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156)

* * *

‘으. 숨 막혀.’

만찬이 진행되는 홀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공간에 단 세 사람뿐이라 허전한 느낌인데. 가족의 식사 시간이면 으레 들려오는 대화 소리까지 없으니 공허한 식기 소리만 종종 공간을 울렸다.

그냥 끝까지 이렇게 식사 시간이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을 무렵. 만찬의 마지막 단계인 디저트가 식탁에 올라오자 공작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에렐에서 큰일이 있었다고?”

큰일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는 공작이 도대체 어떤 ‘큰일’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왠지 그럴 것 같다 싶은 일을 입에 올렸다.

“예. 새로운 온천이 개발된 건 저도 놀랐습니다. 지질학자들이 제대로 일을 한 거지요.”

“으음…….”

그런데 공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큰일’이 이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서둘러 또 다른 ‘큰일’을 떠올렸다.

‘역시 ‘큰일’이라면 이거지!’

“나타 백작령의 일에 멋대로 개입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덕에 그쪽과 담합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흐으음…….”

아니, 이번에도 공작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 ‘큰일’도 공작의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 용기사들의 데뷔를 화려하게 성공한 걸 말하는 건가?’

내가 다른 ‘큰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아치볼드가 슬쩍 힌트를 흘렸다.

“납치 사건은 무사히 해결됐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이브리아도 무사하잖습니까.”

“흠.”

아치볼드의 ‘큰일’이 정답이었는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리아의 말대로 그 일 덕분에 나타 백작령과 좋은 관계도 맺게 됐고, 그 문제가 많았던 전 백작은 반신불수가 되었다는군요.”

‘응?’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놀라서 아치볼드를 보자 그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지하 감옥에 괴한이 들이닥쳐서 허리를 똑 부러뜨렸답니다. 덕분에 하반신에 마비가 와서 똥오줌도 혼자 못 가린다고 하던데요.”

“지하 감옥에 괴한이 들이닥쳐?”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영지의 죄수를 모아 두는 지하 감옥은 탈옥을 막기 위해 방비가 철저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곳에 괴한이 들이닥쳤다니 이상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 역시 공작과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아치볼드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변방이니, 저희와 달리 감옥의 방비가 허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탈출했던 비밀 감옥에도 간수가 하나뿐이었다.

‘쯧쯧. 그렇게 방비가 허술해서야. 브라이언에게 감옥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조언해 줘야겠어.’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으니 공작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네 앞으로 온 초대장이 몇 개 있다.”

“저한테 초대장이요?”

‘불미스러운 일로 왕도를 떠난 사람에게 먼저 초대장을 보낼 간 큰 인간이 누구지?’

나는 의아해져 먹던 푸딩도 내려놓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닿자 공작이 싸늘한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아. 속 터지는 얼굴을 봐서 짜증 났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에 앉은 아치볼드가 답답해 죽겠다고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티파티 초대장들이지. 그런데 그중에 1왕자가 보낸 초대장이 있더구나.”

“왕자님이요?”

에렐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후 그에게서 짧은 편지를 받은 적은 있었다. 와이번 문제를 국왕께 잘 보고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감사하다고 답장을 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잘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아. 혹시 그 백지 수표 때문인가?’

드워프를 찾으려고 리던이 내게 줬던 수표를 루크에게 지급했다. 그게 내가 발급한 수표라고 생각한 루크가 엄청난 금액을 적었다면, 리던이 내게 만남을 청할 이유가 된다.

‘왜 이렇게 큰 금액을 썼냐고, 일부는 돌려 달라고 따지려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억울했다.

‘아니, 백지 수표가 뭐야? 쓰고 싶은 만큼 쓰라고 백지 수표인데. 그걸 줘 놓고 이제 와서 따진다고?’

그런 쪼잔한 만남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초대는 전부 거절하려고요. 불미스러운 일로 사교계를 떠나 있었으니, 다시 복귀할 때는 집에서 열리는 파티로 돌아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싸움에서는 원정보다는 홈경기가 훨씬 유리했다. 굳이 사교계 복귀를 원정 경기로 치를 필요는 없었다.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만…….”

공작이 조금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국왕께서 널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이건 공식적인 초청이 아닌, 뒤쪽의 초대다.”

“국왕 폐하께서요?”

“그래. 네가 왕도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며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국왕에게는 찔리는 것이 있었다.

‘나, 청요석 팔겠다고 국왕한테 협박 편지 보냈었지…….’

그때는 에렐에 틀어박혀 평생 국왕 얼굴을 못 볼 줄 알고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왕도로 돌아와 직접 국왕의 호출을 받게 되다니.

‘일진한테 너 옥상으로 따라오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이 기분.’

다른 사람의 초청이라면 몰라도 국왕의 초대는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거절하기 힘들었다.

“폐하께서 만남을 청하시니, 당연히 찾아뵈어야죠.”

“곧 날짜와 시간을 정해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셨다.”

역시 국왕도 나의 거절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좀 더 착하게 살 걸 그랬나? 그럴 걸 그랬나 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막 나갔던 과거의 나를 질책했다.

* * *

약속대로 국왕은 은밀하게 오베론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 나를 왕궁으로 초대했다. ‘뒤쪽의 초대’라는 말에 걸맞게, 나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 국왕의 개인 공간이라는 유리 온실로 안내되었다. 유리 온실은 마도구를 이용하여 사계절 내내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공간이었다. 당연하게도 마정석이 필요했다.

‘혹시 우리 걸 쓰고 있나?’

나는 마정석이 박혀 있어야 할 자리를 슬쩍 눈으로 훑었다. 파란색의 영롱한 보석. 마정석을 대신해 청요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대가 우리에게 판 청요석이지.”

뿌듯하게 천장을 바라보는데 내 곁에 인기척도 없이 사람이 나타났다. 국왕의 개인 공간에 이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날 사람은 이 공간의 주인, 국왕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제레인트의 불꽃, 국왕 폐하께 오베론의 이브리아가 인사 올립니다.”

“하하. 됐네. 공식적인 만남도 아니고,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하자고 만든 자리이니.”

국왕이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얼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게.”

‘폐하께선 그게 참 쉬우시겠죠. 하지만 전 아니거든요…….’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편하게 대할 수 있어도,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편하게 대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윗사람이 하라는데. 진짜 편하게 대하진 못해도, 편하게 대하는 척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아버지를 뵙는다 생각하고 편하게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려 인사했다. 국왕에게 올리는 정식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게 썩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한번 시원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국왕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서 직접 기른 허브로 우린 차야. 귀족들은 보통 홍차를 마시지만, 나는 이쪽이 더 좋더군.”

“좀 더 깔끔한 맛이 있지요.”

“그래. 공녀가 차 맛을 아는군.”

그런 식으로 한동안 시시콜콜한 귀족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차 맛이 어떻다더라, 요즘 어떤 책이 읽기 좋더라, 음악은 뭐가 유행이더라.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고 긴 대화를 마친 끝에 국왕이 비로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왕세자와의 파혼을 먼저 요청했다지.”

“예, 폐하.”

“그래. 카시안이 경솔한 면이 있었어. 약혼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여인을 곁에 뒀지. 그건 공녀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저는 그 문제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가?”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가왔다. 날카로운 국왕의 시선이 나를 찔렀다.

“북방에서 일어난 작은 파도가 해일이 되어 왕도까지 밀려왔네. 그게 진정 공녀가 의도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인가?”

“저는 에렐을 발전시켜 영지민들의 사정이 나아지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내게 그 말을 믿으라…….”

국왕이 눈을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

“공녀. 내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네. 나는 왕세자가 아니었고, 왕이 되기 위해 많은 형제들을 죽였지. 참으로 비극이었어. 하지만 그런 일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나?”

국왕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마치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지른 비극을 바라보듯이.

“폐하, 저는 정말 왕위 싸움에 관심이 없습니다.”

“왕세자와 혼인해 왕비가 되려는 야망이 있지 않았나?”

“그건 카시안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죠.”

진짜 이브리아가.

“하지만 그때의 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내가 됐다.

“이제 제 바람은 제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뿐입니다. 복잡한 일에 엮이면 그게 힘들어진다는 것도 알고요. 그리고…….”

“그리고?”

“폐하께 협박 편지를 보내서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청요석을 정말 팔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에렐의 사정이 좀 나아질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날카롭던 국왕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다.

“……뭐?”

“다시는 폐하를 뵐 일이 없을 줄 알고 그런 편지를 보낸 건데,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사죄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협박 편지 같은 건 안 보낼게요.”

“다시 안 만날 것 같았으면, 그런 협박 편지를 또 보낼 생각이었나?”

“……필요하다면, 아마도요.”

내 말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국왕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내게 또 그런 협박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니…… 내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었군, 오베론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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