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용기사 (1)
엠마의 추천을 받은 해리는 나의 승인을 얻어 무사히 서리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 뒤 내가 곧장 해리를 호위로 지명하자, 기사단 내부에서는 작은 반발이 일었다. 여태까지 아가씨를 모셔 온 건 자신들인데, 왜 신입이 아가씨의 호위로 낙점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나와 엮이는 일이 가장 많았던 라이오넬이 억울해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실력이 일취월장한 지금은 그도 영주의 호위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아가씨! 아니, 영주님! 왜 제가 아니라 신입입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요?
-예! 몰라서 묻습니다.
-그럼 저 얼굴을 봐요. 잘생겼죠?
-네.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제일 잘생겼잖아요.
-……실력이 아니라 얼굴이 중요한 겁니까?
-얼굴도 실력인데?
그렇게 말한 이후 기사단들의 반발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호위를 선발하는 기준이 얼굴이라면 서리 기사단 내에서, 아니, 왕국 안에서 해리를 이길 사람은 없을 터였다.
호위의 얼굴이 중요하다는 건 단순한 변명만은 아니었다. 왕도의 유행 덕분이었다. 사실 이 평화로운 시대에,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 왕도에서 본래의 목적으로 호위를 데리고 다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필요에 의해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건 왕족이나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고위 귀족이 전부였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아도 호위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가 뭐냐고? 답은 간단했다. 관상용이었다.
<기사와 레이디>라는 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끈 뒤로, 왕도의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는 보기 좋은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게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 기사가 아니라도, 검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외모였다.
누가 더 훌륭한 관상용 호위를 가지고 있느냐? 파티가 열리면 그것으로 은근한 경쟁이 붙었다. 더 잘난 호위를 데리고 있을수록 주인의 콧대가 높아졌다.
지금껏 이브리아는 그 경쟁에서 언제나 한발 비켜나 있었다. 유행에 뒤처지는 걸 끔찍하게 여기던 그녀가 그런 열풍에 합류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카시안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고작 관상용 호위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이브리아가 그 유행에 편승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원래 이브리아는 모든 유행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니까. 이런 핑계에 잘 맞아떨어지게 해리는 어디를 봐도 관상용으로 훌륭했다.
‘해리를 데리고 파티에 나가는 날에는 내가 단번에 1등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얼굴만은 몹시 멀쩡한 해리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얼굴은 잘생기고 볼 일이었다. 어디든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정작 걱정스러운 건, 해리 이 녀석이었다.
“이 모습으로 내 옆에 붙어 있는 대신 입을 다물어요. 둘만 있을 때는 괜찮아요. 대신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아예 말을 하지 맙시다.”
“뭐어?”
‘해리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겠지.’
하지만 이 악마가 입만 열면 온갖 위험한 소리를 한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입단속을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해리의 콘셉트는 과묵함이에요. 과묵한 호위. 얼마나 멋져요?”
“과묵함…… 나한테 과묵함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수다쟁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은 윽박지를 때가 아니라 살살 구슬릴 때였다.
“해리, 사람들이 과묵한 기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
“엘 로이츠, 그 녀석 같은 걸 말하는 거야?”
“네. 그 사람 정도의 과묵함이 필요해요. 어떤 이야기를 봐도 주인공은 과묵하단 말이에요.”
“주인공이 말이 많을 수도 있잖아.”
“수다쟁이 주인공이요? 절대 없어요. 쉴 새 없이 떠들면서 페이지를 잡아먹는 건 죄다 조연이라고요. 조연도 어디 보통 조연인 줄 알아요? 그런 애들은 꼭 등장하자마자 어이없게 죽어요.”
공포 영화만 봐도 그렇잖은가? 초반에 등장해서 열심히 떠들어 대며 상황을 설명해 주는 캐릭터가 꼭 제일 먼저 죽는다. 그러고는 사건이 시작되지.
“반면에 주인공은? 절대 말을 안 해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한번 쳐다만 보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움직인단 말이야.”
나는 해리의 머리를 정돈해 주며 조언을 계속 이어 갔다.
“그러니까 지금 해리의 캐릭터는 너무 조연스러워요. 해리도 주인공 욕심이 있을 거 아니에요? 평생 조연으로 살다가 쓸쓸하게 퇴장하고 싶어요?”
“너라면 그러고 싶겠어?”
“그래요. 당연히 화려한 주인공이 되고 싶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주인공처럼 행동해야겠죠?”
“그, 그렇지?”
해리가 미심쩍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이쯤이면 반 이상은 넘어온 거였다.
“내가 주인공은 어떻다고 말했죠?”
“어, 그러니까, 과묵하다?”
“그래요. 주인공은 과묵해요. 그러니까 주인공을 꿈꾸는 해리도?”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해리가 확신하지 못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묵해져야 되나……?”
원하던 대답에 나는 과장스럽게 박수를 쳤다.
“정답이에요! 그러니까 해리는 오늘부터 과묵한 호위가 되는 거죠! 어때요?”
“좋아!”
씩씩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해리가 금세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사기당한 기분이 들지?”
“기분 탓이겠죠.”
“그래? 기분 탓인가?”
“그럼, 그럼. 기분 탓이야!”
속전속결. 이럴 땐 몰아붙여서 정신을 못 차리도록 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예전에 한 번 해봐서였는지 해리는 자연스럽게 나와 손을 걸고 손가락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약속하면 꼭 지켜야 하는 거 알죠?”
“당연하지.”
확답을 받아 낸 나는 해리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 전에 그의 등을 떠밀어 거울 앞에 세웠다.
“극적으로 우리의 협상도 타결됐으니까 옷이나 맞출까요?”
“갑자기 옷은 왜?”
“기사단원이 됐으니까 해리도 제복을 입어야죠. 아직 제복 없잖아요.”
해리가 서리 기사단의 제복을 떠올렸는지 눈에 띄게 싫은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서리 기사단의 제복은 너무 촌스러웠다. 물론 그 제복이 최신 유행이었던 적이 있기는 할 것이다.
‘아마도 1500년 전쯤에는.’
1500년 전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이 촌스러운 제복은 용기사단을 왕국의 아이돌로 만들어 에렐에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나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렐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을 통해 제복을 새로 디자인했다. 슬림 핏의 세련된 제복과 바람에 흩날릴 망토, 멋진 모자까지.
나의 의견을 반영해 나온 새 제복 디자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는 디자이너가 완성한 제복 디자인을 해리의 몸 위에 덧입혀 보았다. 러프한 그림으로 상상했을 뿐인데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저 얼굴에, 저 피지컬에 뭐가 안 어울리겠느냐마는.’
사실 해리는 거적때기를 입어도 멋질 외모였다.
‘하지만 멋진 옷을 입히면 더 환상적이겠지.’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커다란 해리가 저항도 없이 내게 얌전히 끌려왔다.
“다른 기사들은 벌써 치수를 재서 의상실에 넘겼거든요. 근데 해리는 늦게 기사단에 합류해서 그러질 못했으니까, 내가 재서 의상실에 보내려고요.”
하녀에게 시킬 수도 있겠지만, 해리가 치수를 재는 동안 말썽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줄자와 종이, 연필을 꺼내 들고 해리에게 턱짓했다.
“자, 그러니까 양팔부터 벌려 봐요!”
* * *
나는 해리의 치수를 재며 연신 감탄했다. 대충 눈으로만 봤을 때도 몸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만져 보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와. 이게 다 근육이에요?”
내가 팔뚝을 쿡 찌르자 해리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치수를 잰다더니 왜 사람 몸을 이렇게 만져?”
“내 거를 내가 만지겠다는데 왜요?”
“내가 왜 네 거야? 아니, 내가 네 거가 맞기는 한데, 그래도 몸을 막 만지면 안 되지!”
“왜요? 내 건데 내 맘대로 할래요.”
나는 반항하는 해리를 무시하며 양팔을 벌린 그를 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야!”
“가슴둘레 재는 건데요?”
“…….”
나는 말문이 턱 막힌 해리를 두고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참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악마였다. 나는 사이즈를 재고 종이에 하나하나 숫자를 기록했다. 물론 숫자를 옮겨 적는 것보다 감탄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와. 진짜 어깨 넓다. 와. 다리 진짜 길다. 와. 등이 완전 역삼각형이야.
그러는 동안 해리는 멀뚱멀뚱하게 서서 내 눈치를 살폈다.
“사이즈 다 잰 거 아냐?”
“아니에요.”
“다 잰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사실 사이즈는 진즉에 다 쟀다. 하지만 어색하게 굳은 자세로 서 있는 해리가 웃겨서 나는 일부러 쓸데없는 곳까지 하나하나 치수를 재고 있었다.
“……옷을 맞추는데 손가락 길이를 재?”
“내 악마님을 구석구석까지 파악하고 싶어서?”
“그게 무슨 변태 같은 소리야?”
드디어 해리도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부루퉁해진 해리가 내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고는, 나를 그대로 책상 위에 앉혔다.
“이봐, 계약자.”
“언제는 이름으로 부른다더니.”
“지금은 약간 화났으니까 계약자야.”
“약간 화났어요? 왜?”
“넌 날 너무 우습게 봐.”
“하지만 우스운 걸 어떡해요?”
악마가 이렇게 우스운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악마라고 하면 잔인하고, 차갑고,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인데.’
해리를 쿡 찌르면 따뜻한 피가 철철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해리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이렇게 안 무서워하는 인간은 처음이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요? 여기 사람들은 다들 해리를 별로 안 무서워하잖아요. 엠마만 해도 그렇고.”
“그 여자는 내가 악마라는 걸 모르잖아. 내가 악마라는 걸 알면 다들 두려워서 덜덜 떨었어.”
“그래요?”
악마가 무서운 건 당연했다. 만약 나도 해리의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했다면 해리를 무서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해리를 무서워하지 않은 첫 인간이라는 게 좀 이상한데?’
해리의 계약자라면 한 사람 더 있었다. 그와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계약자였으니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 계약자는요? 그 사람도 해리를 무서워했어요?”
“당연하지. 난 악마인데.”
“하지만 계약자는 해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내가 대가로 그 머저리의 아들을 받았잖아. 제 아들의 목숨을 먹고 나타난 악마를, 인간이 어떻게 무서워하지 않겠어?”
해리가 천천히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눈이 일견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난 안 무서운데.”
“왜 내가 안 무서운데? 난 악마잖아.”
“악마가 뭐라고. 해리는 나한테서 아무것도 안 가져갔잖아요.”
차라리 이브리아의 것을 빼앗아 간 캐서린을 미워하면 모를까, 내게 퍼 주기만 한 해리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해리는 상당히 미묘한 표정이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화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단지 굉장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브리아.”
“네.”
“넌 나를 좀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
해리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깨물린 입술이 아파서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난 언제든 널 물 수 있거든!”
“나는 주인 무는 개가 세상에서 제일 싫더라.”
나는 그대로 해리의 옷깃을 끌어당겨 그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윽.”
해리의 억눌린 신음이 귓가를 울렸다. 나는 해리를 놓아주며 그의 가슴을 툭 쳤다.
“누가 허락도 없이 주인을 물랬어요?”
강하게 베어 문 탓에 해리의 목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해리는 자국이 남은 곳을 쓰다듬으며 불만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개를 물어뜯는 주인이 어딨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그대로 갚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죠.”
“하여튼 지기 싫어하는 것 좀 봐.”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유피테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송구합니다만…… 두 분 싸우시는 겁니까, 연애하시는 겁니까? 연애하시는 거면 저는 좀 빼놓고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