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156)

6장. 용기사 (2)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끝나 버린 행사를 마치고, 나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내 뒤를 따르던 해리가 혀를 끌끌 차며 내 몸을 똑바로 붙잡았다.

“그러다 넘어진다.”

“차라리 넘어질까요? 넘어져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면, 이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르잖아요.”

“이게 꿈 같아?”

해리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꾹 누르며 물었다. 손에 닿는 체온이 너무 선명했다.

“아니. 현실이겠죠. 나도 알아요.”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으로 웅얼거리자, 해리가 내 뺨에서 손을 뗐다.

“왜 그렇게 싫어해? 덕분에 그림은 좋았잖아. 내일이면 파다하게 소문이 날걸.”

확실히 반응은 좋았다. 기사와 레이디에 로망이 있는 여인들 중에는 눈물을 찍어 내는 사람도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답례품으로 건넨 청요석 커프스도 인기였다. 선물을 건네며 청요석에 대해 설명했더니, 꼭 사고 싶다며 눈을 빛내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나타 백작은 그걸 받자마자 표정이 썩었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망했어요. 해리 하나 먹여 살릴 궁리로도 머리가 아픈데, 이제 군식구가 도대체 몇이야. 그 기사들을 다 어떻게 먹여 살려요?”

“너 부자잖아. 지금은 영주고. 뭐가 걱정인데?”

“돈 문제가 아니라요.”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거라고요.”

“네가 왜 그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져? 걔들이 멋대로 충성한 건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충성한 게 아닐걸요.”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는데?”

해리가 악마답게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망하면 주인 잘못 선택한 자기 자신 탓이지. 누굴 원망해?”

“그럼 해리도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원망해요?”

“그건 경우가 다르지. 네가 멋대로 날 불러낸 거니까! 지금이라도 전쟁을 일으키겠다면 나의 원망은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됐어요. 쓸데없는 소리.”

나는 손을 휘휘 저어 해리의 말을 끊었다. 아무도 없다지만 뻥 뚫린 회랑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저, 영주님!”

그때 반대편 복도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장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세 여인 중 한 명, 일세 백작의 딸 리엔이었다.

“길을 잘못 드셨나요?”

손님들의 마차는 여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혹 길을 잘못 든 거라면,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은 셈이었다. 내 질문에 리엔이 수줍게 해리를 힐끗거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길눈이 어두워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부디 제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이분을 빌려주시겠어요?”

‘파티장에서부터 계속 해리를 탐내더니.’

속셈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나는 해리를 힐끗거렸다. 인간이 역겹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는 가까이 다가온 리엔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해리라면 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니까.’

나는 리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해리 경, 레이디 리엔을 안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해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오. 다른 사람 앞에서 순한 양이 되는 해리라. 꽤 좋은데?’

평소에 보지 못하는 해리의 모습에 감탄하는 동안 두 사람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기사도는 어디에 뒀는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해리를 따라잡느라 리엔이 꽤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내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타 백작님, 백작님께서도 길을 잃으셨나요?”

흉흉한 그의 태도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나타 백작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애송이가 잘도 내 뒤통수를 쳤더군.”

“뒤통수라니요. 저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 물건을 판매했을 뿐입니다.”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정당한 절차라고?”

나타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사람 많이 만나 봤어.’

상대가 어린 여자라는 걸 알면 소리를 질러서 제압하려고 드는 부류. 여기서 기가 죽으면 끝까지 밀려 주도권을 빼앗긴다.

“도대체 제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

나타 백작이 코웃음을 치며 손으로 내 이마를 툭 쳤다. 강한 힘에 몸이 휘청거렸다.

“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품위는 없으시군요?”

“그러는 너는 상황 파악하는 눈치가 없는 건가?”

나타 백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가 네 영지라고 너무 방심하는 것 같은데, 여기 너와 나, 단둘뿐이거든.”

나타 백작의 커다란 손이 그대로 내 머리를 강타했다.

* * *

[주인님! 주인님!]

간절한 외침에 나는 겨우 눈을 떴다.

‘아으, 머리야.’

나타 백작의 무식한 손에 맞은 탓인지 머리가 윙윙 울렸다. 어지러움을 떨쳐 내려고 몇 번 고개를 흔들었지만, 윙윙거리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이거 머리가 아니라 귀가 문제인가?’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해 보니 왼쪽 귀가 먹먹했다. 나타 백작에서 맞을 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고막이 나간 거 아냐?’

고통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리며 왼쪽 귀를 매만지자 유피테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네. 귀가 좀 먹먹하긴 하지만…….]

[바로 치료해 드리고 싶지만 지금 제가 주인님 곁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유피테르의 치유 능력은 내가 성검을 쥐고 있을 때만 가능했다.

[지금 나한테 없다고요?]

나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더듬거렸다. 유피테르가 있어야 할 허벅지가 허전했다.

[예. 여기에 가두면서 몸수색을 했습니다. 무기를 발견하고는 바로 가져갔고요. 전 지금 문밖 간수의 주머니에 있습니다. 제가 비싸게 보였는지, 상관에게 주지 않고 제 주머니에 넣더군요.]

[뭐, 유피테르가 비싸게 보이기는 하죠.]

검집을 열어 검신을 확인했다면 단번에 귀한 검이라는 걸 알아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나타 백작에게 맞고 기절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백작이 주인님을 둘러업은 뒤 마도구를 썼고, 순식간에 이 감옥으로 와 있었습니다. 아마 축지 기능을 쓴 것 같습니다.]

[나타 백작은 마정석을 생산하는 집안의 우두머리니까 다양한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겠죠.]

그걸 생각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나?

아니, 아니었다. 소문난 충신이라는 명문가의 귀족이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사람을 패서 납치라니.’

깡패와 다를 게 없지 않나? 귀족이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유피테르, 내가 해리를 부를 수 있을까요?]

[악마와 계약자는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부름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해리만 부를 수 있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이었다.

[해리.]

[이브리아!]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 내 부름에 응답했다. 반가움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해리, 나타 백작 그 사람 완전히 미친놈이었어요.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더니 날 이상한 감옥에 끌고 왔다니까요!]

[지금 태평하게 나타 백작 험담이나 할 때야? 지금 어디야? 바로 갈게.]

[여기가 어디냐면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높은 회색 벽으로 가로막힌 실내에는 창문조차 없었다. 그나마 불을 밝히는 마도구가 있어 앞이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해리.]

[그래. 어딘데?]

[모르겠어요.]

[뭐?]

[어딘지 모르겠다고요. 그냥 내 앞으로 순간 이동 하는 건 안 돼요?]

내 말에 잠시 침묵했던 해리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시작했다.

[이브리아, 내가 아주 위대한 마족이지만 내 힘은 주로 파괴 쪽이거든. 그래서 공간 마법에는 익숙하지가 않아. 네 기운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라면 어렵지 않은데, 지금은 이상한 방해 파장도 느껴지고…… 사실 이 공간 마법이 상당히 어렵거든. 좌표 하나 잘못 잡으면 공간에 끼이고, 찢어지고, 어휴. 말도 못 해! 그게 얼마나 끔찍한……]

[그러니까 해리,]

나는 장황하게 이어지는 해리의 말을 끊었다.

[한마디로 그냥 못 한다는 거잖아요.]

[……응.]

해리가 면목 없다는 듯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지금 내가 거기로 갈 수는 없으니까, 성검 자식한테 도와 달라고 해.]

[그것도 쉽지 않아요.]

[왜?]

[성검의 힘을 쓰려면 내가 그걸 들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기를 뺏어 갔어요.]

[어…… 그럼 너 지금 상당히……]

[위험한 것 같네요.]

그래. 위험한 상황이었다.

위대한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테오하리스도, 1047가지의 다양한-그러나 다소 쓸모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성검도 무용지물. 엉엉 울면서 내게 충성을 맹세했던 용기사들도 도움이 안 되고, 비늘이 없으니 와이번 대장도 부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인 것치고 상당히 멀쩡하다?]

[어떡하냐고 난리 쳐서 해결 가능한 상황이 아니잖아요. 아무런 무기도 없으니까, 정신이라도 바짝 차려야죠.]

게다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나타 백작이 오베론 가문의 직계인 내게 큰 해를 입힐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애초에 날 납치 안 했을 텐데.’

독점했던 큰 이익을 놓쳐 버려서 정신이 나간 건가? 너 죽고 나도 죽자, 뭐 이런 동귀어진? 하지만 형형하게 빛나던 나타 백작의 눈을 생각하면 삶을 포기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욕망이 꿈틀거리던데.’

오베론 가문과 척을 질 각오를 한 것이거나, 내게 해코지를 해도 오베론 가문이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공작의 미움을 받고 에렐로 쫓겨났다는 게 귀족 사회에 떠도는 소문이니, 아마 후자의 경우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이해가 되는데…….’

나타 백작이 잘못 짚은 게 하나 있었다. 공작은 오베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가문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

[해리, 우선 나타 백작이 날 데려온 건 확실하니까, 그 사람의 주변을 조사해 줄래요? 그 집에 있는 감옥이라거나, 그런 곳들 위주로요.]

[알겠어. 그렇지 않아도 인세티아 남작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야.]

[그럼 해리는 뭘 하고 있는데요?]

[장소를 알게 되면 바로 날아갈 준비……?]

[결국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날아갈 준비도 엄청 힘든 거거든!]

위험한 상황에서도 해리의 반응은 평소와 똑같았다.

‘어차피 해리야 내가 위험해져도 별 상관은 없으니까.’

오히려 내가 죽으면 그는 자유가 된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도 안 올 수도 있다는 거잖아.’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으니 해리의 생각이 어떤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보이면 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텐데.’

악마는 모두 표정이 풍부한 건지, 해리가 유독 그런 건지. 그는 생각하는 것들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었다. 어두운 곳에 갇혀 있으니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았다.

“깨어났구먼, 애송이.”

그때 감옥의 문이 열리고 나타 백작이 등장했다.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금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라서 다리를 보니 족쇄로 다리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귀가 너무 먹먹해서 다리가 구속된 줄은 몰랐네.’

나는 일어서기를 포기한 채로 나타 백작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귀족적이지 못하시네요, 나타 백작.”

“왕도 귀족이라 생각하는 게 순진하구먼. 변방에서는 때로 말이나 법보다 주먹이 먼저야.”

나타 백작이 씩 웃으며 나를 발로 걷어찼다. 제대로 복부를 얻어맞은 건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으니 확실하게 말해주지.”

나타 백작이 쪼그려 앉아 내게 속삭였다.

“여긴 누구도 모르는 비밀 장소야. 온갖 마정석을 써서 숨겨둔 공간이지. 오베론이 아무리 대단해도 귀족적인 방식이나 부르짖는 왕도 귀족일 뿐, 변방의 편법은 따라올 수 없을 거야.”

나타 백작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거친 손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냥 본론을 말해요. 뭘 원하는지.”

“왕도 귀족치고는 계산이 빠르군.”

나타 백작이 내 앞에 종이를 던졌다.

“에렐에서 청요석을 우리에게 모두 넘긴다는 계약서다. 계약 기간은 500년. 개당 마정석의 10퍼센트의 가격으로 매입해 주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이런 방법을 써서 서명을 받아내려는 게 아니겠어?”

나타 백작이 다시 한번 나를 발로 걷어찼다. 이번에는 팔을 제대로 맞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들 하지. 잘 생각하시게, 에렐 영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나타 백작이 비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돌아서자 다시 문이 굳게 닫히고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끙끙대며 겨우 벽에 등을 기댔다.

‘와. 변방 귀족들은 생각보다 더 거칠구나.’

나타 백작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인세티아 남작의 경고가 생각났다. 그는 변방 귀족 출신답게 나타 백작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남작의 조언을 잘 새겨들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후회였다.

‘남작, 남작도 어서 변방 귀족다운 편법을 좀 찾아봐요. 이러다 진짜 맞아 죽겠네.’

만약 견디기 힘들어지면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일부러 서명을 틀리게 하면 계약서는 완전히 쓰레기니까.’

하지만 그게 가짜 서명이라는 걸 들키면 오히려 나타 백작의 분노에 불을 붙일 수도 있었다.

‘제대로 된 서명을 하고, 그걸 강제성에 의한 거였다고 주장한 뒤 무효로 돌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계약서가 무효임을 주장하는 사이 나타 백작이 청요석을 탈탈 털어 갈 것이 뻔했다.

‘많이 맞아도 죽지만 않으면 유피테르가 살려 줄 수 있으니까 우선 버텨 보자.’

아무리 비밀스러운 장소라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조금만 깊이 파 보면 답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간수를 꼬드겨서 유피테르를 돌려받는 방법인데…….’

비싸다는 확신을 갖고 검을 챙긴 간수가 내게 그걸 돌려줄 가능성이 있을까? 하지만 어차피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도 최대한 해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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