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기운 빠져. 지쳤어. 능구렁이 할아버지 상대하는 건 힘들어.
나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긴장했어.’
능구렁이 같은 인간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천진한 척,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이리저리 비비 꼬아도 내가 직선으로 나가면 절대 말려들지 않았다. 문제는 이게 엄청나게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라는 거였다.
‘국왕 그 사람, 진짜 인간 꽈배기가 틀림없어.’
국왕의 비비 꼬인 말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계속 머리를 굴렸더니 뇌에 쥐가 날 것 같았다. 힐링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해리이이이이…….]
나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해리를 불렀다. 국왕을 만나러 갈 때는 호위를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 제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데?]
[나 지금 저택에 돌아왔거든요.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해리가 들어왔다.
“해리!”
나는 그에게 반갑게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달려온 해리가 내 손을 맞잡았지만,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다.
“이 해리 말고, 개 해리가 필요해요.”
“……왜?”
“지금은 애니멀 테라피가 필요하거든요.”
내 말에 해리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야. 내가 개만도 못하다 이거냐?”
“어차피 해리가 그 개잖아요.”
“그래도!”
“변신해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내 재촉에 해리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예, 예. 이 충성스러운 개는 분부대로 따라야지요, 주인님.”
해리가 투덜거리며 개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당장 커다란 솜뭉치 같은 개를 끌어안고 침대를 위를 뒹굴거렸다.
“왕궁에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뇨. 그냥 능구렁이 할아버지를 상대했더니 좀 피곤해서. 제가 제일 힘들어하는 타입이거든요.”
무역 회사에서 일할 때도 이런 쪽의 클라이언트가 제일 까다롭다. 워낙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된 의도를 알아차리기 위해 계속 머리를 굴려야 했다.
“능구렁이 할아버지? 내가 죽여 줄까?”
진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언제부턴가 해리는 누굴 죽이자거나, 전쟁을 하자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그 능구렁이 할아버지가 국왕이라서, 그랬다간 완전히 반역이거든요. 난 오래 살고 싶으니까 됐어요.”
“반역이 걱정이면 아예 이 나라를 다 쓸어버리면 되는데? 나라가 없으면 반역도 성립이 안 돼.”
“내가 사는 나라를 쓸어버리면 어떡해요!”
“네가 새 나라를 세워서 왕이 되면 되겠네.”
“와. 그건 진짜 반역이다.”
나는 웃으며 해리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아. 해리는 혹시 그 이야기 알아요? 전 나타 백작이요.”
“……그 사람이 왜?”
“감옥에 갇혀 있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서 허리가 똑 부러졌대요. 저 말고도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았나 봐요.”
“……뭐, 그런 인간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잖아.”
어째 해리의 반응이 아까부터 한 박자씩 느렸다. 나는 해리의 털에 파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해리. 혹시……”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요.”
“……그랬지. 그런데 아무튼, 네가 뭘 물어봐도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해리를 보니 확실해졌다.
‘이 악마, 저질렀구나!’
“요새 얌전히 지낸다 했더니, 그 사람을 반쯤 죽여 놔서 그런 거였어요? 충전도 키스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됐던 거네!”
“아냐!”
해리가 재빨리 반박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이때다 싶어서 반쯤 죽여 놓은 거죠? 내가 방법 찾아 줄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나 몰래……”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해리가 씩씩거리며 내 말을 막았다. 그의 빨간 눈이 평소보다 더 짙게 변해 있었다. 드물게 화가 난 모습이라, 나는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해리와 장난으로 투닥거린 적은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진심으로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놀라서 굳어 버린 나를 보며 해리가 힘을 풀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얼굴을 이불에 묻은 그가 작게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왜 무서워하는데? 난 네 개인데. 너 안 무는데.”
“알아요. 안 무서워했어요. 그냥 놀란 거지.”
“거짓말. 무서워했으면서.”
해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이불에 파묻은 해리의 얼굴을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나 해리 안 무서워요. 정말이에요.”
내 말에 해리가 또다시 으르렁거리며 내 몸 위에 올라탔다.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날 안 무서워하는 인간은 없어.”
“난 안 무섭다니까요. 나 안 해친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을 믿어?”
“안 믿으면요?”
어차피 해리가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이는 건 쉬웠다. 그는 강한 악마고, 나는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 더 아래에 있는 하찮은 인간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해리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건 내 손해였다.
“넌 진짜 이상한 인간이야.”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해리가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픔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윽!”
그러나 아픔으로 신음을 흘리자마자 해리가 멈칫했다. 그는 물었던 것을 사과하듯 자신이 물었던 부분을 혀로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에 몸이 절로 비틀렸다.
“해리.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나는 웃음을 참으며 겨우 해리를 밀어냈다. 위협적인 기세로 내 위에 올라탔던 해리가 싱겁게 내 손에 밀려났다. 풀이 죽었는지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인간이 너 다치게 했잖아.”
“……그 나타 백작이요?”
“응. 그래서 혼내 준 거야. 사람 죽이고 싶어서, 재미로 그런 거 아냐.”
“그랬구나. 오해해서 미안해요.”
“뭐,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해리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낑낑대며 내 품에 자리 잡은 해리의 등을 토닥이며 눈을 껌뻑였다.
‘진짜 보모가 된 것 같은데. 아니, 개를 돌보는 거니까 조련사인가?’
따뜻한 동물을 껴안고 있으니 금세 잠이 쏟아졌다. 나는 해리를 안은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꿈속의 나는 빨간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길은 기묘했다. 앞으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걸어가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 똑같았다. 마치 제자리에서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귓가에는 이상한 소리가 윙윙 울리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였다.
‘으, 시끄러워.’
꿈속의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이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그 깨달음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지.’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렸다. 분명 눈을 떴는데, 눈앞이 어두웠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해 봤지만 팔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꿈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귓가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너무 현실적이었다.
‘숨소리?’
나는 몸을 겨우 비틀어 머리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어느새 사람이 된 해리의 얼굴이 있었다.
“해리?”
불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마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해리는 나를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내가 해리를 안고 잔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전세가 역전됐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해리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단단한 힘을 풀어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몸에 힘을 뺐다.
‘그냥 해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나는 해리의 얼굴을 관찰하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얀 얼굴에 가지런한 눈썹. 속눈썹도 예쁘고, 코는 유려하게 뻗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닫힌 입술은……
“뭘 그렇게 봐?”
내가 해리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이 그가 눈을 떴다.
“오해하지 말아요. 입술 본 거 아니에요. 아니, 입술 본 건 맞는데, 다른 거 다 보고 마지막으로 본 거예요.”
“……누가 뭐래?”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는 게 꼭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가요?”
“네가 나 덮칠까 봐 무서워서 도망가는데.”
“내가 해리를 왜 덮쳐요?”
“조금 전까지 내 입술 빤히 쳐다봤잖아. 분명 욕망이 담긴 눈빛이었어.”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도리질했다. 완전히 나를 가해자로 보는 눈이었다.
“나 진짜 아무 생각 안 했다니까요. 그냥 내 개가 참 잘생겼구나, 하고 감탄했을 뿐이지.”
“그래. 하필 그 감탄을 내 입술을 보면서 했구나. 내 계약자가 악마보다 더한 욕망덩어리인 줄은 몰랐네.”
“익.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왜 그래, 계약자? 욕망은 부끄러운 게 아냐.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해리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열이 받아 해리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
“계속 헛소리할 거면 나가요!”
“뭐 뀐 사람이 성낸다더니.”
“나 아무것도 안 뀌었어요!”
내 요란한 외침과 함께 해리가 방을 나서자, 조용히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던 유피테르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해탈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언제 봐도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으십니다.]
“……도대체 어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