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드디어 왕도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나와 함께 왕도로 떠날 기사는 라이오넬과 데인, 리제토로 정해졌다. 북방에서 나고 자랐다는 세 기사는 벌써부터 왕도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며 들떠 있었다.
“왕도 사람들은 다들 세련되고 멋지다던데.”
“거리를 걸으면 우리가 시골에서 왔다는 걸 단번에 들키는 거 아냐?”
“우리가 뭐 어때서?”
“그걸 몰라서 묻냐? 네 머리를 좀 봐. 그게 어디 최신 유행에 맞긴 한지.”
“맞아. 완전 촌스러워. 왕도에 간다고 멋이라도 부린 거야?”
“……이 머리 우리 어머니가 잘라 주신 건데.”
라이오넬을 놀리던 두 기사가 잠시 침묵했다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희 어머니가 센스가 있으시네. 안 봐도 이게 왕도 유행이라는 걸 알겠어.”
“그러게. 왕도에서 라이오넬 이놈만 돋보이게 생겼어.”
두 기사가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잔뜩 들뜬 엠마도 상기한 얼굴로 두 손을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는 드디어 왕도의 최신 유행을 체험할 수 있게 됐다며, 왕도에서 내 화장품과 의상을 잔뜩 구매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어차피 그런 걸 사 와도 쓸 일이 없는걸.”
“무슨 말씀이세요. 사 두면 다 쓸데가 있어요.”
“그거 불합리한 소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의 안일한 논리야.”
“괜찮아요. 전 원래 안일하니까요!”
이래저래 들뜬 일행 사이에서 시큰둥한 사람은 나와 해리뿐이었다. 나는 왕도에 돌아가면 귀찮은 사람들과 마주칠 것이 짜증스러웠고, 해리는 왕도 하면 첫 계약자였던 머저리 놈이 생각난다며 부루퉁했다. 하지만 왕도로 떠나는 걸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인세티아 남작의 말처럼 출장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했다.
일행은 와이번 세 마리에 나눠 탔다. 인원수에 맞춰 더 많은 와이번을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수많은 저택이 빽빽하게 들어선 왕도에 이보다 더 많은 와이번을 데려가는 건 민폐일 것 같아 그 수를 줄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해리가 같은 와이번에 타고, 엠마와 라이오넬, 데인과 리제토가 한 조가 되었다. 짐도 적당히 삼등분해서 각각의 등에 나눠 실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인세티아 남작을 비롯한 저택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열을 맞춰 서서 배웅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왕도를 떠날 때 저택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는데.’
야반도주를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누구의 배웅도 없이 단출한 짐만 챙겨서 저택을 빠져나왔었다. 그렇게 떠났으니 다시 왕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위풍당당하게 돌아가다니.’
정말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인가 보다.
“그럼 다녀올게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 줘요.”
“걱정 마십시오. 겨우 몇 달인데요. 별일 없을 겁니다.”
내 말에 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 모두 여기에서 영주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작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와이번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 몇 번의 날갯짓으로 와이번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목적지는 왕도의 오베론 저택이었다.
* * *
“아버지, 하늘에 와이번이 보입니다.”
오베론가의 소공작 아치볼드는 창밖을 보며 여동생의 도착을 미리 알아챘다. 조금 먼 하늘에서 날아오는 세 마리의 와이번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저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준비는?”
“와이번이 착륙할 수 있도록 정원을 비워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지만, 아치볼드는 아버지가 꽤 들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벌써 22년이나 지켜봤는걸.’
눈치 없는 여동생은 아버지의 표정을 읽는 재주가 영 없었으나, 다행히 아치볼드는 그런 쪽의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브리아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하셨지.’
물론 이것도 아치볼드만 눈치챈 사실이었다. 오베론 저택의 고용인들은 이브리아가 사고를 쳐서 공작님이 화가 났다며 수군거렸다. 평소보다 배로 험악해진 공작의 기세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걱정하거나 기분 좋을 때 얼굴이 험악해지는 이상한 특징이 있으니…….’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그런 오해를 당사자인 이브리아도 믿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인 줄도 모르고.’
제 여동생은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엇나가기 시작했다. 화사하게 웃으며 살랑거리던 왕세자 카시안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그런 직설적인 애정 표현을 처음 받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지만.’
사실 아치볼드는 여동생에게 큰 애정이 없었다. 제게는 무덤덤한 아버지가 여동생만 보면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게 어린 마음에 밉기도 했고, 다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과 딱히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힘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치기 어린 미움은 옅어졌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여동생이 귀엽게 느껴진다거나 사랑스럽게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원래 남매가 그런 거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애정 없는 여동생이라도 밖에서 맞고 오면 열을 받는 법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 왕세자.’
카시안은 아치볼드에게 퍽 친절했다.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게 ‘아치볼드 오베론’을 향한 호의가 아니라 ‘오베론 소공작’을 향한 호의라는 것도 뻔히 보이는 게 문제였지만.
“이브리아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할까요?”
아치볼드는 공작에게 슬쩍 기회를 줬다. 제가 손을 놓고 있으면, 이 답답한 아버지는 같이 밥이나 먹자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대답하는 공작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얼핏 보기에는 분노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웃고 싶은 걸 참는 거지만.’
웃고 싶으면 그냥 웃으면 될 텐데, 왜 그걸 참으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외모와 성격 모두 죽은 공작 부인을 닮은 오베론 소공작은, 정말로 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와이번이 하늘을 크게 돌아 오베론 저택에 내려앉았다. 와이번이 온다는 소식에 구경을 나온 건지, 절대 나를 마중 나올 리 없는 사용인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신기한 얼굴로 와이번을 살피고 있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미남이 튀어 나왔다. 따뜻한 밀빛의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어딘가 무심함이 느껴지는 표정의 남자. 오베론 공작의 아들이자 이브리아의 오빠, 오베론의 소공작 아치볼드였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보는 혈육이지만 별로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아치볼드가 진짜 혈육이라는 느낌도 없을뿐더러, 진짜 이브리아와 아치볼드도 썩 살가운 남매가 아니었다.
“최근에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그런 걸 물어볼 때는 걱정스러운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치볼드는 여동생의 납치 사건을 언급하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공작이 험악하게 무서운 쪽이면, 아치볼드는 너무 인형같이 표정이 없어서 무서운 쪽이라고.’
어느 쪽이나 무서운 건 똑같다는 게 제일 무서웠다.
‘뭐, 무서운 얼굴은 오베론 가문의 전매특허니까.’
“그 일은 잘 해결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다행인 얼굴이 아니었다.
“네 방은 미리 정돈해 뒀다. 함께 온 사람들은…….”
아치볼드가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움찍거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5 서리 기사단의 라이오넬 딜프입니다!”
“같은 기사단의 데인입니다!”
“역시 같은 기사단의 리제토입니다!”
씩씩하게 인사를 올린 세 기사의 시선이 해리를 향했다. 왜 너는 인사를 안 올리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세 사람의 재촉에 해리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아치볼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리입니다.”
“아. 내 여동생의 호위라는.”
아치볼드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해리의 얼굴을 훑었다. 내가 해리를 호위로 둔 것이 왕도에서 유행하는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기사들의 모습을 모두 확인한 아치볼드의 시선이 이번에는 엠마를 향했다. 잘생긴 소공작을 처음 본 엠마는 긴장과 설렘으로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엠마입니다, 소공작님.”
아치볼드가 고개를 끄덕여 엠마의 인사를 받고 다시 내게로 눈을 돌렸다.
“이 사람들의 방도 준비하라고 하지.”
“해리의 방은 제 방 옆으로 해 주세요.”
내 요청에 아치볼드는 물론이고, 세 기사와 엠마의 표정까지 미묘해졌다.
‘아. 뭔가 오해하기 좋은 말이었나?’
“호위니까, 방이 가까운 편이 낫잖아요.”
나는 재빨리 오해를 정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좋은 변명이 아니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으. 왕도에서는 잘생긴 호위가 그렇고 그런 의미로 통하잖아.’
덕분에 나와 해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미묘해졌다.
‘차라리 변명하지 말걸.’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아치볼드가 상황을 잘 넘겨 주었다.
“그래. 그게 편하겠지. 저녁 식사는 함께할 거지?”
내 의견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결정한 사항을 통보하는 식이었다. 나는 거기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