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156)

* * *

나는 왕도에서도 편지로 에렐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몇몇 사안의 경우 내 의견 없이 진행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복잡해도 이런 절차를 거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에렐에 큰비가 내렸다. 이후에도 작은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에렐의 우기였다. 민가에 피해는 없었지만, 검은 숲의 땅이 늪처럼 질척해진 게 문제였다. 안으로 들어서면 발이 푹푹 빠지는 통에 제대로 흑철목 수액 채취를 하기 힘들다고 했다.

‘한동안 청요석 생산량이 줄어들겠구나.’

그동안 열심히 작업장을 돌려 여분의 청요석을 만들어 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매년 이렇다면 조금 걱정인데.’

우기를 고려해서 생산 계획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아가씨.”

꼼꼼하게 편지를 살피고 있는 내게 엠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에렐이라면 라파쉬나 인세티아 남작이 나를 찾아왔을 테지만, 왕도에는 집까지 방문할 손님이 없었다.

‘예전에 사교계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살인 미수 사건 이후에 전부 멀어졌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데?”

“왕자님이세요.”

엠마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아직 아가씨와 왕자님의 아름다운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엠마는 아가씨와 기사님의 로맨스를 지지하는 쪽 아니었어?”

“정석은 왕자님이죠.”

엠마가 웃으며 내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너무 일만 하지 마시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셔야 해요, 아가씨.”

“그게 지금 오신 왕자님이고?”

“왕자님은 모든 소녀의 로망이라고요.”

“로망을 찾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어?”

“무슨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세요? 아직 성년식도 안 치르신 분께서.”

아차. 이브리아는 그랬지. 딴청을 부리는 나를 보며 엠마가 웃었다.

“그리고 여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소녀예요.”

“설마 그것도 마담 루이제의 지론이야?”

“아뇨, 이건 제 지론이요!”

엠마가 당당하게 외치며 내 어깨를 떠밀었다.

“왕자님은 응접실로 안내했어요. 나가시기 전에 간단하게 꾸며 드릴게요.”

나는 알고 있었다. 엠마의 ‘간단하게’는 내가 아는 ‘간단하게’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문제에선 엠마를 이길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엠마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 * *

응접실로 나가자 엠마의 말처럼 리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를 거절했더니, 이렇게 직접 나타나냐.’

루크가 백지 수표에 정말로 엄청난 금액을 쓴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루크가 얼마를 썼어요?”

“루크? 얼마를 써?”

내 말에 리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백지 수표에 엄청난 금액을 써서, 그걸 따지러 온 거 아니에요?”

“아. 백지 수표.”

“그런데 그게 얼마든 내가 쓴 금액이 아니거든요. 따질 거면 루크의 목을 짤짤 흔드세요.”

내 말에 리던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왜 네 손에 그런 백지 수표가 있나 했더니.”

리던이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자세로 의자에 기대며 턱을 괴었다.

“그게 리던이 준 수표였어?”

리던의 얼굴을 하고 그런 걸 물으시면 저한테 어쩌라는 거죠? 나는 황당해져 눈을 깜빡였다가 곧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앞의 남자를 가리켰다.

“설마, 루크?”

“왕자에게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거, 엄청난 결례야.”

“왕자 아니잖아요.”

나는 편하게 리던, 아니, 리던의 모습을 한 루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계속 그렇게 왕족 행세하면 왕족 사칭죄로 잡혀가요.”

“내가? 설마.”

루크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의 말처럼, 그가 왕족 사칭죄로 잡혀갈 일은 전혀 없을 터였다.

“에렐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요. 그런데 왕도에서까지 왕자 행세라니. 정말 배짱 좋네요.”

“그런 배짱이 없으면 이쪽 장사하기 힘드니까.”

루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이거 사기당한 기분인데. 그 백지 수표가 리던 거였다니.”

“왕자님이 저한테 지불하신 값이니까 제 수표가 맞긴 해요. 발행한 건 왕자님이니까, 루크가 쓴 금액을 왕자님이 내긴 했겠지만요.”

“그러니까, 넌 돈 한 푼도 안 쓰고 날 부린 셈이잖아. 손해 본 기분인데.”

루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초과 의뢰까지 해 줬는데.”

“아.”

내가 납치당했을 때, 나타 백작령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 준 걸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건 고마웠어요. 덕분에 편하게 잘 빠져나왔어요.”

“그래. 보니까 무사히 잘 나온 것 같네.”

루크가 천천히 내 모습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무사한 걸 봤으니 됐어.”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다른 이야기도 하기 전이었다.

“가려고요?”

“그럴 건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문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돌아갈 거라면, 왜 리던으로 변장하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도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거예요? 왕자님으로 변장은 왜 했고요?”

“오베론 저택의 보안은 수준이 높아서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거든. 왕자님 정도가 아니라면.”

확실히 오베론 저택의 보안은 에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럼 변장은 그렇다 치고. 뭐 하러 날 찾아온 건데요?”

나는 루크의 꿍꿍이를 파헤치기 위해 그에게로 다가섰다. 하지만 루크가 그런 나를 피해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정보를 줬으면, 사후 결과까지 확실히 알아 두자는 게 내 철칙이라.”

“그런 철칙을 가지고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요?”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물론 나는 루크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책에서 다 봤거든.’

거기에 루크가 정보 제공의 결과까지 관리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오히려 나는 정보만 팔면 끝이다-라는 마인드 아니었어?’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루크가 내 눈을 피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시 리던 이름으로 보낸 초대장도 루크가 보낸 거예요?”

“……리던이 너한테 초대장을 보냈다고?”

“모르는 걸 보니 그건 정말 왕자님이 보낸 건가 보네요. 도대체 수표에 얼마를 썼기에 리던이 이래요?”

“……아직 안 썼어. 은행에 갈 시간이 없어서.”

“은행 갈 시간이 없어서 수표를 안 바꿨다고요? 여기서 이럴 시간에 충분히 바꿨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루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로 먹고사는 정보 길드 수장의 입을 틀어막는 건, 정말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난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가겠어.”

“정말 그냥 나 확인하러 온 거라고요?”

루크는 대답하지 않고 서둘러 방을 떠났다. 덩그러니 남은 나는 정말로 황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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