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156)

* * *

제복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제작되는 동안 용갑의 제작도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한쪽에서는 마법사 협회가 주문한 청요석 물량을 생산하기 위해 아이들이, 반대편에서는 용갑을 만들고 있는 라파쉬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제품을 받아 본 마법사 협회는 당장 우리 제품을 사겠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들은 청요석이 기존 마정석과 품질 차이가 전혀 없으면서, 가격은 10%나 저렴하며,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마정석은 채굴이 어려운 편이라 한 번 주문을 넣으면 반년 후에나 받을 수 있는 데 반해, 청요석은 한 달 안으로 모든 물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제 청요석 생산 인력도 늘려야겠어.’

왕실과 마법사 협회를 고객으로 만들었으니 다음은 개인 고객이었다. 가장 큰 고객은 당연히 왕실과 마법사 협회지만, 고위 귀족들 역시 그들 못지않게 많은 마정석을 구입하는 큰손들이었다.

‘부유한 귀족 가문의 저택은 대부분 마도구를 이용해서 돌아가니까 말이지.’

불을 밝히는 전등, 욕탕의 온수를 데우는 시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온실. 전부 마도구를 이용한 장치였다. 여기에 건전지 역할을 하는 마정석은 필수였다.

때문에 거대한 저택을 유지하려면 상당량의 마정석이 필요했다. 기존의 마정석보다 저렴한 청요석을 사용하면 저택 운영비를 대폭 줄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개인 고객 확보는 조금 더 까다롭지.’

왕실은 반쯤 협박해서 거래를 텄다. 마법사 협회는 이익을 따라 움직이니 아주 쉬웠다.

하지만 귀족들은 다르다. 그들은 명예와 인맥, 명분에 따라서 움직였다. 당장의 금전적 이익만을 보며 달려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마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며 거래해 온 나타 백작을 쉽게 배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해.’

이건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문제였다.

‘원래 거래처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면 대 면으로 만나는 거지만…….’

나의 경우에는 역효과였다. 내 이미지가 너무 나쁘니, 차라리 얼굴을 안 내비치는 게 장사에 도움을 주는 길이었다.

‘나를 대신해서 영업할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하지만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브리아.”

청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라파쉬가 나를 불렀다.

“우선 임시 갑옷은 완성했어요. 이제 겨우 한 마리분을 만든 거지만요.”

라파쉬가 완성한 갑옷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걸 와이번에게 입혀 보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반영해서 최종 완성품을 만들 거예요.”

거대한 용갑은 엄청나게 무거워 보였다. 이걸 일반적인 철로 만들었다면, 와이번에게 제대로 입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걸 들고 갈 만큼 힘이 센 사람도 없으니까.’

하지만 라파쉬는 그 거대한 용갑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근력이 일반 사람보다 센 편이기도 하거니와, 전체를 미스릴로 만들어 견고함에 비해 무게가 덜 나갔다.

“자, 그럼 와이번에게 이걸 입혀 볼까요?”

드디어 용갑을 입혀 볼 시간이었다.

* * *

나는 저택의 연무장으로 와이번을 불렀다. 검은 숲에서부터 날아와 유유히 하늘을 맴돌던 와이번이 내 손짓에 따라 가볍게 연무장에 내려앉았다.

“오랜만이에요.”

나는 와이번에게 인사하며 준비해 뒀던 간식을 건넸다. 조리하지도 않은 생닭이었다. 와이번은 그걸 한입에 꿀떡 삼켰다.

‘더 많이 준비해 올 걸 그랬나?’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 와이번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갑옷을 입을 거예요. 혹시 불편하면 말해 줘요. 최대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줄 테니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와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의 의사를 확인하자마자 라파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호위로 내 뒤에 붙어 있던 해리의 도움을 받아 와이번에게 갑옷을 입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미스릴 용갑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와, 진짜 멋있어!’

저 위에 사람이 타서 날아다닌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대가 됐다.

“이야, 엄청나잖아?”

훈련을 하러 나왔다가 와이번이 갑옷 입는 모습을 구경하게 된 기사들도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불편한 곳은 없어요?”

나는 재빨리 와이번에게 다가가 물었다. 와이번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길게 울음소리를 냈다.

‘만족스럽다는 뜻이구나.’

긴장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라파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뭐, 내가 틀리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당연한 결과지요.”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주제에, 라파쉬가 잔뜩 잘난 체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갑옷의 틀은 만들어졌으니 안장과 등자만 달면 되겠어요. 그건 어렵지 않으니 사흘 안으로 완성본이 나오겠죠.”

“그때쯤이면 새 제복도 완성될 것 같으니 완전한 용기사의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

막상 멋진 용갑을 입은 와이번을 보니 기사들도 기대가 되는지 들뜬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갑 제작을 기다리는 동안 기사들도 훈련을 충실하게 해 이제는 그들도 충분히 와이번 위에 탈 정도가 되었다.

‘유피테르의 공이 아주 컸지.’

그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빠른 시간 안에 기사들의 실력을 끌어올렸다.

[유피테르가 아니었다면 저 와이번 위에 탈 만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거예요.]

[아닙니다. 기사들이 재능이 있었던 거지요.]

[그래도요. 유피테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재능이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들이잖아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라이오넬이었다. 어설픔의 대명사 같던 그가 이제는 에렐의 서리 기사단 내에서 가장 강한 기사로 꼽히고 있었다.

[유피테르, 어쩌면 내 역할은 이거였나 봐요.]

[주인님의 역할이요?]

[네. 재능은 있지만 그걸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유피테르에게 보여 주는 거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기사들을 가르치는 게 꽤 즐거웠으니까요.]

[유피테르가 즐거웠다니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저는 그게 주인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선택했고, 거기엔 어떤 목적도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예. 주인님께서도 아무런 목적 없이 저를 뽑으셨잖습니까. 뭐,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를 강력히 생각하긴 하셨지만…….]

유피테르가 낮게 웃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다들 거대한 목적을 가지고 저를 뽑으려고 했거든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최강자가 되기 위해서, 유명해지고 싶어서.]

평범한 이유였다.

‘성검을 뽑을 정도면 그 정도 이유 하나쯤은 품고 있었겠지.’

해리의 첫 주인이었던 제레인트 왕국의 시조 역시 대업을 꿈꾸며 성검 뽑기에 도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주인님은 그 어떤 목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게 된 거지요. 주인님께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저를 쓰실 거라는 걸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쓸 것 같아 내게 뽑혔다니. 뭔가 성검다운 이유네요.]

하지만 나는 돈을 벌겠다고 성검을 팔 고민까지 했는데.

‘성검의 숭고한 뜻과 달리 하찮은 주인이라 민망하네.’

나는 볼을 긁적이며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한번 날아 볼 수 있겠어요? 비행한 뒤에 혹시 갑옷이 갑갑하거나 무겁지 않은지 알려 줘요.”

내 말에 와이번이 긴 울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날갯짓을 시작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와이번이 하늘 위에서 별처럼 반짝거렸다. 미스릴 갑옷의 광채 덕분이었다.

“열심히 광택을 낸 보람이 있네요.”

라파쉬가 흐뭇하게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와이번이 길게 울었다.

* * *

“이미 마법사 협회에서도 에렐과 거래를 트기로 했답니다. 그쪽이 워낙 싸게 마정석의 대체품을 넘겨서, 저희와는 더 이상 거래하지 못하겠답니다.”

나타 백작은 부하의 보고에 책상을 내리쳤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쪽에서 가격을 얼마나 내렸다고?”

“저희 마정석보다 10퍼센트가 저렴합니다. 연간 계약을 하면 15퍼센트로, 5년 계약을 하면 20퍼센트로 할인율을 높여 준다고 해서, 마법사 협회는 에렐과 5년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답니다.”

“마정석을 그렇게 헐값에 팔다니, 애송이가 정신이 나갔군.”

나타 백작은 갑자기 나타나 장사에 물을 흐리는 애송이를 떠올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예의 바르게 편지를 보내 제 의견을 물을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녀석인 줄 알았다. 그래서 관대하게 그쪽의 마정석도 구입하겠다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 뒤통수를 쳐?’

왕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그쪽에 마정석의 대체품을 팔았다. 제 편이라고 믿었던 왕실은 애송이의 편을 들며 여태까지 독점으로 많은 이득을 봤으니 이해하라고 했다. 여태까지 독점으로 많은 이득을 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마정석이잖아.’

모두가 원하지만, 지극히 희소한 자원. 그것이 제 영지에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평생을 이 자원으로 부유할 수 있었는데.

‘멋모르고 날뛰는 애송이 때문에…….’

나타 백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남은 고객마저 모두 빼앗기기 전에, 그 애송이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 * *

“해리, 한 달 후에 용기사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새 제복을 차려입은 해리를 보며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세련되고 우아한 새 제복은 해리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물론 라이오넬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도 멋지게 옷을 소화했지만, 누구도 해리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한 달 후?”

내 옆에서 서류 정돈을 도와주고 있던 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걸 제게 묻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쯤이면 사람들에게 용기사들을 공개해도 망신당하지 않을까요? 요즘 기사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으니까, 해리가 제일 잘 알 것 같아서요.”

영지 업무로 바빠진 이후, 나는 기사단의 스승 역할을 해리에게 맡겼다. 자연스레 기사단의 숨겨진 진짜 스승, 성검 유피테르도 그의 손에 돌아갔다.

-내가 왜 성검 따위를 들어야 해?

-[주인님, 절 정말 이 악마 놈에게 넘기실 겁니까?]

나는 동시에 반발하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하느라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렸지.’

그래도 결국 두 사람 모두 납득했다. 나는 해리의 계약자였고, 성검의 주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근본적으로 내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기사단 훈련을 갈 때만 해리에게 유피테르를 맡겼는데, 갈수록 반발이 줄어들어 최근에는 해리가 계속 성검을 가지고 있었다. 투닥거리는 동안 생각보다 사이가 좋아졌는지, 해리가 유피테르의 검신을 닦아 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성검과 악마. 무슨 영화 제목 같잖아?’

괜한 생각에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으니 해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사들의 실력은 내가 아니라 성검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실질적으로는 걔가 가르치는 거니까.”

“그런가?”

해리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럼 유피테르의 생각은 어때요?”

[제게 물으신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비행 연습을 시작했거든요. 아직 불안한 부분이 있지만, 한 달이면 충분히 숙달될 겁니다.]

“유피테르가 하는 말이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죠. 그럼 한 달 후로 일정을 잡아야겠어요.”

나는 종을 울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남작이 내게 붙여 준 잡일 담당이었다.

“남작을 불러 줄래? 논의할 이야기가 있어서.”

“예, 영주님.”

시종이 인사를 하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남작이 도착했다.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늘 단정하던 그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논의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요.”

“그렇게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시종에게 꼭 그 말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인지 영주님께서 절 부르실 때마다 시종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절 재촉하더군요.”

‘윽. 이놈의 악역 얼굴.’

평범하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무서운 표정이 된 게 틀림없었다.

“아마 시종은 내가 천천히 와도 된다고 전하라 해도 절대 안 믿을걸요.”

“어째서요?”

“내 얼굴이 무서우니까 그렇죠.”

“영주님의 얼굴이 무섭습니까?”

인세티아 남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공작 각하와 똑같은데요.”

“그러니까, 공작 각하의 얼굴도 엄청 무서운 편이잖아요.”

“그렇습니까? 전 근엄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건 남작이 각하를 존경하니까 그런 거고요. 보통은 이런 얼굴을 보면 무섭다고 생각한다고요.”

오베론 공작을 모시는 인세티아 남작은 그의 평가에 상당히 후한 측면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 얼굴이 안 무서울 수가 있냐고?’

나는 찬바람이 쌩쌩 날렸던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브리아의 무서운 얼굴이 평범한 커피라면, 공작의 무서운 얼굴은 에스프레소급이었다.

“아무튼, 얼굴 이야기는 됐어요. 일정 이야기나 하죠.”

“일정이라면 대충 정리된 게 아니었습니까? 마법사 협회 납품과 왕실 추가 납품 모두 날짜를 확정했습니다. 선금도 받았고요.”

“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럼 어떤 일정을……?”

“사람들에게 용기사를 공개하려고 해요. 에렐 근처에 사는 귀족들을 초대해서 비행 시범 같은 걸 보여주는 거죠.”

내 말에 남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하는 목적은요?”

“당연히 자랑하려는 거죠. 너희는 이런 거 없지? 우리는 있다!”

“그런 자랑을 해서 뭘 얻을 수 있지요?”

“우리에게 강한 용기사가 있다는 것과 우리 영지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다는 거요.”

귀족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빨리 돈다. 멋지고 귀한 것일수록 속도는 더 빠르다. 용기사를 본 귀족들은 분명 사방팔방으로 소문을 흘리고 다닐 것이다. 이보다 좋은 홍보는 없었다.

“귀족들을 초대했을 때 청요석도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기념품으로 청요석을 나눠 주는 것도 좋겠죠.”

마법사 협회에 의뢰해 청요석을 단 커프스를 만드는 건 어떨까? 거기에 클린 마법 같은 걸 각인하면 실용성 있고 놀라운 기념품이 될 것이다.

“그렇군요. 홍보를 하자는 겁니까?”

유능한 남작은 빠르게 내 의도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러실 거라면 왕도의 귀족을 초대하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뇨, 왕도 귀족은 한 명도 초대하지 않을 거예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왕도 귀족들이 궁금해서 안달이 나게 만들 생각이거든요.”

왕도 귀족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지방 귀족과 달리 우아하고, 세련되며, 유행을 선도한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런데 변방의 귀족들이 모두 보고 온 소문의 용기사를 자신들은 보지 못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렐에 오려고 할 것이다. 왕도 귀족인 자신들이 변방 귀족들에게 유행으로 뒤처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굳이 돈 들여 초대하지 않아도 알아서 올 거예요. 게다가 난 딱히 초대할 만한 왕도 귀족이 없어서요.”

캐서린 살해 미수 사건 이후 나는 왕도 귀족들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혔다.

‘우아하지 못하게 사람을 죽이려고 한 망나니 정도?’

내가 직접 초대장을 보내면 오히려 신비감이 떨어진다. 그들에게는 소문을 통해 용기사와 청요석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왕도 귀족들에게 아가씨의 평가는 가히 최악이니까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굳이 그렇게 뼈를 때릴 필요는 없거든요, 남작.”

“그 부분에 대해 별로 상처 받지 않으시잖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일반적인 예의를 말한 거라고요.”

언제부턴가 남작은 나를 말썽꾸러기 여동생처럼 취급했다.

‘희번덕한 눈으로 날 경계하면서 노려볼 때는 언제고.’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고 있는 내게 남작이 물었다.

“한 달 후요.”

“그즈음이면 날씨도 청명하고 농번기도 아니니 귀족들도 기꺼이 초대에 응할 겁니다.”

‘아. 농번기 생각을 못 했네.’

지방 귀족들은 농번기가 되면 영지 살림으로 바빠져서 외부 활동을 삼갔다. 영지민들이 열심히 노동하고 있는 시기에 영주가 밖으로 나돌며 유흥을 즐기면 민심이 흉흉해졌다.

‘운 좋게 그 시기는 피했구나.’

에렐은 농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농번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럼 초대할 귀족 명단은 남작에게 맡겨도 괜찮을까요? 난 지방 귀족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맡겨 주십시오. 적절한 사람들로 구성해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나타 백작도 초대하실 겁니까?”

“나타 백작이요?”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초대할 생각이 없었다. 초대장을 보내도 무시할 가능성이 높았고, 만약 초대를 수락한대도 괜한 깽판을 놓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한 번은 부딪혀야 할 텐데.’

이러나저러나 계속 원한을 가지고 있을 상대였다. 하루라도 빨리 부딪히고 원한 관계를 털어 버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남작의 생각은 어때요?”

“초대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어차피 거절할 가능성이 크니, 저희가 초대했으나 그쪽에서 거절했다는 쪽으로 마무리되면 보기에 더 좋습니다.”

“아. 그렇네요. 그 생각은 못 했는데.”

역시 유능한 보좌가 있으니 편했다.

“그럼 그것도 남작의 의견대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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