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주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역시 청요석이었다. 이걸 해결해야 영지 자금에 여유가 생기고, 자금의 여유가 생겨야 와이번들에게 입힐 갑옷을 제작할 수 있었다.
“와이번의 갑옷을 만들러 왔다가 청요석 생산을 맡게 될 줄은 몰랐네요.”
작업장에 가득 쌓아 놓은 틀을 보며 라파쉬가 유쾌하게 웃었다. 모두 수액을 부어 굳힐 틀이었다. 크기와 부피를 의논한 뒤, 그에 맞춰 라파쉬가 제작한 것들이었다.
“마정석은 정해진 규격이 있어요. 그래야 새로운 마정석을 사서 장착할 테니까요. 우리 청요석도 그 규격을 따를 거예요. 그래야 기존 마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청요석을 사용할 수 있죠.”
“고생 많았어요. 갑자기 할 일이 바뀌어서 미안하고요.”
청요석은 대단한 물건이지만, 생산 과정은 드워프 입장에서 무척이나 단순했다. 아마 라파쉬에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닐 터였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이 세상에서 청요석을 제일 많이 만들어 본 드워프가 되는 거라고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지만요.”
“게다가 이걸 팔아야 미스릴을 구할 돈을 벌잖아요. 미래의 즐거움을 위한 투자죠.”
라파쉬가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눈을 찡긋거려 윙크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라파쉬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또 있어요.”
“영주님이 명령이라면 따라야죠. 편하게 하세요.”
“작업장에서 일할 인부들로 아이들을 고용할까 생각 중이에요.”
“아이들이요?”
“네. 구빈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있는데, 무작정 지원을 해 주는 것보다는 노동의 대가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청요석 제작은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으니 아이들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긴 노동 시간을 요구할 수 없었다. 배우는 속도도 어른에 비해 느릴 것이고, 통제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라파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같아요. 다행히 나와 눈높이가 맞는 인간들과 일을 하게 되겠네요. 목이 아프진 않겠어요.”
“음, 리쉬.”
나는 구빈원에서 봤던 아이들의 키와 눈앞의 라파쉬의 키를 비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줘서 고맙지만, 그 아이들이 리쉬보다 더 큰 것 같아요.”
“뭐라고요? 언제 인간 아이들의 발육이 그렇게 좋아졌죠?”
라파쉬가 장난스럽게 씩씩거렸다.
“수액 채취는 어른들에게 맡길 거예요. 검은 숲은 험하고 수액도 무거우니, 그것까지 아이들에게 맡길 순 없죠.”
“수액 채취도 내가 감독해야 할까요?”
“그건 새로 고용한 사람들 중에서 작업반장을 뽑을 거예요. 리쉬는 작업장만 신경 써 줘요.”
“훌륭하네요.”
“리쉬가 열심히 청요석을 만드는 동안 저는 판매를 고민해 봐야겠어요.”
“청요석은 정말 훌륭한 물건이에요. 마정석에 비해 공급할 수 있는 양이 많으니까 가격도 떨어질 거고, 파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요.”
“시장 논리로만 따지면 그런데요…….”
모든 것이 시장의 법칙대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특히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일수록 예외가 많았다.
“왕국에 마정석 광산이 하나밖에 없는 건 알아요?”
“그럼요.”
“그럼 제가 청요석을 팔면, 이 사람이 정말 싫어하겠죠?”
내 말에 라파쉬가 눈을 크게 떴다.
* * *
“나타 백작은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인세티아 남작이 조금 걱정스럽게 조언했다.
“하지만 물건을 파는 게 문제는 아니잖아요?”
“누구든 원하는 물건을 팔 자유가 있죠. 하지만 오랫동안 이 시장을 독점해 온 자가 있다면, 게다가 그게 힘이 강한 귀족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오베론은 충분히 강한 귀족이지 않나요?”
“나타 백작은 국경을 오랫동안 지켜 온 공로가 있는 가문이라 따르는 자들도 많고, 왕가와도 사이가 좋습니다. 전형적인 충신 이미지라고 할까요?”
“충신이라는 사람이 마정석을 그렇게 비싸게 팔아요?”
“충신도 물욕이 있습니다.”
“보통 심한 게 아니니 하는 말이죠.”
“아무튼, 정면으로 충돌하면 우리 쪽이 손해입니다. 그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왕실에서 그쪽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건 왕국 내에서 내 이미지가 나빠서겠죠?”
“뭐, 알고 계시는 대로입니다.”
왕국 내에서 내 이미지가 최악이라는 건 너무 명백한 사실이라, 남작은 빈말로도 아니라고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분이 유리한 상황이라면, 이 편지는 당연히 거절하시겠네요.”
나는 남작과 대화하며 작성한 편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내용을 확인한 남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타 백작에게 이걸 보내겠다고요?”
“네.”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저희가 마정석과 동일한 효과가 있는 돌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왕국에 팔고 싶습니다. 독점으로 마정석을 공급 중인 백작가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정확해요.”
“백작이 아, 그러십시오- 하고 답장해 줄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겠죠.”
“그걸 알면서 편지를 보내신다고요?”
“그게 목적이니까요.”
남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이 여론을 쥐고 있다면, 내가 먼저 그걸 가져와야죠. 왕실이 내 편을 들 수밖에 없게요.”
“그런 게 가능합니까?”
“99퍼센트 확신해요.”
“꽤 강하게 확신하시는 것 같은데, 왜 1퍼센트는 제외하십니까?”
“언제 어디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요. 1퍼센트는 항상 빼 두는 편이에요. 그래야 문제가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죠.”
“그럼 영주님께서 말씀하시는 99퍼센트의 상황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우선은 나타 백작이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거죠.”
남작은 여전히 그게 왜 우리에게 유리한 반응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편지를 노려보는 그에게 봉투까지 마저 내밀었다.
“자요. 나가면서 편지 보내 줘요. 나타 백작 앞으로.”
* * *
편지를 보내자마자 나타 백작은 곧장 답신을 보내왔다. 내용이야 뻔했다. 절대 안 된다. 차라리 그 돌을 우리에게 팔아라. 우리가 처리해 주겠다. 그러지 않으면 많이 피곤해질 테니 각오해라-를 조금 더 귀족적으로 돌려 쓴 편지였다.
“예상대로 보내 줬네요. 편지를 받자마자 찢어 버리고 답장도 안 보내 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답신을 받았으니 반 정도는 왔어요.”
“그런 걱정을 하긴 하셨습니까?”
“했죠. 1퍼센트 정도는.”
“어련하실까요.”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다음 계획을 물었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백작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혹시 그에게 청요석을 팔 생각이셨습니까?”
“설마요. 그러면 제값을 받기 힘들 텐데요. 이젠 왕실에 편지를 쓸 거예요.”
“왕실이요?”
“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왕실은 나타 백작과 가깝습니다. 오베론의 힘이 강해지는 건 견제하는 입장이고요.”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타 백작이 내가 청요석을 못 팔게 협박했어’라고 편지를 보낸다면, 당연히 나타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이익을 보는 주체가 나타와 오베론이 아니라, 나타와 제국이라면 누구의 편을 들어 줄까요?”
“제국이라면, 룬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룬 제국은 왕국의 오랜 적이었다. 지금은 협정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국경에는 늘 긴장이 감돌았다.
“만약 청요석을 룬 제국에 저렴하게 판다고 하면, 왕실이 어떻게 나올까요?”
내 말에 인세티아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적국에 귀한 청요석을 공급하겠다는 겁니까?”
어떤 국가든 마정석은 귀했다. 제국에도 마정석 광산이 두 개뿐이었다. 왕국보다 영토나 인구가 두 배 이상 많은 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개발을 한다고 해도 마정석 광산을 새로이 얻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정석과 똑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이 수입된다면? 제국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를 들여오려고 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쁜 이미지에 매국노라는 악명까지 더하시려는 겁니까?”
“진짜 그럴 생각은 없어요. 어쨌든 나도 왕국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입장이고, 이 나라가 강해지는 게 더 좋죠. 대부분은 그런 생각일 거예요.”
애국심은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강해야 나도 안전한 법이었다. 특히 내가 그 나라의 기득권층이라면, 나라의 체제 유지를 위해 힘쓰는 쪽이 더 좋았다.
“하지만 내 이미지가 그렇잖아요? 왕세자에게 이미 뒤통수도 맞았고, 나타 백작도 그렇게 나오니 그냥 제국에 팔겠다고 하면, 왕실은 진짜 내가 그러려나 보다 믿겠죠.”
“그럼……?”
“왕실 입장에서야 나타 백작을 설득해 우리가 청요석을 유통할 수 있도록 돕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나는 웃으며 왕실에 보낼 편지를 썼다.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가진 청요석의 존재, 나타 백작의 방해, 제국에 팔고 싶다는 나의 계획.
“마침 북쪽 끝에 치우친 에렐은 제국과도 가깝고, 여차하면 애국심 따위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브리아 오베론이 정말 그들과 거래를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완성된 편지를 남작에게 내밀었다.
“왕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이번에도 나가면서 편지 보내 줘요. 이번에는 왕실로.”
* * *
처음부터 왕실은 선택권이 없었다. 예정보다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왕실은 자신들이 나타 백작을 설득했으며, 왕국의 건전한 시장 경제를 지지한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왕실에 그 증명으로 그들이 나의 첫 구매자가 되어 주기를 부탁했다. 왕실이 청요석을 구매하는 것. 백 마디 약속보다 확실한 보증이었다.
“청요석 문제가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엠마가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를 비집고 차를 한 잔 내려놓았다.
“으, 그러게.”
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지다시피 구석에 놓아 버리고는 엠마가 가져온 차를 마셨다. 차를 머금자마자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살 것 같아.”
온몸에 퍼지는 단맛에 지쳐 있던 뇌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냐, 이걸로도 부족해. 죽겠어…….”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아래로 축 늘어졌다. 엠마의 안쓰러운 시선이 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일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 남작님은 이렇게 바쁘지 않으셨는데…….”
“남작은 오랫동안 영지를 돌봤으니까 일이 손에 익어서 그랬을 거야. 그에 비해 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거니까 요령이 없어.”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래도 청요석 판매는 물꼬를 텄으니까, 큰 산을 하나 넘은 셈이지.”
어느 정도 물량을 갖추면 제일 먼저 왕실에 청요석을 납품한 뒤, 마법사 협회에도 시제품을 보낼 생각이었다.
‘개인 고객보다는 기업 고객을 유치하는 게 자금 수급에는 더 안정적이니까.’
마법사 협회는 마도구에 마정석을 장착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 마정석이 힘을 다하면, 개인 고객이 마정석만 새로 사서 끼워 넣는 형태였다.
‘마법사 협회에 기존 마정석보다 10퍼센트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거래하자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물량을 확보하는 게 문제다. 지금은 구빈원 아이들로 초기 물량을 맞추고 있지만, 거래량이 늘어나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엠마, 구빈원 아이들은 어때? 일은 힘들지 않대?”
“오히려 즐겁다고 하는걸요. 급료도 높은 편이고요.”
급료는 일부러 높게 책정했다. 비싼 물건을 다루는 일이니 상품에 눈독 들이지 말고 일에 집중해 달라는 뜻이었다.
‘거기에 복지 비용까지 조금 더 추가했고.’
덕분에 벌써부터 영지에 소문이 퍼졌는지, 자신들도 청요석 작업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곧 작업장에 사람을 더 구할 거야. 영지에서 일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 취직하기 힘든,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고 싶은데.”
“그러시다면 남편을 일찍 잃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여인들은 어떠세요? 재혼하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막막해 생계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 그런 사람이 많아?”
“추워서 농사짓기 힘든 땅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사내들이 외부로 일을 많이 나갑니다. 바다로, 광산으로. 그러다 못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
엠마의 말 그대로였다. 서류만 봐도 에렐이 자생이 힘든 동네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너무 추워서 밀이 자라지 않는다. 주식이 빵인 세상인데 밀이 없으니 먹을 게 늘 부족했다. 그나마 추위에 강한 감자가 있어 다행이었다. 검은 숲에 살고 있는 멧돼지도 좋은 식량이었다.
‘기본 자원이 너무 부족한 땅이야. 영지가 부유해지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해.’
“하지만 이젠 일자리가 많아질 거야. 우리 영지가 꽤 유명해질 예정이거든.”
청요석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용기사가 있는 곳으로. 거기에 하나 더.
“온천을 개발해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해? 저번에 들어갔을 때 아주 좋았거든.”
“온천을요?”
“응. 이런 땅은 농사도, 목축도 힘들지. 관광밖에는 답이 없어.”
하지만 에렐은 한쪽에 치우쳐 있어 위치도 나쁘다. 이런 곳을 굳이 찾아오게 하려면 매력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용기사를 보러 와서, 온천에 몸을 녹이고, 돌아가는 길에 청요석을 저렴하게 사서 돌아가면…….”
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들어 올렸다. 온천 개발 계획을 담은 서류였다.
“환상적인 코스지.”
‘나중에 와이번 갑옷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셔틀버스 개념으로 운행해도 되지 않을까? 왕도와 에렐의 중간 지점 정도에 정류소를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이건 한참 뒤의 일이 될 것이다.
‘우선 하나씩 해 보자.’
나는 가장 아래의 빈 자리에 서명했다. 이브리아 오베론. 에렐의 영주. 아직까지 어색한 이름에, 어색한 직함이지만 뭐 어떤가?
‘내가 사는 동네가 풍요로우면 나도 좋은 거니까!’
지금은 에렐의 시장이 활발해져서 옷감 유통이 활발해지고, 좋은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 입은 옷은 천이 너무…….’
에렐에서 가장 좋다는 의상실에서 지은 옷인데도 왕도와는 품질 차이가 심했다.
‘어, 그러고 보니 제복!’
자고로 기사단의 상징은 옷이었다. 멋진 제복이 있어야 용기사들의 위용이 돋보이지 않겠는가?
‘용기사들을 에렐의, 아니, 왕국 전역의 아이돌로 만들어야 해.’
나는 의상실 방문 일정을 스케줄 리스트에 집어넣으며 개의 모습으로 낮잠을 자고 있는 해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 아이돌이라면 비주얼 센터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