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부름
에렐에 돌아온 후 나는 요양을 핑계로 방 안에 틀어박혔다. 상처는 유피테르의 힘으로 모두 치료한 뒤였지만 외부에는 내가 크게 앓아누운 것으로 소문을 흘렸다.
“도대체 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당장 그 자식의 목을 따도 시원찮을 판에.”
해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으며 포도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얻은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해리는 나의 그 태평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쓰레기를 응징하려고 나까지 쓰레기가 되면 안 되죠. 목을 딴다니, 난 그런 야만적인 방법은 안 써요.”
“네가 쓰레기가 되기 싫으면 내가 할게. 어차피 난 쓰레기니까.”
“누가 해리보고 쓰레기래요? 이렇게 예쁜 쓰레기가 어디 있다고.”
나는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개로 변신해 주면 안 돼요? 귀여운 거 보면서 힐링하고 싶은데.”
“그냥 내 얼굴이나 보면서 힐링하지?”
“물론 해리의 잘생긴 얼굴을 봐도 힐링이 되기는 하는데요. 가끔은 귀여운 동물을 보면서 힐링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게 바로 지금이고?”
“그렇죠.”
내 대답에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개로 변신했다. 오랜만에 보는 하얀 개였다.
“이쪽으로 와요.”
나는 옆자리를 두드리며 해리를 불렀다. 잠시 머뭇거리던 해리가 침대 위로 뛰어올라 내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대로 해리를 껴안으며 동그란 머리에 입을 맞췄다.
“뭐, 뭐야!”
당황한 해리가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해리를 더 강하게 껴안고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박고 눈을 감았다.
“역시 껴안기는 개 해리가 좋아요. 품에 딱 들어오잖아.”
나른한 내 목소리에 해리의 발버둥이 멈췄다.
“그거 알아요? 따뜻한 거 안고 있으면 잠이 잘 오는 거.”
“졸려?”
“아뇨. 해리가 좀 자야 할 것 같아서요. 나타 백작령에서 돌아온 뒤로는 자는 걸 못 봤거든요.”
“악마는 인간보다 적게 자.”
“그래도 아예 안 자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내 말에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답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에게 말했다.
“복수 안 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이러고 있는데?”
“제대로 복수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거죠.”
“제대로 된 복수?”
해리가 몸을 비틀어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비밀 통로에서 만났던 사람, 기억해요?”
내 말에 해리가 순식간에 사람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갑자기 왜 사람으로 돌아와요?”
“개로는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들릴 테니까.”
“이런 말?”
“도대체 그 개자식이 누군데 계속 신경을 써?”
“개 모습으로 ‘그 개자식’이라는 말을 했으면 확실히 웃기긴 했겠어요.”
상상하니 정말 웃겼다. 배를 잡고 웃는 나를 보며 해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혹시 그 자식이 마음에 들었어?”
해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네. 마음에 들었어요.”
“뭐?”
에렐까지 찾아와서 짜증 나는 소리를 읊어 댄 카시안과 나를 때리고 협박한 나타 백작을 한 번에 엿 먹일 수 있는 카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양을 핑계로 방 안에 틀어박혀 그의 접촉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여러 가지 상황상 공식적으로 나타 백작에게 벌을 주기는 힘들었다. 증거도, 증인도 없는 터라 나타 백작이 잡아떼면 그의 범죄 행위 자체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복수하려면 편법을 써야 했다. 나타 백작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내가 받은 걸 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돈을 써 암살자를 고용해 그를 흠씬 두들겨 패면 된다. 하지만 그런 응징은 너무 시시하다.
“내가 감옥에서 도망쳤는데 아무런 반응도 안 보이면 나타 백작은 오히려 더 불안해할 거예요. 이렇게 똥줄이 타게 만드는 게 1단계 응징이죠.”
“그럼 2단계는?”
“그 2단계를 위해서 브라이언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걔가 올 것 같아?”
나는 비밀 통로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브라이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있었음에도 차분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사리 분별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아마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분명히 와요, 그 사람.”
* * *
가짜 요양 중인 내게 인세티아 남작이 찾아왔다. 그는 내가 가짜 요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설마 그거 일거리예요?”
나는 그가 한가득 가져온 서류를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나 요양 중이잖아요.”
“네. ‘가짜’ 요양 중이시죠.”
인세티아 남작이 내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흘‘이나’ 쉬셨으면 충분합니다.”
“사흘‘밖에’ 안 쉰 거라고요.”
나는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너무 오래 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온 남작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니까.’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남작이 제일 위에 올린 서류를 내밀었다.
“가장 급한 건 온천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개발에 들어갔죠. 어때요? 온천수가 콸콸 나오던가요?”
“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온천수가 많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예상보다 더 크게요? 그럼 철거 범위가 더 커진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생긴 거죠.”
나는 재빨리 서류로 눈을 돌렸다. 서류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온천수가 뿜어져 나와 더 많은 영지민들이 집을 비우고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수가 자그마치 30가구였다. 현대의 기준으로 30가구는 무척이나 적은 수였지만, 이 시대에는, 그것도 에렐 같은 깡촌 시골 영지에는 엄청난 수였다.
“이주 비용을 지원해야겠네요.”
“정든 고향을 못 떠나겠다고 버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선 임시로 이주한 뒤에, 온천이 완성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줘요.”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까?”
남작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어차피 온천 주변으로 숙박 시설이나 음식점 같은 게 필요할 테니까요.”
나는 온천 일대를 리조트로 개발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개발이 이뤄지면 리조트에서 일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진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운영한다면 더 책임감 있게 일하겠죠.”
나는 서류에 서명하고 남작에게 내밀었다.
“급한 건 이것뿐이라고 말해 줘요. 마음의 준비 없이 서류 더미랑 마주해서, 차 한잔 정도는 마시고 시작하고 싶거든요.”
“다행히 영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해 드릴 수 있겠군요. 급한 서류는 그것뿐입니다.”
“훌륭하네요.”
하지만 남작의 말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 한잔은 조금 미루셔야겠습니다.”
“왜요?”
“전에 말씀하셨던 그분이 찾아오셨거든요.”
에렐에 돌아오자마자 남작에게 당부해 둔 일이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나를 찾아오면, 아무리 행색이 초라하더라도 내쫓지 말고 극진히 모시라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찾아왔나요?”
“행색이 초라한 남자였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하지 않아서 쫓아낼까 고민했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요.”
“잘했어요.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요?”
* * *
브라이언은 접견실에 있었다. 접견실은 저택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귀한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중요한 손님은 대부분 응접실로 안내되곤 했다. 인세티아 남작이 그를 접견실로 안내한 건 그의 행색이 의심스러워서였을 것이다.
“수염 잘랐네요?”
브라이언은 접견실에 서서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날 만나지 못할 뻔했어요. 내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 오면 알려 달라고 했거든요.”
“자르지 말 걸 그랬나요?”
브라이언이 깔끔해진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렇게 무사히 만났으면 됐죠. 게다가 그쪽이 더 보기 좋아요.”
“다행이네요.”
“우선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브라이언은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내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맞은편 자리를 택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더군요.”
“6년은 긴 시간이니까요.”
“그렇죠. 날 도와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죠.”
내게 찾아오기 전 이미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은 당연히 나타 백작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쯤 더 똥줄이 타고 있겠네.’
“마지막으로 날 찾아온 거예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쪽이 유리해지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내 말에 브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그는 감정을 읽기 힘든 무덤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감옥에서도 느꼈지만, 브라이언 나타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구석이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도와줄 수 있습니까?”
브라이언을 돕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리를 가진 사람에게 제 권리를 요구하는 거니까. 브라이언이 제 편이라고 믿었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돕지 못한다며 발을 뺀 것도 이 문제를 풀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타 백작과 밀접한 관계가 되어서겠지.’
보아하니 뇌물도 먹이고, 그게 안 먹히면 협박을 하고, 아무튼 갖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회유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뇌물도 협박도 안 먹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잃어버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 줄게요.”
“숙부를 죽여서요?”
“그걸 원해요?”
죽이는 건 간단했다.
‘해리가 신이 나서 당장 달려갈걸.’
하지만 나는 브라이언이 그걸 바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뇨.”
예상은 적중했다.
“죽으면 내가 백작이 되는 걸 못 보잖아요. 숙부가 살아서 그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요. 그 뒤에는 내가 갇혔던 감옥에 처넣는 게 좋겠죠.”
브라이언이 무감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때 비밀 통로에서 말했던 대로 왕세자 쪽과 손잡지 않겠습니다.”
“그냥 마정석 광산 개발을 그쪽에 넘기지 말라는 거예요.”
마정석 광산 개발 때문에 나를 찾아와 온갖 헛소리를 해 댔으니, 이 문제를 다시는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셈이었다.
“당신이 왕세자를 지지해도 상관없어요.”
“왕세자를 지지하면서 마정석 광산 개발은 다른 쪽과 하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뭐,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긍정하자 브라이언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왕자를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요.”
“왕위 문제에는 관심 없어요.”
나는 그저 짜증 나는 전 약혼자가 다시는 같은 문제로 나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헤어진 남녀는 대부분 그렇죠.”
“흥미롭네요. 사실, 나만큼 복잡한 사정이 있는 분을 만나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숙부에게 배신당해 아버지를 잃고 감옥에서 6년이나 갇혀 지낸 사람이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그새 내 소문을 들었나 봐요?”
“듣지 않는 게 더 힘들겠더군요. 워낙 유명 인사셔서.”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연 많은 동지를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나타 백작.”
“벌써부터 나타 백작입니까?”
“어차피 그렇게 될 거니까요.”
내 천연덕스러움에 브라이언이 픽 웃고는 내 손을 맞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응징의 2단계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