테 같이 가요. 네?”

여자가 친절하게 말하며 해리에게 손을 뻗었다. 해리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여자의 손을 쳐 냈다.

“손대지 마.”

살벌한 경고에 여자가 잠시 멈칫했다.

“허락도 없이 만지려고 해서 미안해요. 그쪽이 애완동물도 아닌데, 기분 나빴죠? 하지만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정말 아니에요. 나랑 같이 의사한테 가는 게 싫으면, 여기로 의사를 불러 줄게요. 그건 괜찮죠?”

“됐으니까, 그냥 꺼져.”

“하지만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야, 넌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 그냥 좀 가라고. 토할 것 같으니까.”

해리가 입을 틀어막으며 여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오지랖. 해리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에 머릿속이 촤르륵 돌아가며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 맞아.’

저 상냥한 목소리. 누구에게나 친절한 태도.

‘내가 어떻게 저걸 잊을 수가 있지?’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 들고 있던 주스가 바닥에 떨어지고, 요란한 소리에 해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브리아!”

해리가 반갑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이브리아?”

해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여자가 돌아서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자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이브리아.”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후드를 벗었다. 화사한 분홍색 머리에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캐서린 우드베르슨.”

이 세계의 주인공. 바로 그녀였다.

‘등장이다. 주인공이 등장했다!’

“왕도에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캐서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저분께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셔서 말을 걸었거든요. 이브리아와 아는 분인 줄은 몰랐어요.”

캐서린이 의아한 얼굴로 나와 그녀를 바라보는 해리를 힐끗거렸다.

“처음 뵙는 분인 걸 보면, 에렐에서 사귄 친구분이신가요?”

“캐서린, 우리가 이렇게 태연하게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아요?”

“저 때문에 곤란을 겪으셨다고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불편하시다면…….”

내 말에 캐서린이 흠칫 떨며 말끝을 흐렸다. 한 떨기 꽃 같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캐서린? 여기 있었나?”

그때 골목 입구에서 누군가가 헐떡이며 나타났다.

‘뭐, 이런 상황에 나타날 사람은 하나뿐이지.’

캐서린의 히어로 카시안이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그대는 왜 여기에……?”

카시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가, 덜덜 떨고 있는 캐서린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왕도에 오자마자 또 이러는 건가요? 지겹지도 않습니까?”

날 선 비난이 곧장 나를 향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일방적으로 친한 척을 하더니, 갑자기 혼자 벌벌 떠는 이 여자에게, 내가 뭘 했다고? 황당한 기분 그대로 카시안을 쳐다보니 그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정말 지긋지긋하군요. 여긴 또 어떻게 쫓아온 겁니까? 그 스토킹 기질은 여전하네요.”

“쫓아온 거 아닙니다. 저와 제 일행이 있는 자리에 우드베르슨 영애가 오신 거예요.”

“우연히 만났다고, 그 어이없는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내게 미련이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기에 혹시나 했는데…….”

카시안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쳐 갔다.

“역시 그것도 내 관심을 돌려 보려는 수작이었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마정석 광산에 손을 쓴 것도, 다 내 관심을 얻기 위해서겠죠.”

‘아니. 내가 마정석 광산에 손을 뻗은 게 그렇게도 해석되나?’

정말이지 자기 편리할 대로 해석을 잘하는 남자였다.

‘머리가 꽃밭인 건 주인공들의 특성인가 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카시안과 캐서린에게서 몸을 돌렸다.

“해리, 나도 갑자기 역겨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만 저택으로 돌아……”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팔을 붙잡혔다. 강한 힘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어딜 가려는 겁니까?”

“우리 서로 꼴 보기 싫은 사이인 것 같은데, 그럼 여기서 깔끔하게 돌아서는 게 낫잖아요?”

“하. 일을 치고 또 도망가겠다는 겁니까? 그게 당신 특기죠?”

“그러니까 제가 무슨 일을 쳤는데요?”

“또 캐서린을 괴롭히고 있었잖습니까!”

카시안의 외침에 캐서린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아요, 시안.”

캐서린이 친근하게 카시안의 애칭을 부르며 그를 말렸다.

‘와, 이것 봐라. 그러면서도 내가 안 괴롭혔다는 말은 절대 안 하네?’

연약한 소동물 같은 캐서린의 만류에 카시안의 눈이 더 어두워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캐서린이 이렇게 덜덜 떠는 겁니까!”

“빨리 제 팔 놓아주시고, 그건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날씨가 많이 추운가 보죠. 겉옷이라도 벗어 주시든가요.”

나는 코웃음을 흘리며 해리를 바라보았다. 어서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해리가 서 있던 곳이 텅 비어 있었다.

“악!”

그걸 깨달음과 동시에 귓가에서 카시안의 비명이 울렸다. 내 팔을 꽉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해리에게 틀어 잡혀 손목이 꺾여 있었다. 해리는 고통에 신음하는 카시안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 준 뒤, 그의 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자 카시안의 몸이 종잇장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꽂혀 버렸다.

“시, 시안!”

캐서린이 울상을 지으며 카시안의 곁으로 달려갔다. 카시안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별 어이없는 것들이 내 주인님을 건드리네.”

해리가 싸늘하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캐서린이 놀라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힉! 히끅! 힉!”

캐서린의 습관이었다. 그녀는 놀라면 꼭 지금처럼 딸꾹질을 했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귀엽다면서 캐서린의 딸꾹질을 멈추게 해 줬지.’

하지만 해리는 여전히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더 내 주인을 건드려 봐. 바닥에 내던지는 걸로 끝내지는 않을 테니까.”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이브리아.”

“어? 으응…….”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우리를 노려보는 카시안과 여전히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왕세자인데 너무 심했나?’

하지만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카시안은 워낙 자존심이 강한 캐릭터였다.

‘한 손에 내던져져서 바닥을 뒹군 게 부끄러워서 오늘 일은 절대 말 못 하겠지 뭐.’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해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 * *

“역시 에렐에서 그 머저리 놈의 후손을 없애 버렸어야 했어.”

씩씩대며 저택으로 돌아온 해리의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자식, 널 완전히 개무시했다고. 자기가 뭐라고 내 계약자를 우습게 봐?”

이제 해리는 분노에 차 발까지 쿵쿵 굴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나는 카시안이나 캐서린을 보며 분노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향한 나의 감상은 단순했다.

어이없다, 귀찮다, 짜증 난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책 속의 인물이고, 이브리아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그들에게 부여된 속성이었다. 캐서린이 어떤 짓을 해도 이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속성에 대고 분노할 수는 없잖아.’

거기에 대고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마음만 상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들의 미움을 포기하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 이 세상에서 나는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조롱도 가볍게 들어 넘길 수 있었다.

‘물론 그걸 듣는 게 마냥 기분 좋은 건 아니니 피해 다니긴 했지만.’

그런데 해리는 나를 향한 그들의 비난과 조롱에 분노해 줬다. 마치 내가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듯.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브리아는, 이 세상의 나는, 누구에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게 악역 조연의 운명이지.’

하지만 원작의 스토리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이기 때문일까? 해리는 나를 그 운명과는 다르게 대했다.

“이거 생각보다 기분 좋네요.”

“넌 그런 취급을 당하고 와서는 뭐가 기분 좋아?”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에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해리가 나 대신 화를 내 주잖아요. 누가 나 대신 화를 내 주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어요.”

내 말에 해리가 귀가 벌게져서는 굳어 버렸다. 여태까지 화를 내던 것도 잊었는지 어딘가 멍한 얼굴이었다.

“……그건, 네가 화를 안 내니까 그렇지.”

해리가 중얼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런 해리의 시선을 따라 그 앞에서 얼쩡거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몇 번이나 나를 피하던 해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왜 자꾸 따라와!”

해리가 짜증을 내는데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꾸도 없이 계속 웃기만 하자 해리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계약자. 정말 미쳐 버린 거야?”

그리고 해리의 의견에 지금까지 조용하던 유피테르가 동의했다.

[처음으로 저와 생각이 일치하는군요, 악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