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156)

* * *

오베론 저택의 방은 오랜만이었다. 겨우 몇 달 만에 소탈한 축에 속하는 에렐의 방에 익숙해졌는지, 오베론 저택의 화려함에 잠시 눈이 어지러워졌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느라 여정 자체는 길지 않았지만, 하늘을 나는 동안 긴장한 탓에 몸이 뻐근했다. 침대에 몸을 묻자마자 포근함이 온몸을 감쌌다. 안락한 침대 덕분에 완전히 잊고 있던 졸음이 끌려 나올 정도였다.

‘역시 침대는 비싼 게 최고야.’

에렐의 침대도 좋은 편이었지만, 이 침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려고?”

해리가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고개만 돌려 해리를 보며 입을 비죽였다.

“여기서는 좀 더 조심해야 돼요.”

“왜?”

“보는 눈이 더 많으니까요. 소문도 훨씬 빠르고. 여러모로 피곤한 동네거든요.”

다들 나를 좋아해 주는 에렐과 달리 이곳 사용인들은 나를 싫어했다. 내가 빙의하기 전 진짜 이브리아가 저질러 놓은 과거의 악행 탓이었다.

‘그리고 난 그걸 굳이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지.’

어차피 에렐로 튀어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은 수습해 볼 걸 그랬다.

귀족가의 사용인들과 소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왕도의 모든 소문이 사용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밉보였다가는 이상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 딱 좋았다.

‘이래서 그냥 에렐에 계속 있고 싶었던 건데.’

이브리아는 그런 식으로 괴이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적이 아주 많았다.

‘내가 손가락을 잘라서 박제한다는 소문도 그렇고.’

이렇게 퍼진 소문은 바로잡기도 힘들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소문이 될 만한 일을 만들면 안 돼요.”

“그냥 난 네 방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게 문제라니까요. 내가 잘생긴 호위랑 진득하게 붙어먹는 줄 알 거란 말이에요.”

이런 종류의 소문은 특히 사용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오베론가의 아가씨가 왕도로 돌아오자마자 잘생긴 호위를 끼고 문란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가? 아마 며칠도 지나지 않아 왕도 전체에 이런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나면 어때서?”

“난 싫어요. 그런 소문이 나면 별 이상한 놈들이 접근해서는 치근덕거린단 말이에요.”

남자들은 어떤 여자가 누군가와 밤의 유희를 즐기면, 자신과도 기꺼이 밤의 즐거움을 나눌 거라는 이상한 착각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내가 호위와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개나 소나 ‘내가 당신의 밤 파트너가 되어 주지!’라며 느끼한 미소를 지은 채 접근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거 너무 싫어.’

하지만 질색하는 나와 달리 해리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놈들이 다가오면 내가 불알을 터트려 주면 되잖아.”

“불…….”

너무 직접적인 단어에 얼이 빠졌다. 그런 나를 보고 해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왜? 왕도니까 좀 더 귀족적으로 말해 줘?”

“가능하다면요.”

“그럼, 고귀한 귀족 나리의 소중한 고환을 다시는 못 쓰게 해 주겠다, 이건 어때?”

“뭐, 불알 터트린다는 말보다는 조금 더 낫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때요?”

“그거?”

“해리의 본능이요. 와이번 사냥을 한 것도 한참 됐잖아요. 슬슬 약 기운이 떨어질 때 아니에요?”

처음 해리가 폭주한 기간을 계산하면 벌써 한계에 다다랐을 시간이었다.

“어. 그렇긴 한데…….”

내 질문에 해리가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분명히 시기를 계산하면 문제가 생겨야 맞거든.”

“그렇죠. 와이번들 잡으러 다닌 것도 벌써 한참 전이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견딜 만해.”

해리 자신도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요? 그렇게 말하다가 또 전처럼 폭주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해리가 두 손을 들어 결백을 주장했다.

“나도 폭주하는 거 싫어. 몸이 통제도 안 되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 기분 나쁘단 말이야.”

해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그사이에 쾌락을 채워 줄 뭔가가 있었다는 건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해리가 나 몰래 누군가를 학살하고 다녔다면 벌써 낌새가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가정은 탈락.

‘나 말고 다른 인간은 역겹댔으니까, 다른 사람이랑 뭘 한 것도 아닐 텐데.’

나랑 뭔가를 했다면 서로가 역겹지는 않은지 확인하자며 했던 입맞춤뿐이었다.

‘어? 설마?’

머릿속에 불이 번쩍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리, 혹시 그걸로 채워진 거 아니에요? 그때 우리 키스했던 거요!”

내 말에 해리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우 그걸로? 악마가 고작 키스로 쾌락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어.”

“그것도 악마마다 기준이 다른 게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뿐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그걸로?”

“쾌락이 별건가요? 해서 기분 좋으면 쾌락을 얻은 거지. 나랑 했을 때 어땠는데요? 기분 좋았어요?”

내 질문에 해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땠냐니까요?”

나는 답답해져서 해리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 기분 좋긴 했는데…….”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해리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쵸? 역시 그거라니까.”

나는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런 거면 지금 다시 충전해 둘까요?”

“뭐?”

“쾌락이 찬 수치가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게이지가 뚝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입 맞추는 게 간단한 것처럼 보여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납치를 당했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제때 충전을 못 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해리는 그대로 폭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재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씩 자주 충전해 두면 갑자기 쾌락이 바닥나서 폭주할 일은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해 둘 수 있을 때 많이 해 놓죠.”

“……해 둘 수 있을 때, 많이?”

“네. 지금이 딱 맞잖아요. 보는 눈도 없고.”

주변은 고요했고, 이 방에는 나와 해리 단둘뿐이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해리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그가 쓰러지듯 침대 위에 몸을 기울였다. 해리의 두 팔이 침대를 짚었다. 나는 그 사이에 갇혀 해리를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그의 얼굴에서 미세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래?’

상대가 부끄러워하자 괜히 나까지 어색해졌다.

‘부끄러움도 전염이 되는 건가?’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시선이 갔다.

“내가 먼저 할까요, 아니면 해리가 먼저 할래요?”

“……이번엔 내가 먼저 할래.”

“그래요. 하세요, 먼저.”

해리가 나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자, 목울대가 느리게 일렁였다.

‘상대가 키스해 주길 기다리면서 관찰하는 것도 꽤 좋은데?’

해리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와 가까워졌다.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여 설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해리. 머리카락이 닿아서 간지럽……”

내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해리의 입술이 내 입에 닿았다. 잠시 맞닿았던 입술 사이로 숨이 섞이자, 허공으로 쏟아지려던 말이 해리의 입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침대를 짚고 있던 해리의 손이 어느새 내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여린 뺨을 간질이자 손끝이 간지러워져서, 나는 해리의 옷깃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맞닿은 부분이 더욱 깊어졌다. 해리의 몸이 내 쪽으로 더 기울고, 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뒤로 넘어갔다. 그 위로 쏟아지듯 해리의 몸이 겹쳐졌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해리의 혀를 깨물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서 떨어졌다.

“아파.”

해리가 투정을 부리듯 내게 말했다. 입안에서 피 비린 맛이 나는 걸 보니 내가 그의 혀를 제대로 깨문 모양이었다.

“아프기만?”

내 질문에 불만스럽게 찌푸려져 있던 해리의 얼굴이 슬며시 풀어졌다.

“뭐, 좋기도 하고.”

“나는 해리가 너무 무거운데.”

“그렇게 말하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게 또 악마라.”

해리가 내 몸을 짓누른 상태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강한 압박감과 함께 기묘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이 충전, 해리한테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도 적용이 되는 건가?’

느긋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해리의 체온을 즐기고 있으니 잊고 있던 존재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주인님께서는 제가 있다는 걸 자주 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이렇게 네 존재감을 뽐낼 필요는 없어, 이 망할 성검.”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해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나는 내 몸을 짓누르던 해리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침대 앞에 똑바로 선 해리가 여전히 누워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해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뭘요?”

“이걸로도 차는 것 같아.”

“그래요? 해리가 소박한 악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나는 해리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흐트러진 옷을 정돈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침대에 한 번 드러누웠다고 옷이 아주 엉망이었다.

“아가씨, 엠마입니다.”

그때 밖에서 엠마가 나를 불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슬쩍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엠마가 그 준비를 돕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들어와.”

내 허락에 안으로 들어선 엠마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아직 방 안에는 가시지 않은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었고, 해리의 얼굴은 어쩐지 상기한 채였다.

‘보이진 않지만 내 얼굴도 멀쩡하진 않을 거고.’

하지만 엠마는 훌륭한 하녀답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며 내게 다가왔다.

“저택 지리는 익혔어?”

내 질문에 엠마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에렐에 비하면 상당히 복잡할 텐데.”

“저택은 대부분 구조가 비슷하니까요. 규모가 조금 더 크긴 하지만, 외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한동안 에렐 저택이 낯설어 길을 헤맸던 내가 민망해지는 발언이었다.

“식사는 만찬장에서 가족들과 같이할 거야.”

가족이라고 해 봐야 공작과 아치볼드뿐이지만 말이다.

“네. 가족들과 함께하시는 자리이니, 치장은 간단하게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응. 부탁할게.”

내 대답에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엠마가 완전히 돌변해서 해리를 돌아보았다.

“개 요정님.”

엠마의 사나운 기세에 해리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어, 응?”

“아가씨는 옷을 갈아입으셔야 하니 나가 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엠마가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누가 봐도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해리가 얼떨떨한 얼굴로 방을 나서며 내게 속삭였다.

[나, 네 하녀한테 견제당한 거야? 내 아가씨 뺏어 가지 마라, 뭐 그런 눈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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