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156)

* * *

‘내가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린 거야?’

루크는 나타 백작령의 지도를 바라보며 탁자를 두드렸다.

‘용기사를 공개한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을 뿐인데.’

북쪽의 시골 영지 에렐이 왕국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용기사와 드워프가 선물한 청요석. 마치 신화 속의 신비로운 이야기 같은 소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에렐이 왕국의 최북단에 있어 쉽게 갈 수 없다는 점도 사람들의 환상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던 와중에 에렐에서 용기사를 최초로 공개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유행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왕도 귀족들의 관심이 쏠린 건 당연했다. 하지만 초대장은 소수의 지방 귀족들에게만 보내졌다. 왕도 귀족들은 어떻게든 초대장을 얻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소문으로 먹고사는 루크가 에렐에 눈을 돌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에렐의 정보를 요구하는 고객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곳에 심어 둔 길드원은 여럿 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세티아 남작으로 변장하고 저택 안으로 잠입했다. 물론 누구도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 그를 잡아 낸 적이 있는 이브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구린 냄새가 나서 알아볼 수 있다더니.’

역시 그건 전부 헛소리였다.

직접 본 용기사는 대단했다. 어설프게 와이번을 다루는 흉내만 낸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은 와이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하늘을 유영했다.

압권은 용기사들이 그 여자, 이브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었다. 용기사들의 충성 서약이라니.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신비로운 북방 이야기의 완성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지.’

아름답게 끝날 줄 알았던 파티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브리아의 실종으로 엉망이 되었다. 티파티가 끝나자마자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간 손님들은 모르는 숨은 결말이었다.

“실종이 아니라 납치입니다.”

이브리아의 호위 기사 해리는 그렇게 단언했다.

루크는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이브리아의 전속 하녀 엠마 역시 해리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직속 호위와 전속 하녀. 이브리아의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면, 뭔가 확실한 심증이 있다는 뜻이었다.

‘납치라면,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마정석 문제로 에렐에 큰 불만을 가진 나타 백작이었다. 오늘 티파티에도 모습을 드러냈던 데다 이브리아를 향한 적개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브리아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나타 백작을 봤다는 하녀들의 증언도 있었다. 마정석 문제로 그렇게 사이가 틀어졌는데도 초대를 수락한 것이 신기하다 했더니. 처음부터 이런 작당을 계획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루크는 자신이 아는 나타 백작의 정보를 떠올렸다.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나타 백작은 왕가에 충실한 명문 귀족이지만, 성격이 그리 차분하지 못했다. 다혈질에 즉흥적이고 욕심이 많았다.

‘마정석으로 부를 쌓았지만 도박으로 그 이상의 돈을 날렸어.’

애초에 검이나 휘두를 줄 알았지 장사 수완이 좋은 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런 무식한 방법을 썼지.’

루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무능한 귀족 같으니.’

저런 인간들이 귀족이란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것이 우스웠다.

‘뭐, 지금은 그 인간을 비웃을 때가 아닌가.’

꼴이 우습기는 지금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여기 남아서 이브리아 오베론을 찾는 데 협력하고 있냔 말이야?’

이미 구경은 끝났다. 인세티아 남작의 껍질 따위, 당장 벗어 던지고 왕도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그러지 않았다.

‘그 여자한테 너무 터무니없는 보수를 받아서 그래.’

고작 드워프 마을의 위치를 알려 주고 백지 수표를 받았다. 의뢰 내용에 비해 과한 보수였다.

‘그러니까 이번에 도와주고 깨끗하게 털어 버리는 거야.’

나타 백작이 이브리아를 납치한 게 확실하다면 감금 장소는 제 영지일 것이다. 그게 범죄 은폐에도, 범죄를 들켰을 경우 무마하기도 좋다.

“우선 나타 백작령으로 들어가서 수색하지.”

인세티아 남작으로 변장한 루크의 말에 몰려든 기사들이 의문을 표했다.

“나타 백작이 허가하지 않을 텐데요.”

“그쪽이 먼저 편법을 썼으니, 우리도 편법을 쓴다.”

루크는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안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어.”

이건 인세티아 남작이 아니라 정보 길드의 수장 루크로서 아는 정보. 이 모습으로는 절대 말해선 안 되는 정보였다. 하지만 루크는 그 규칙을 깼다.

‘젠장. 난 이것만 알려 주고 사라질 거야. 이걸로 빚은 갚은 거라고.’

루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소수의 정예만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누가 가겠나?”

그의 질문에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죠.”

* * *

감옥 안에는 부스스한 긴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모양인지 수염도 덥수룩했다.

“오래 갇혀 있었나 봐요?”

“예. 6년쯤 됐습니다.”

“6년이라고요?”

고작해야 3개월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6년이나 갇혀 있었던 걸 보면 밥은 가져다줬나 보네요.”

“네. 딱딱한 빵 정도였지만…….”

남자가 지금 상황에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민망해져 어깨를 으쓱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서요.”

아침부터 엠마의 손에 이끌려 치장을 하느라 제대로 식사를 못 했다. 티타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용기사들의 시범 대련에 집중하느라 음식에 손을 못 댔고.

‘스콘 하나 정도는 먹을걸.’

나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따뜻한 스콘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돌아가면 스콘에 버터랑 딸기 잼을 듬뿍 얹어 먹어야지.’

그러려면 먼저 여기를 나가야 한다.

“그쪽은 뭐 때문에 여기에 끌려왔어요?”

나는 남자의 발을 구속하고 있는 족쇄를 풀어 주며 물었다. 다행히 두 번의 시도 만에 족쇄가 풀렸다.

“숙부에게 배신을 당해서요.”

남자가 가벼워진 발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숙부? 그럼 당신이 나타 백작의 조카인가요?”

“네. 제 아버지께서 선대 나타 백작이셨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오랜 감옥 생활로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키는 나보다 조금 컸다.

“선대 백작의 아들이라면, 당신이 그 뒤를 이어 백작이 돼야 했던 거 아니에요?”

“숙부께서 아버지를 죽이고 작위를 가져간 거라서요. 제대로 따지자면 아직 제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어야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유감이네요.”

“오래전 일이니, 이제 그런 위로를 들을 시기는 지났죠.”

남자가 담담하게 내 인사를 받아넘기며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는 걸음에 나는 당황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밖에 지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없습니다.”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한때는 나타 소백작이었으니까요. 성의 구조는 훤히 알고 있어요.”

남자는 망설임 없이 철문을 열었다. 그의 말처럼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문을 열자마자 가파른 계단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죠?”

남자가 이제 제 말을 믿겠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린 얼굴로 계단을 가리켰다.

“누가 없는 건 좋은데, 이걸 어떻게 올라가요?”

“지금 이 상태로는 확실히 무리겠죠.”

남자가 제 몰골과 내 몰골을 모두 살핀 후 설핏 웃었다.

“그러니까 다른 길로 갑시다.”

“여기 다른 길이 어디 있는데요?”

눈앞에 보이는 건 계단뿐이었다. 남자가 ‘다른 길’이라고 지칭할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이 성의 구조를 잘 안다고.”

가파른 계단의 오른쪽 벽을 몇 번 더듬던 남자가 벽돌 하나를 꾹 밀었다. 그가 밀어낸 벽돌이 저항 없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자 쿠르르릉- 하고 무엇인가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된 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기 마련이죠. 아, 그런데 웬만하면 좀 뒤로 물러나시는 편이……”

남자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발아래가 허전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한 벽돌로 만들어져 있던 바닥이, 어느새 뻥 뚫려 있었다.

“으아앗!”

나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다행히 크게 다칠 정도의 높이는 아니었지만, 대책 없이 부딪힌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아야야…….”

주저앉은 채 엉덩이를 매만지고 있으니 남자가 내 옆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는 벽면의 벽돌을 밀어 뚫려 있는 천장을 막은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불만을 토로했다.

“조금 더 일찍 경고해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됐어요. 덕분에 이렇게 빠져나왔으니까.”

깔끔한 사과에 뾰족하게 군 것이 민망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긴 어디로 통하는 길이에요?”

“영지 밖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비상시에 사용하는 탈출로죠.”

이런 유의 탈출로는 아주 흔한 장치였다. 평화로운 요즘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전 전쟁이 잦던 시절에는 꽤 유용했을 것이다.

‘영지 밖으로 나가서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곧장 해리를 불러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타 백작은 이 길을 모르나요?”

“이런 길은 보통 후계자에게만 알려 주니까요. 그분은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으니 모를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뒤에서 갑자기 나타 백작이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얼마나 걸어야 할까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 직접 이용해 본 적은 없어서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일하게 난 길을 따라 앞으로 걸었다.

“그런데 백작이 왜 당신을 살려 뒀죠? 보통 자리를 빼앗으면 후계자도 함께 죽이잖아요.”

“아버지께서 제게만 새로운 마정석 광산의 위치를 알려 주셨거든요. 제가 죽으면 그 정보마저 잃게 되니까 살려 둔 겁니다.”

“나타 백작령에 마정석 광산이 또 있어요?”

“예. 비용 때문에 개발은 못 하고 있었지만요.”

‘어라? 혹시 카시안 쪽에서 개발하려고 했던 마정석 광산이 이건가?’

카시안이 마정석 광산 개발 타령을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여기에서 나가면 자리를 다시 찾을 건가요?”

“가능하다면요. 하지만 쉽지는 않겠죠.”

“그럴 생각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

“저를요?”

남자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네.”

“왜 저를 도우려고 하시죠?”

“한 번에 짜증 나는 놈들 두 명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기회 같아서요.”

“그 둘 중 한 사람이 제 숙부겠네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공짜로 도와주시겠다는 말은 아니시겠죠.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방금 말한 마정석 광산이요.”

“마정석 광산을 달라는 말이라면 미리 거절합니다. 파는 것도 안 합니다.”

“다행이네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어서요.”

내 말에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마정석이 필요하십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난 단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마정석 광산을 개발할 때 왕세자 쪽과 손을 잡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예요.”

“뒤통수치고 싶다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왕세자였습니까?”

“왜요? 반역자라고 말하려고요?”

“아뇨.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왕세자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서요.”

“아.”

남자의 말에 나는 우리가 아직까지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브리아 오베론이에요. 아버지가 오베론 공작이시고, 얼마 전까지는 왕세자의 약혼녀였죠. 구 남친이랑 좀 안 좋게 헤어져서 뒤통수를 한번 쳐 볼까 하고.”

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브라이언 나타입니다. 숙부가 왜 공작가의 영애를 납치한 거죠?”

“말하자니 사연이 너무 길어서요.”

나는 남자와 맞잡은 손을 놓아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내 제안에 응할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줘요. 6년이나 지났으면 도와줄 사람도 딱히 없을 것 같은데.”

“생각해 보겠습니다.”

브라이언이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크르르릉- 하는 소리가 좁은 길을 울렸다. 브라이언이 비밀 통로를 열었을 때 났던 소리와 똑같았다.

“이 소리, 그거죠?”

내 질문에 브라이언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통로는 후계자밖에 모른다면서요?”

“정보란 어디서든 새니까요.”

“그쪽이 다시 백작이 되면, 비밀 통로부터 다시 만들어야겠네요. 이건 이제 ‘비밀’ 통로가 아니라 ‘그냥’ 통로가 됐으니까.”

내 말에 브라이언이 짧게 웃고는 뒤를 힐끗거렸다.

“뛸까요?”

“그럴 힘은 없지만, 네. 어쩔 수 없죠.”

유피테르에게 몸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순간적인 속도만 높여 줄 뿐이었다.

‘단거리 달리기용이랄까.’

그 기능을 이용해 짧은 거리를 뛰고 나면 그 뒤는 완전히 녹초가 돼 버렸다.

‘오래 뛰어야 하는 지금은 쓸 수 없지.’

“자, 그럼 갑시다!”

브라이언이 내 손목을 잡고 앞을 향해 뛰쳐나갔다.

“조금 더 천천히 달리면 안 돼요?”

나는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달리고 있었다. 최대한 발을 놀려 봤지만, 브라이언의 속도에 맞추기는 무리였다.

“이거보다 느리면 따라잡힐지도 몰라요.”

“따라잡히기 전에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 윽!”

숨을 몰아쉬며 나는 갑자기 멈춰 선 브라이언의 등에 그대로 부딪혔다.

“헉, 붙잡힐지도 모른다더니 허억, 왜 갑자기 멈춰요?”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나타 백작이 쫓아온대도 어쩔 수 없었다. 이놈의 저주받은 몸뚱어리는 여기가 한계였다.

“누가 옵니다.”

우뚝 멈춰 선 브라이언이 앞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앞에서 그림자 하나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뒤가 아니라 앞에서 누가 나타나죠?”

“그건 저도 잘…… 돌아가야 할까요?”

“하지만 돌아가도 다시 감옥이잖아요.”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림자가 더 가까워졌다. 조금 더 선명해진 그림자가 어딘가 익숙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해리?”

해리라는 말에 다가오던 사람의 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곧 엄청난 속력으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브리아!”

저 목소리는 분명 해리였다.

“해리!”

나는 반가움에 해리를 향해 뛰어가려다가, 힘이 빠져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달려오느라 힘을 다 썼어…….’

순식간에 가까워진 해리가 주저앉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몰골이 왜 이래?”

가까이에서 내 얼굴을 확인한 해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해리…….”

나를 걱정하는 것 같은 해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서러운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나타 백작, 그거 완전히 미친놈이에요!”

나는 해리의 앞에서 나타 백작이 내게 저지른 만행들을 죄 일러바쳤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죽여 줄까?”

해리가 놀랍도록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나중에 몇 대만 때려 주면 될 것 같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대답한 해리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안아 들었다. 가볍게 몸이 번쩍 들리자 나는 놀라서 해리의 목에 팔을 감았다.

‘상당히 안정적이네.’

사람 한 명을 들었는데도 해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뭐야? 네 손목을 잡고 끌고 오던데.”

어느새 해리가 브라이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그를 한 대 칠 기세였다.

“같이 갇혀 있던 사람이에요.”

나는 재빨리 브라이언을 옹호했다.

“덕분에 비밀 통로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고요.”

“그래?”

그제야 해리의 차가운 시선이 브라이언을 떠났다. 시선을 돌린 해리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홀로 남겨진 브라이언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해리! 브라이언도 같이 가야죠!”

“내가 왜?”

“왜냐니…….”

이런 상황에서는 같이 탈출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해리한테 그런 상식을 바라는 게 이상하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브라이언을 향해 소리쳤다.

“탈출한 뒤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와요! 북쪽의 에렐 영지, 이브리아 오베론에게로요!”

내 외침에 브라이언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해리의 걸음이 빨라졌다.

“뭘 저런 놈한테 찾아오래?”

“안에서 나눈 이야기가 있어서요. 해리는 어떻게 여기 온 거예요?”

“구린 냄새 나는 남자가 여기에 몰래 영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고 알려 줬어.”

“구린 냄새 나는 남자요?”

“엠마로 변신했던 그놈.”

나는 그제야 해리가 말하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루크요? 루크가 어떻게 이걸 알려 줘요?”

“오늘 하루 종일 인세티아 남작으로 변장해 있었던 모양이던데.”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나도 가까이 가서야 냄새를 맡고 알았어.”

아무튼 변장 하나는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

‘그런데 루크가 왜 날 도와줬지?’

내가 납치당했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놈인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야.”

해리가 루크의 속셈을 추측하고 있는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해리를 보니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친 거 왜 치료 안 했어? 성검이 안 고쳐 줬어?”

“납치당했는데 너무 멀쩡하면 이상할 것 같아서 고막 나간 것만 고쳤어요.”

“뭐? 고막이 나가?”

내 말에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러다 이 상하겠어요. 다친 건 난데 왜 해리가 화를 내요?”

“다친 게 너니까 화를 내지, 이 멍청아. 다친 게 나면 이렇게 화나지도 않거든!”

해리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을 걱정하는 착한 멍멍이 같았다.

‘내가 개 한 마리는 참 잘 키웠다니까.’

뿌듯한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해리.”

“왜?”

“해리가 다쳤을 때는 내가 대신 화내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해리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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