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156)

* * *

청요석 제작과 판매는 순조로웠다. 용갑 제작도 마무리 단계였고, 온천 개발도 무사히 시작했다.

‘예상대로 에렐에 온천이 더 있었어.’

저택 근처의 온천은 크기가 작았다. 관광객을 불러 모을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온천이 하나만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곳에서 온천이 터지면 그 주변에서도 계속 온천이 발견되잖아.’

나는 지질학자 둘을 고용해서 온천이 있을 만한 곳을 추려 냈다. 모두 시추를 해 보면 좋겠지만, 비용 문제로 가능성이 가장 큰 세 곳으로 후보를 압축했고, 그중 한 곳에서 온천이 터졌다. 온천의 규모가 상당히 커서 관광지로의 개발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다.

이 일은 전적으로 남작에게 맡기고 있었다. 온천 개발은 영지민들과 소통하며 장기적으로 이어 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지역 토박이인 남작이 제격이었다.

그렇게 몇 가지 일들을 궤도에 올려 두고 나니 그제야 나는 약간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돌아가면 또다시 서류에 파묻혀야 하겠지만.’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아야 하는 법!

나는 해리와 함께 말을 끌고 저택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정원으로 나왔다. 저택의 정원이라면 꽃과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은 정원을 생각하기 쉽지만, 에렐 저택의 정원은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에렐 저택의 정원은 웬만한 마을 하나 크기를 자랑했다. 저택 가까운 곳의 정원은 일반적인 정원이지만, 조금 멀어지면 야생 상태로 보존된 풀밭이 나왔다. 드문드문 나무가 자라고, 양들이 메에- 하고 울며 지나가기도 했다.

“와아, 이게 다 정원이라니.”

왕도에 있는 오베론 저택의 정원도 상당히 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저택들이 밀집해 있는 왕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남작은 종종 귀족들을 초대해 이곳에서 사냥을 하며 친분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 주었다.

문제는 내가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거였다. 사냥을 나서려면 승마가 필수였다. 원작 설정상 이브리아도 말을 타지 못했으니, 몸이 알아서 승마를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이브리아는 어렸을 적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이후 승마를 피했다.

‘여기에 이브리아와 나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군.’

너무 다른 나와 이브리아의, 아마도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내가 말을 못 탄다는 걸 알게 되자 해리는 크게 비웃었다. 도대체 그게 뭐가 어렵냐는 것이었다.

-생각해 봐. 넌 와이번도 타고 날아다니잖아. 그런데, 고작 말이 무섭다고?

듣고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곡예하듯 하늘을 날아다니는 와이번은 잘도 타면서, 땅에 붙어 달리는 말은 못 탄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럼 해리가 알려 줘요. 말 타는 법.

-으. 누굴 가르치는 건 피곤한데.

-하지만 해리가 제일 잘 탈 것 같아요. 난 제일 잘 타는 사람한테 배우고 싶다고요.

처음에는 귀찮다며 빼던 해리였지만, 난 이미 그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다.

‘적당히 띄워 주면 홀랑 넘어온다니까.’

나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 해리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말은 얼마나 탈 줄 알아?”

“전혀 못 타요.”

“달리는 게 아니라, 올라타는 것도 아예 못 하는 거야?”

아마 이브리아는 말 위에 올라타는 것까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마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떻게 말 위에 올라타는지도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백지 상태라니까요.”

“좋아. 어설프게 아는 것보단 차라리 백지 상태인 게 편해.”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말 앞으로 이끌었다. 내가 타게 될 말은 새하얀 조랑말이었다.

“이렇게 작은 말을 타요?”

“처음부터 커다란 군마를 탈 수 있을 줄 알았어?”

해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자. 우선 올라타는 법부터 알려 줄게.”

“네.”

“먼저 등자에 한 발을 올린 다음 몸을 위로 끌어 올려. 다른 쪽 다리는 반대편으로 가볍게 넘긴다고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두 다리로 말을 감싸면 안정적으로 앉을 수 있어.”

“이해했어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 앞에 섰다.

‘어라?’

그런데 막상 말 앞에 서자 그 작았던 조랑말이 엄청나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뜨겁게 콧김을 내뿜는 얼굴이 왠지 위협적이었다.

“뭐 해?”

해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갑자기 뭐예요?”

“너무 굳어 있잖아. 긴장 풀라고.”

“그러고 싶은데 생각보다 말이 너무 커요.”

“제일 작은 조랑말이야. 이놈한테 쫄 거면서 군마를 타려고 했던 거야?”

나를 놀릴 건수를 잡은 해리가 눈을 반짝이며 약 올리기 시작했다. 주인으로서의 위엄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안 쫄았어요!”

사실은 쫄았다.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기르는 개에게 우스운 주인으로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심호흡하고 다시 말을 바라보았다.

‘등자에 발을 올리고, 가볍게 몸을 올려서 말 위에 앉고, 다른 발은 반대편으로.’

순서는 간단했다.

‘말아. 잘 부탁해.’

나는 초롱초롱한 말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런데 살짝 웃으며 건넨 내 부탁에 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히이이이잉!”

두려움에 질린 말이 요란하게 울며 앞발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내 얼굴을 내리찍을 것 같았다.

‘뭐냐? 내 악역 미소, 이거 동물한테도 통하는 거였어?’

나는 경악하며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살폈다. 가늘게 뜬 눈 바로 앞에 해리의 얼굴이 있었다.

“악!”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해리가 손을 뻗어 내 등을 받쳤다.

“어디까지 도망가려고?”

“놀랐잖아요. 그렇게 얼굴을 들이대고 있으면 어떡해요!”

“넌 그게 도와준 사람한테 할 말이냐?”

해리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하얀 말을 쳐다보았다. 내 악역 미소를 보고 겁에 질렸던 말은 어느새 진정한 상태로 얌전히 서 있었다. 해리가 고삐를 잡고 진정시킨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나는 머쓱해져서 해리에게 뒤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엎드려 절 받기는 필요 없거든.”

순순한 인사에 놀랐는지 해리도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너는 악마도 안 무서워하면서, 고작 말이 무섭냐?”

“해리는 내 말을 듣는데, 말은 내 말을 안 듣잖아요. 말 통하는 상대는 안 무서워요.”

“말과의 대화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야.”

해리가 내 손을 잡아끌어 말의 몸 위에 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해리가 나와 겹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쪽에 있던 내 손이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목을 어루만져 주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말이 경쾌하게 투레질을 했다.

“윽!”

거친 투레질에 얼굴에 말의 침이 튀었다. 울상이 되어 해리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팔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너 진짜 손 많이 간다.”

“해리가 할 소리는 아니거든요. 평소에 해리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나는 투덜거리며 등자 앞에 섰다. 해리가 알려 준 순서를 상기하며 몸을 위로 올리자, 생각보다 가볍게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와! 해리, 나 탔어요!”

고개를 돌려 해리를 바라보자, 그는 칭찬 대신 재빨리 다음 지시를 내렸다.

“반대편 등자에도 발 끼워. 나 쳐다보지 말고 허리 곧게 펴고.”

“어, 네.”

제법 선생님 같은 지시였다. 그의 말에 따라 허리를 곧게 펴자 조금 더 안정감 있는 자세가 나왔다.

“다리는 안쪽으로 모아. 무릎이 밖으로 벌어지지 않게.”

“이렇게요?”

해리의 말에 따라 움직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분명 내 다리인데, 왜 내 말을 안 듣지?’

내가 다리를 노려보며 애쓰는 사이 해리가 예고도 없이 내 무릎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안쪽으로.”

무릎은 해리가 움직이는 대로 돌아갔다. 올바로 된 자세를 보며 그제야 만족한 해리가 고개를 들었다.

“해리, 되게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지네요. 엄청 숙맥같이 굴더니.”

“누가 숙맥인데?”

“2천 살 넘은 아저씨가 키스도 나랑 처음 해 봤으면 숙맥 맞지 뭐.”

“할아버지라더니, 이제는 아저씨냐?”

“할아버지라고 하면 절대 아니라고 소리치잖아요. 그러니까 반반씩 합의해요. 할아버지와 청년의 중간인 아저씨로.”

“나 진짜 팔팔한 청년이라니까!”

“와, 해리. 방금 그 대사 진짜 아저씨 같았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고삐나 잡아.”

해리가 투덜거리며 내게 고삐를 내밀었다. 그는 내가 고삐를 제대로 잡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제 말 위에 올라탔다. 해리의 말은 커다란 검은색의 날렵한 군마였다. 그는 거대한 녀석을 익숙하게 몰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발로 옆구리를 차면 그게 출발 신호야.”

“그래요? 그건 쉽네.”

나는 말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툭 쳤다. 그와 동시에 뒤늦은 해리의 조언이 뒤따랐다.

“너무 세게 차면 놀라서 뛰쳐…… 야!”

말이 엄청난 소리로 울며 달려나가자 해리가 놀라서 나를 불렀다. 그는 속도를 맞춰 내 옆에서 바짝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게 차면 어떡해?”

“혹시나 못 알아들을까 봐……. 살살 차라는 걸 빨리 말해 줬어야죠!”

“말이 무섭다고 벌벌 떨더니, 옆구리를 그렇게 세게 찰 줄 누가 알았겠어?”

“알았어요. 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얘 좀 멈추게 해 봐요.”

해리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말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감에 하얗게 질린 나를 보며 해리의 표정도 굳어졌다.

“고삐를 살짝 당겨!”

나는 고삐를 살짝 당겼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말은 내 신호를 알아듣지 못했다.

“안 먹혀요!”

“안 되겠어. 그럼 그냥 뛰어내려.”

“뭐라고요? 뛰어내리라고요?”

“그래. 내가 받아 줄 테니까 그냥 뛰어내려.”

“말이 되는 소리예요, 그게?”

둘 다 달리는 말 위에 있는데 해리가 날 어떻게 받아낸다는 말인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해리를 바라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분명히 온건한 방법을 먼저 제시했어.”

해리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히이이이잉!”

그러자 잘 달리던 말이 앞발에 무엇인가 걸린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관성에 따라 내 몸은 그대로 앞으로 쏟아졌다. 눈앞으로 딱딱한 흙바닥이 가까워졌다.

‘부딪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니까 눈 떠.”

귀 바로 옆에서 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내가 마법도 쓴다는 걸 잊은 모양이네.”

“아. 해리는 마법도 쓸 수 있었죠.”

‘머릿속에서 너무 하찮은 존재로 기억하고 있었더니 완전히 잊었다.’

해리가 알면 발끈할 생각을 속으로 삼키는데, 그가 내 얼굴만 봐도 다 안다는 듯 제 이마로 내 머리를 콩 하고 부딪쳤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

“그래요? 그럼 그냥 말로 할걸.”

“말은 못 타면서, 말은 참 잘해.”

해리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풀숲에 뒹군 탓인지 해리와 나, 모두 몰골이 엉망이었다.

“아. 제복에 풀물 들겠다.”

기능성 따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멋만을 위해 만든 기사단의 새 제복은 새하얀색이었다. 오염되기 쉬운 색이라 벌써부터 하얀 천에 풀물이 들어 있었다.

“지금 옷이 문제야?”

해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 뺨에 손을 뻗었다.

“여기서 피 나는데.”

“윽. 정말요? 얼굴에 상처 나면 화장할 때 아픈데.”

얼마 후면 귀족들을 초청해 용기사를 소개하는 자리를 가진다. 평소에는 화장을 생략할 수 있지만, 그날은 기본적인 치장은 해야 했다.

[다치셨으면, 제가 치료해 드릴까요?]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유피테르의 목소리에 나와 해리 모두 놀랐다.

“상처 치료도 할 수 있어요?”

“상처 치료를 할 수 있었어?”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유피테르가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말 안 했어요! 내가 전에 무슨 능력이 있냐고 물었을 때 왜 말을 안 했어요?”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그만 말하라고 하셔서…….]

“상처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죠.”

[그렇습니까? 저는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게 더 멋진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이 몸의 악취를 제거하는 거였고요.”

[네.]

“도대체 치유 능력은 몇 번째로 말할 셈이었어요?”

[847번째쯤……?]

“……그렇게나 나중에 말할 생각이었다고요? 아니, 그 전에, 그렇게나 능력이 많았어요?”

[예. 하지만 이것도 묻지 않으셔서…….]

누구는 말이 많아서, 누구는 말이 없어서 문제였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우선 상처 치료부터 해 줘요. 저택에 돌아가면 어떤 능력이 있는지 다시 알려 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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