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미치겠네.’
정작 이브리아가 불렀을 때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해리는 초조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계약자를 놓친 건 처음이야.’
사실 이번이 두 번째 계약이니 그렇게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첫 번째 계약에서는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첫 번째 계약자는 언제 어디서든 해리를 곁에 뒀다. 해리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날 전혀 믿지 않았지.’
계약의 형태로 묶여 있었지만, 그는 해리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리가 악마니까. 악마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보이지 않으면 배신하고 도망갈까 봐, 보이면 자신을 죽일까 봐. 첫 번째 계약자는 늘 불안해하며 해리를 경계했다. 그런 시선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탓에 그때의 해리는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지금 계약자는 그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장난을 치고, 웃어 주고, 심지어 칭찬까지 해 줬다. 세상에 악마를 칭찬하는 인간이라니. 있을 수가 없었다.
‘왜 날 무서워하지 않지?’
해리는 그게 신기했다.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면서, 두 번째 계약자는 그에게 쪼는 일이 없었다. 해리는 이브리아가 쓰다듬곤 했던 제 머리를 매만졌다. 개 취급을 받는 게 싫다며 질색했지만, 어린 인간이 정말 자신을 귀여운 개 취급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난 악마잖아.’
인간들은 해리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를 경멸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
‘하지만 악마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시키는 건 결국 인간의 욕망이라고.’
그렇다면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인 건 인간이 아닌가? 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두 번째 계약자 이브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여자를 데려다주라고 할 때 떨어지는 게 아니었어.’
해리는 길을 잃었다더니 느린 걸음으로 시답잖은 이야기나 쏟아내던 여자를 떠올렸다. 길을 잃은 게 아니면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아 제 치마 속으로 집어넣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싸늘하게 물었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지.’
그나마 계약자의 체면을 생각해 참은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머리통을 으깨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짜증스러운 시간 때문에 이브리아를 놓쳤다니.
‘역시 머리를 으깨 버릴걸.’
아니, 아니다. 지금의 계약자는 그가 사람을 죽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오. 내가 왜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냐고.’
해리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지금 그의 곁에는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계약자가 없었다. 억눌러 왔던 살인욕을 채우려면 지금이 최적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니, 내가 제대로 미친 거지.’
악마도 미치는 게 가능한가? 하지만 제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게 된 그 여자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보는 게 싫었다.
‘진짜 처음이란 말이야. 날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옆에 있어도 역겹지 않은 인간.’
언제 이런 인간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니까 소중하게 잘 챙겨 줘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내 계약자를 건드려?’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나타 백작 그 자식, 내 계약자를 건드리기만 했어 봐.’
얼굴에 생채기 하나만 있어도 분노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계약자인데. 인간 따위가 감히. 찾기만 하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재빨리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그러면 계약자가 싫어할 테니까 적당히 반신불수를 만들어 줘야지. 평생 똥오줌 못 가리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생각이었다.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린 해리는 자신만큼이나 상기한 얼굴로 나타 백작령의 지도를 분석하고 있는 인세티아 남작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 사실 이 남자는 인세티아 남작이 아니었다. 해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엠마로 변신했던 구린 냄새의 남자를.
‘정보 길드의 수장이라고 했던가?’
지금은 인세티아 남작보다 이 구린 냄새의 남자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해리는 지금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 * *
‘배고파.’
사람을 가뒀으면 밥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불만스럽게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보았다.
“저기요!”
밖을 향해 열심히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밖에서 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닐 텐데.’
상대의 귀가 먹었거나, 의도적으로 내 말을 무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후자겠지만.’
[유피테르, 그쪽 상황은 어때요?]
나는 성검을 불러 바깥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뭐든 상황 파악이 중요하니까.’
[우선 간수는 한 명입니다. 감옥은 전부 6칸인데, 그중 2칸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말이에요?]
[예. 그쪽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있으니, 확실합니다.]
‘나타 백작 이 사람, 완전히 상습범이잖아?’
어쩐지 사람 때리고 납치하는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싶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안 들킨 걸 보면 생각보다 철저하게 사람을 끌고 오는 모양인데.’
사실 납치라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이 시대에는 경찰 같은 수사기관도 없어서 납치범이 작정하고 잡아떼면 사실을 밝혀내기가 힘들었다.
납치범이 귀족인 경우는 더 힘들다. 지위에 상관없이 각 영지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영주가 다른 귀족의 사병이나 용병이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면 그걸로 끝.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 처벌은커녕 사람을 찾는 일조차 요원했다.
‘확실한 건 여긴 나타 백작의 영지라는 것뿐이야.’
처벌을 피하려면 그러는 수밖에 없다. 영지 안에서 일어난 일은 영주가 재판하기 때문에, 영주가 죄인이면 무슨 죄든 무죄였다.
‘음. 생각할수록 막막해지는데.’
나는 점점 비관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차단하며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간수님! 아저씨!”
간수가 대답을 하느냐, 마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공격이었다.
“뭐 하세요! 밥 줘요! 배고파!”
들어는 봤나?
‘소음 공해 공격이라고.’
두 발은 묶여 있고, 무기마저 잃어 물리력을 쓸 수 없으니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이나 떠드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밥을 달라, 너무 춥다, 당신 누구냐, 여기 어디냐……. 몇 가지 패턴을 다 쓰고 나니 나도 할 말이 뚝 떨어졌다.
‘그냥 드라마 줄거리라도 말할까?’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유명한 드라마 몇 가지가 금방 머릿속에 떠올랐다.
“간수님, 혹시 이 이야기 알아요? 어떤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막장 전개로 유명한 드라마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부인이 눈 밑에 점 찍고 돌아와 복수하는 그 이야기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간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지?’
의아해져서 말을 멈추고 동태를 살피는 순간, 몇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왜 이야기를 하다 말아?”
하나는 문밖에서.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는 머릿속에서.
“저기, 그 뒷이야기도 좀 해 주실래요?”
하나는 옆방에서.
모두 숨죽이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역시 막장 드라마의 힘은 대단했다.
‘간수도, 성검도, 납치당한 사람도 모두 홀려 버리다니.’
나는 감격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이 너무 아파서 더 이야기를 못 하겠어요. 물 한 잔만 주시면 괜찮아질 것도 같은데…….”
“뭐? 그건…….”
일부러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말끝을 흐리자 간수가 곤란하다는 듯 반응했다. 그러자 옆 칸에 갇혀 있던 사람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간수를 재촉했다.
“간수님! 그냥 좀 줘요! 물 그게 뭐라고!”
“아니, 그래도…….”
“눈 밑에 점이 있는 그 여자가 어떻게 복수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건 궁금하지만…….”
간수가 고민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나는 일부러 더 크게 기침 소리를 내며 앓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목이야…… 목도 아프고 그냥 잠이나 자야겠네.”
“으으, 알겠어! 정말 물만 주면 되는 거지?”
내가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소리를 내자, 간수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뒷이야기가 진짜 궁금했나 봐.’
나는 얼굴도 모르는 드라마 작가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재빨리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유피테르, 지금 정확히 어디에 있어요?]
[간수의 왼쪽 가슴에 있는 앞주머니에 들어 있습니다.]
[능력을 쓰려면 내 손만 닿으면 되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으니까.]
내가 심호흡을 하며 준비하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거대한 몸집의 간수가 나무로 깎은 그릇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릇에 든 물이 찰랑거렸다.
‘저 주머니란 말이지.’
나는 빠르게 유피테르가 들어 있는 주머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자, 마셔. 네가 원했던 물이다.”
간수가 조금 떨어진 채 그릇을 내밀었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먹여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팔을 걷어 차여서 움직일 수가 없는데.”
간수의 시선이 내 팔로 향했다. 나타 백작이 걷어찬 탓에 팔이 퉁퉁 부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간수가 몸을 숙여 내게 가까워졌다. 내 입에 그릇을 대기 위해 몸을 기울이자 간수의 상체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나는 물을 마시는 척하며 슬그머니 오른손을 움직였다.
‘백작한테 맞아서 다친 팔은 왼쪽이고, 오른쪽은 아주 멀쩡하거든.’
나는 방심하고 있는 간수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뭐, 뭐야!”
주머니에 손이 쑥 들어가자, 깜짝 놀란 간수가 나를 밀어내기 위해 커다란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잡았다고.’
손끝에 유피테르의 손잡이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유피테르, 강하게 후광! 5초만!”
내 외침과 동시에 엄청나게 강한 빛이 쏟아졌다. 나는 속으로 5초를 센 뒤 눈을 떴다.
“으악!”
대비 없이 강한 빛을 정면으로 맞은 간수가 비명을 지르며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눈을 가린 팔 아래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보였다. 강한 빛에 눈이 상한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가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후에도 그의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내 눈! 으으, 아악!”
나는 유피테르를 이용해 몸부림치는 간수의 허리띠를 끊어 냈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 뭉치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는 몇 개의 열쇠를 바꿔 가며 시도한 끝에 발을 구속하고 있던 족쇄를 풀어냈다.
‘됐다!’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거렸다.
[주인님!]
유피테르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금 당장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러지 말고 귀만 어떻게 좀 해 줄래요?]
[예? 어째서……?]
[납치당했던 사람이 너무 멀쩡하면 이상하잖아요. 다른 데는 그냥 두고 귀 먹먹한 것만 치유해 줘요.]
[……알겠습니다.]
유피테르의 대답과 동시에 먹먹하던 귀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귀 하나만 치유가 됐을 뿐인데도 몸이 한결 가벼운 것 같았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나는 비틀거리며 감옥 밖으로 걸어 나와 조금 전까지 내가 갇혀 있던 감옥의 문을 열쇠로 걸어 잠갔다.
‘우선 간수는 가뒀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좁은 복도를 따라 작은 문 6개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출구로 추정되는 문은 좁은 복도의 끝에 있었다.
‘밖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무작정 나갈 수는 없는데.’
최악의 경우, 문을 열었을 때 엄청난 수의 병사가 밖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별다른 힘도 못 써 보고 다시 안으로 끌려오고 말 것이다.
‘아마 몇 대 더 맞는 건 덤이겠지.’
나타 백작이 내일 다시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복도 끝의 문으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밖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밖을 지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철문의 방음이 훌륭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기, 혹시 탈출하셨나요?”
내가 문에 바짝 붙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다른 칸에 갇혀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탈출할까 생각 중이에요.”
“죄송하지만 이쪽 문도 열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손에 들린 열쇠 뭉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중 하나가 남자가 갇힌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일 것이다.
‘그래. 머리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탈출에 도움이 되겠지.’
나는 열쇠 뭉치를 이용해 남자가 갇혀 있는 공간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