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이 제 권리를 주장할 때 가장 필요한 건 힘이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힘이 없으면 인정받기 힘들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틀린 말을 해도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인정을 해 준다.
‘그러니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힘까지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그 말이 강력하겠어?’
브라이언은 용기사 다섯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죽은 백작의 진정한 후계자는 뒤늦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위협적인 와이번들의 무력시위에 나타 백작은 무너지고 말았다. 용기사들은 브라이언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타 백작령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이제부터 그 용기사들은 브라이언이 작위를 찾는 데 협력하는 지원자가 아니라, 그가 제대로 약속을 이행하는지 지켜보는 감시자가 되겠지.’
나는 브라이언이 자신이 공언한 대로 나타 백작을 그 감옥에 처넣었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영지의 사정에 개입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나타 백작령에서 시원한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나와 달리 인세티아 남작은 불만이 많았다.
“주인에게 영지를 돌려주는 좋은 일이었잖아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남의 영지 사정에는 신경 끄는 게 제일입니다.”
“이걸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들걸요.”
나는 브라이언과 미리 작성한 문서를 인세티아 남작에게 내밀었다. 마정석 광산 개발에 대한 문서였다. 빠르게 내용을 파악한 인세티아 남작의 눈이 커졌다.
“새로운 마정석 광산을 우리와 공동으로 개발하겠다고요?”
“네. 아무래도 그쪽에는 개발 자금이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나타 남작이 도박에 빠져서 마정석 판매로 번 돈을 거의 다 날렸대요.”
“하지만 우리와 나타는 라이벌 아닙니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동료가 될 수도 있죠.”
마정석과 청요석은 똑같은 힘을 가졌다. 필연적으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시장에 등장한 청요석은 마정석보다 낮은 가격을 셀링 포인트로 삼았다. 기존의 강자가 있을 때 후발 주자가 사용하는 흔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위기감을 느낀 기존의 강자가 후발 주자와 비슷하거나 그 이하의 수준으로 가격을 낮춘다면? 후발 주자는 또다시 그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감을 느낀 기존의 강자가 또 후발 주자와 비슷하거나 낮은 가격으로 판매가를 낮추고……. 아무튼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강자와 후발 주자가 손을 잡고 적당한 가격을 유지하기로 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원래 담합은 불법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게 없지.’
“나타와 손을 잡으면 결국 우리가 마정석 시장을 독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얻게 돼요. 경쟁하는 것보단 이쪽이 편하죠.”
내 말에 인세티아 남작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쪽으로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결국 우리 쪽에 이익이 되는 걸 얻어 왔으니 그렇게 쓸데없는 개입은 아니죠?”
“뭐, 이 정도면 인정해 드리지요.”
인세티아 남작이 어느새 놀란 얼굴을 갈무리하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본가에서 온 편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건가요?”
“네.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남작이 품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밀봉한 봉투의 겉면에는 공작의 유려한 필체로 ‘이브리아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봉인을 뜯어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에렐에서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린 것이 염려스러우니 예정보다 조금 일찍 왕도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왕도에 돌아가는 건 2개월 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2개월 후에는 이브리아의 생일이 있었다. 평범한 생일이 아니라, 이브리아가 성인이 되는 중요한 날이었다. 안 좋은 일로 한동안 사교계를 떠나 있었지만 어쨌든 이브리아는 위세 높은 오베론 공작의 딸이었다. 한동안 자숙을 거친 데다, 성인이 되는 중요한 생일이라는 점이 겹쳐 성대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지.’
“각하께서 왕도에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심각한 내 표정을 보고 인세티아 남작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상황에 각하께서 편지를 보내셨다면, 그런 이야기밖에 없겠죠. 당장 출발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출발 준비요? 난 아직 간다고 안 했어요.”
“그럼 안 가실 겁니까? 각하께서 오라시는데.”
“남작, 그렇게 날 왕도에 보내고 싶어요?”
“누가 그렇답니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준비를 하자는 겁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나 보내고 다시 영주님 하려는 게 아니고요?”
“영주님이 벌여 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업무량이 예전보다 배로 늘어났습니다. 저는 그거 힘들어서 못 합니다.”
“어, 그 말은……?”
“이왕 왕도에 가시는 거, 생일 파티에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청요석 홍보도 제대로 하고 돌아오십시오. 큰 귀족 가문들을 새 거래처로 만들어 오시면 더 좋고요.”
“나 다시 에렐에 돌아와도 돼요?”
내 질문에 인세티아 남작이 도끼눈을 떴다.
“그러면, 다시 안 돌아오실 생각이셨습니까?”
이렇게 온갖 일을 다 벌여 놓고, 그 수습은 다 나한테 맡기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공작의 명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맡은 일이지만, 영지 사정을 살피며 이곳에 꽤 정이 들었다.
‘공작이 날 왕도로 다시 안 부를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가 내가 살 땅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궜단 말이야.’
“당연히 돌아올 거예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어서 답장 쓰십시오. 일주일 후에 출발하겠다고.”
“일주일 후요? 그렇게 빨리?”
“별로 미룰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부터 출발 준비를 시작하면,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남작, 정말 나 영원히 보내려는 거 아니죠?”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답장을 썼다.
내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인세티아 남작이 내 손에서 편지를 가져갔다.
“왕도에 계실 동안 제가 영주 대리 역할을 하겠습니다. 돌아오셨을 때 공백을 느끼지 못하시도록 최선을 다하지요.”
* * *
막상 왕도로 떠날 생각을 하니 준비할 것이 상당히 많았다. 출발 준비는 모두 인세티아 남작이 지휘하고 있었지만, 함께 떠날 사람을 정하는 건 내 몫이었다. 해리와 엠마는 고민 없이 목록에 포함했다. 문제는 나머지 인원이었다. 인세티아 남작은 내게 당당히 요청했다.
“함께 떠날 기사단원을 열 명만 골라 주십시오.”
물론 나는 질색을 했다.
“기사단원 열 명이요? 나는 해리와 엠마만 데려갈 생각이었는데요. 어차피 와이번을 타고 갈 테니까, 딱히 수행원들이 많이 필요 없잖아요.”
“용기사를 데리고 가시는 편이 청요석 홍보에 더 도움이 될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왕도에 가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내가 챙겨야 할 사람도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나는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럼 한 명만 더 데려가죠.”
“다섯으로 하십시오.”
“그럼 둘이요.”
“적어도 넷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셋이요. 그 이상은 나도 양보 못 해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숫자가 3이 되자 인세티아 남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셋으로 하죠.”
내가 세 명이라고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처음부터 남작의 목표가 셋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처음부터 셋을 데려가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러셨으면 줄이고 줄여 결국 한 명을 데려가셨을걸요.”
“이젠 날 너무 잘 알아서 무서울 정도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출발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처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중이었다. 특히 막 개발을 시작한 온천 쪽이 걱정스러웠다. 이 시대에는 아직 리조트의 개념이 없어서, 모든 것을 내가 세세하게 지정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개발 초기 단계가 제일 중요한데.’
이런 시기에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별장 건설은 잘 진행되고 있겠죠?”
“아직 기초 공사 중인데,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온천은 영지민들의 이주가 완료되어 별장 건설에 들어갔다. 온천 주변으로 별장을 여러 채 지어 숙박 시설로 활용할 예정이었다.
‘몇 채는 왕실이나 고위 귀족에게 팔고, 나머지는 연간 회원권 개념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면 되겠지.’
이번에 왕도에 가면 이 회원권에 대한 홍보도 할 생각이었다.
“연말에는 완성이 되겠죠?”
“서두르면 그보다 이르게도 가능합니다.”
“천천히 하죠. 서두르다가 부실 공사가 되는 것보단 그게 나아요.”
당장 손님이 몰려오는 것도 아니니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주님!”
인세티아 남작과의 논의가 마무리에 접어들 무렵 라파쉬가 들이닥쳤다.
“말씀하셨던 시제품이 도착했어요.”
라파쉬가 가져온 것은 청요석을 장착한 액세서리였다. 여기에 마법 각인을 추가하면 마도구로 쓸 수가 있었다.
원래 마도구는 마법사 협회에서 제작해 판매한다. 하지만 액세서리로 사용할 수 있게 나온 마도구들은 대부분 투박하고 단순해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지난번 티파티에서 선물로 나눠 준 커프스단추가 호평이었던 건 심미적인 기능까지 갖춘 마도구가 흔치 않아서였다.
나는 이번에 그 커프스단추를 포함한 몇 가지 새로운 청요석 액세서리를 왕도에 소개할 생각이었다. 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현대에서 보았던 디자인을 대충 그려 라파쉬에게 주면 그녀가 물건을 만들고, 그걸 마법사 협회에 의뢰해 마법을 각인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제작 과정의 특성상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
‘이건 소수에게 주문을 받아 비싼 가격으로 팔아야 하는 물건이야.’
시제품으로 만든 반지와 팔찌, 거기에 원형 브로치와 기존의 커프스단추까지.
‘내가 그렇게 날려 그린 그림을 어떻게 알아보고 이렇게 만드는 걸까?’
빈말로도 내 그림 실력은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라파쉬는 내 그림을 보고 이렇게 훌륭한 액세서리를 만들어 냈다.
“리쉬는 천재예요.”
내 칭찬에 라파쉬가 드물게 얼굴을 붉혔다.
“반지, 팔찌, 브로치, 커프스단추, 각각 다섯 개씩 만들었어요.”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고생 많았어요.”
“용갑 만드는 일이 끝나서 한가했으니까요.”
라파쉬를 고용한 목적은 와이번에게 입힐 갑옷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 일이 끝났으니 라파쉬도 드워프 마을로 돌아갈 자유가 있었다.
“리쉬. 이제 안개산으로 돌아갈 거예요? 용갑 제작은 이제 끝났잖아요.”
내 질문에 뿌듯하게 웃고 있던 라파쉬의 얼굴이 굳어졌다.
“맞아요. 내가 고용된 이유는 용갑 제작 때문이었죠. 이브리아는 내가 그만 돌아가기를 원해요?”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리쉬를 붙잡고 싶죠.”
앞으로도 다양한 제품을 제작해야 한다. 하지만 라파쉬처럼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드워프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없을 터였다.
“난 리쉬가 계속 여기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라파쉬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 붙잡으면 되죠.”
“하지만 드워프들은 인간 사회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리쉬는 처음부터 백 퍼센트 자의로 온 게 아니니까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라파쉬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어디든 새로운 걸 만들 수 있다면, 그곳이 드워프들의 터전이라고요.”
이야기의 마무리에 라파쉬가 씨익 웃었다.
“여긴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늘 새로운 걸 만들 수 있죠. 그러니까 그런 생각 때문이라면 문제없어요. 날 붙잡아요, 이브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