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파쉬가 부탁했던 시제품을 들고 찾아왔다. 각각 다른 모양의 청요석 다섯 개. 마법사 협회에 보낼 시제품이었다.
우리가 마정석과 같은 효능의 제품을 개발해 저렴한 가격에 왕실에 납품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가장 먼저 마법사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자신들도 우리의 제품을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원, 삼각, 사각, 오각, 별. 규격대로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다양한 형태로 청요석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모두 다르게 만들었다. 형태의 가공이 용이하다는 것, 이건 마정석과 다른 청요석만의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청요석을 다양하게 만든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지금의 마도구에 장착하려면 정해진 규격대로 만드는 것밖에는 의미가 없었다.
“청요석이 생긴 게 예쁘잖아요. 액세서리 겸 마도구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액세서리요?”
“네. 마정석은 가공이 힘들어서 투박한 형태잖아요. 두꺼운 사각형.”
나는 원형의 청요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이는 모양이 사파이어와 비슷했다.
“그런데 청요석은 이렇게 예쁜 원형도 만들 수 있고, 별 모양으로도 무리 없이 변형이 가능하니까 반지나 목걸이에 보석 대신 박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링이나 목걸이 줄에 마법을 각인하는 거다. 그럼 훌륭한 액세서리 마도구가 된다.
“리쉬 덕분에 마법사 협회를 잘 홀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홀린다고요?”
“네. 원래 장사는 상대를 홀리는 거니까요.”
라파쉬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며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다가, 문득 반지에 생각이 미쳤다.
“참, 반지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나는 청요석을 내려놓고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라파쉬에게 내밀었다.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 축제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받은 반지였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샀던 반지와 똑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게 무슨 반지인가요?”
라파쉬가 반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누가 나한테 준 건데…… 혹시 뭐 특이한 점은 없어요?”
마법은 걸려 있지 않았다. 해리가 직접 살펴보고 알려 준 말이니 확실했다.
“음. 형태는 일반적이지만…….”
반지를 꼼꼼하게 살피던 라파쉬의 시선이 보석에서 멈췄다.
“이 보석이 특이하네요. 이건 운석이거든요.”
“운석이요?”
“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돌이 아니에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돌이죠. 아주 귀해요. 이런 붉은색은 더더욱.”
라파쉬가 내게 반지를 돌려주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돌로 만들어진 반지.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떨어진 나. 이 반지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브리아?”
라파쉬가 멍하니 반지를 보고 있는 나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웃어 보이며 다시 반지를 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이 있어요, 리쉬.”
“저한테 좋은 소식인가요?”
“리쉬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소식이죠.”
“저한테도 좋은 소식이라니, 그럼 하나뿐이네요. 미스릴을 구한 건가요?”
라파쉬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네. 왕실에 납품한 청요석 대금이 들어왔거든요. 아직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미스릴을 구할 정도는 돼요.”
“드디어 본업을 할 수 있게 됐네요. 여태까지 몸이 얼마나 근질근질했는지!”
라파쉬가 팔을 빙빙 돌리며 어깨를 풀었다.
* * *
“해리.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나는 그를 침대에 앉혀 놓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해리가 눈치를 살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생각?”
“아무래도 개의 모습으로 계속 있는 건 힘들잖아요. 계속 변신하고 있으면 욕구를 억누르는 게 더 힘들다고도 했고요.”
“그랬지.”
“그래서 말인데요…….”
내가 뜸을 들이자 해리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힘을 가진 악마가 내 말 한마디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속에서부터 웃음이 올라왔다. 내가 풋 하고 웃자, 긴장하고 있던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별것도 아닌데 장난친 거야?”
“아니네요. 중요한 거 맞아요.”
“그런데 왜 웃어!”
“해리가 나한테 쩔쩔매는 게 귀여워서?”
“안 쩔쩔맸어! 내가 왜 네 말에 쩔쩔매?”
“아닌데. 쩔쩔매셨는데요, 악마님.”
앉아 있는 해리에게 얼굴을 들이댔더니 그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뒤로 뺐다.
‘지난번에 키스한 이후로 계속 이 상태네.’
예전처럼 치근덕대지도 않고, 개로 변한 상태에서도 내 침대에 올라오지 않는다.
‘왜 갑자기 내외하는 거냐고?’
“설마 2천 살도 넘게 먹어서는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죠? 혹시 키스도 처음 한 거예요?”
“그……!”
해리가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예상하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진짜 처음 한 거라고요?”
놀란 내 얼굴을 보던 해리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그가 곧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 그러면 안 되냐? 처음인 게 왜? 뭐!”
“아뇨. 그러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악마잖아요?”
“악마가 왜?”
“악마면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 봤을 거 아니에요?”
“내가 또 이 말을 하게 되네. 너희 인간들은……”
“악마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있다고요?”
“그래, 그거.”
내가 해리의 말을 가로채며 웃자, 그가 맥이 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초라한 머리통을 보고 있으니 또다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최대한 속으로 삼키며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미안해요. 처음이라고 말을 하지. 그럼 안 했을 거 아니에요.”
“네가 처음이라고 말할 기회나 줬어?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친 게 누군데?”
“어…… 내가 한다고 말 안 하고 했나요?”
“안 했어!”
억울함을 담은 얼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았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어떻게 하면 화 풀래요?”
“나도 예고 없이 할 거야.”
“뭘요?”
“네가 놀랄 만한 짓.”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그걸 미리 말하면 네가 놀라? 당연히 비밀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의 얼굴을 살폈다. 이 간사한 악마가 이 기회를 틈타 이상한 거래를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억울함을 잔뜩 담은 해리의 얼굴에 악의는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해리도 한 번 해요. 내가 놀랄 만한 짓.”
“정말이야? 약속했어! 네가 놀랄 만한 짓 해도 벌주면 안 된다!”
“알았다니까요. 약속해요. 못 믿겠으면 손가락 걸고 도장 찍어요.”
해리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아. 여기엔 손가락 걸고 도장 찍는 게 없나?’
뭐 어떤가? 해리가 모르면 내가 하면 되는데.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는 해리의 새끼손가락에 손을 걸고 손가락을 맞댄 뒤, 엄지로 도장을 꾹 찍었다.
“손가락 걸고, 도장 찍기. 이렇게 약속한 건 꼭 지켜야 돼요.”
내 말에 이번에는 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거, 법적인 효력이 있어?”
“세상에 법을 따지는 악마가 다 있네.”
나는 픽 웃으며 해리의 손가락을 놓았다.
“도대체 무슨 놀랄 만한 짓을 하려고 이렇게 약속을 받……”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세우려는데 해리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아!”
몸이 순식간에 침대 쪽으로 기울었다. 서둘러 팔을 뻗어 침대를 짚었더니 두 팔 사이에 해리의 얼굴이 있었다.
“설마 이런 걸로 놀라게 하겠다는 거였어요?”
“아니.”
해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어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너도 놀랐지?”
“……이걸로요?”
“어? 안 놀랐어?”
정말 어린아이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입술만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내가 이런 걸로 놀랄 거라고 생각했나? 지난번에 그런 키스를 해 놓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 해리에게 물었다.
“우리 해리, 몇 살?”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이건 무효야! 네가 안 놀랐으니까, 다음에 다시 할 거야!”
“네. 그럼 그때까지 공부 많이 하고 오세요. 내가 놀라게.”
“흥.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마!”
해리가 그렇게 씩씩대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엠마가 들어섰다.
“아가씨, 마법사 협회에서 답장이 왔다고, 급한 거라고 해서 제가……”
편지 봉투만 보며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던 엠마가 고개를 들더니, 눈앞의 풍경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가씨, 지금 저 남자 덮치시는 거예요?”
엠마가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 대담하셨다니…….”
“엠마,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면…….”
상황을 살피던 엠마의 눈이 흉흉해졌다. 그녀가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바로 옆에 있던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럼 저 남자가 아가씨를 희롱하는 거군요! 용서할 수 없어요!”
엠마가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촛대를 든 채로 해리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엠마가 휘두르는 촛대를 피했다.
“야, 이거 뭐야! 그걸로 치면 아무리 나라도 아파!”
“감히 우리 아가씨를! 이 파렴치한!”
“악! 정말 때렸잖아! 아프다니까!”
그 와중에 엠마의 눈먼 공격에 해리가 맞았다. 예측이 안 되는 공격이라 더 피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아프라고 때리는 거잖아요, 이 변태야!”
“누가 변태야? 진짜 변태 짓이나 하고 욕먹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엠마가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에야 끝이 났다.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는 엠마를 보며 해리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이브리아! 왜 안 말려?”
“꽤 재밌어 보여서요.”
“하나도 재미없었거든!”
해리가 투덜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엠마의 눈에 다시 독기가 번뜩였다.
“엠마, 괜찮아. 잘 아는 사람이고,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한 것도 아냐.”
나는 엠마가 다시 해리를 공격하기 전에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 계셨는데요?”
“그건 조금 사정이 있어서……. 아무튼,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엠마의 도움이 필요했거든.”
“제 도움이요?”
엠마가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게 보였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이쪽을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쪽은 해리야, 엠마.”
“해리요?”
엠마가 해리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아가씨의 요정님과 이름이 똑같으시네요.”
“응. 왜냐면, 이 사람이 그 요정님이거든.”
“네?”
“이게 원래 모습이야. 개 모습은 변신이고.”
“……네에?”
엠마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해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개가 사람이고, 사람이 개라는데 한 번에 이해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저분이 개 요정님이시라고요?”
엠마가 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엠마가 다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가씨, 개 요정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셨어요?”
“결론이 왜 그렇게 나와?”
“개 요정님은 매일 아가씨 침대에서 자잖아요.”
내 잠자리를 정돈해 주는 엠마이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건 개잖아.”
“하지만 사람인데요?”
“그래도 개잖아.”
“그건, 그렇지만…….”
엠마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튼 이 개 요정님의 거취 문제로 엠마가 도와줄 게 있어.”
“내 거취?”
이번에는 해리가 물었다. 엠마가 오기 전에 마무리했어야 할 이야기인데, 다른 일로 실랑이를 벌이느라 정작 해리와는 한마디도 상의하지 못했다.
‘그냥 당사자가 다 모인 자리에서 한 번에 말하지 뭐.’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더 효율적인 것 같기도 했다.
“해리, 이제 해리를 사람으로 곁에 둘까 싶어요.”
“옆에 수상한 사내놈이 붙어 있으면 안 된다며?”
“네. 그런데 이젠 옆에 사람을 둬도 안 이상한 상황이 됐잖아요. 영주가 됐으니까 호위 기사 정도는 두는 게 평범하고.”
그렇지 않아도 인세티아 남작이 제5 서리 기사단 중 한 명을 호위로 삼으라며 재촉했다.
‘호위가 붙으면 더 불편하니까 계속 거절했지만.’
그게 해리라면 불편해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해리를 서리 기사단에 입단시켜서 내 호위로 지명하려고요. 그럼 옆에 있는 게 이상하지 않잖아요.”
“나보고 기사가 되라고?”
“네. 용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어렵사리 데려온 재야의 실력자로 소개하려고 하는데. 해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야 개 모습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환영이지.”
“그럴 줄 알았어요.”
나와 해리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엠마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럼 제 역할은요?”
“엠마는 해리의 신분을 보증해 줘. 평민이 기사단에 입단하려면 신분 보증이 필요하다며?”
“제 보증이 잘 통할까요?”
“내 직속 하녀인 엠마의 보증인데 누가 의심하겠어? 자료가 별로 없어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확신에 엠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엠마는 자신을 가져도 좋아. 내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제 자랑이지요.”
엠마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개 요정님의 신분 보증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어릴 적 구빈원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네요. 구빈원 출신의 아이들은 과거가 불투명해 추적하기 힘드니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네가 남작에게 먼저 해리를 추천해 주겠어? 남작이 내게 의견을 물으면 좋다고 할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해리는 평범하게 기사단의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이 편지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려던 엠마가 제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깨닫고 내게 내밀었다.
“마법사 협회에서 온 답변입니다.”
“고마워.”
이번에야말로 엠마가 인사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해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거야?”
“변신한 채로 있으면 욕구를 억누르기 힘들다고도 했고, 다른 쪽으로 해리가 필요하기도 해서요.”
“다른 쪽?”
“네, 해리의 얼굴이요.”
씩 웃으며 말하자 해리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내 얼굴이 어디에 쓸모 있는데?”
“잘생긴 얼굴은 원래 여기저기 쓸 데가 많아요.”
내 말에 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