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예상했던 대로 공작과 함께 걸어가는 길은 아주 어색했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5도쯤 내려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든 한 사람만 더 있었어도 덜 어색할 텐데.’
무슨 생각인지 공작은 따라오려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나와 단둘이 걷는 것을 택했다.
‘굳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앞을 향해 묵묵히 걸으며 공작을 힐끗거렸다. 사실 나는 공작과는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진짜 이브리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작에서 그리 사이좋은 부녀로 그려지지 않은 걸 보면, 또 내가 왕도에서 짧게나마 겪은 걸 생각해 보면 진짜 이브리아도 이런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혹 다른 시점에 빙의했다면 가까워질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브리아에게 빙의한 시점은 이미 그녀가 엄청난 사고를 친 뒤였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공작은 늘 싸늘했다.
‘그 싸늘한 얼굴마저도 얼마 못 봤지. 며칠 후 곧장 에렐로 쫓겨났으니.’
공작은 힐끗대는 내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다녀온 라파쉬의 작업장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좋아진 것 같다.”
내가 라파쉬의 작업장까지 남은 거리를 열심히 가늠하는 동안 할 말을 찾은 것인지, 공작이 겨우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내가 아닌 정면을 향한 채였다.
‘벌을 주려고 에렐로 보냈더니, 왜 이렇게 얼굴이 좋으냐는 말인가?’
나는 잔뜩 경계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다들 제게 친절해서요.”
“친절? 북방 사람들이 말이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공작이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픽 웃었다. 비록 싸늘한 비웃음이었지만, 나와 대면한 뒤 처음으로 보는 웃음이었다.
‘비웃는 것도 웃는 거라고, 얼굴이 훨씬 부드러워 보이네.’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요.”
긴장이 풀어진 내 목소리를 공작도 알아챘는지 처음으로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도 잠시뿐이어서 그의 시선은 금세 앞으로 되돌아갔다.
“네가 여기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의아해져 공작을 보았다. 내가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 쓴 건 청요석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공작이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제가 여기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계셨어요?”
“남작이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니까.”
하긴.
‘엄청난 사고를 쳐서 에렐로 유배를 보낸 셈이니까 감시가 필요했겠지.’
남작이 공작에게 정기적으로 내 동태를 보고하는 건 당연했다. 상황을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니 공작이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네가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내 귀에는 그 말이 다급한 변명처럼 들렸다.
‘뭐, 그럴 리가 없으니 내 기분 탓이겠지만.’
그냥 나는 최대한 참회하고 회개하는 딸처럼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사고를 쳐서 에렐로 쫓겨난 몸인걸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건 당연해요.”
이 정도면 잘 대답한 것 같은데,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 말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쫓겨나? 감시?”
“너무 직접적으로 말해서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지금 내가 그것 때문에 그런 것 같으냐?”
“그게 아니시면…….”
말끝을 흐리니 공작이 얼굴이 더 무시무시해졌다.
“죄송합니다. 왜 화나셨는지 모르겠어요.”
내 솔직한 말에 공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됐다. 너한테 화난 게 아니니 네가 죄송하다고 할 거 없어.”
‘그 얼굴로 화 안 나셨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공작님…….’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지금 공작은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 괜히 내게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실수로라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입을 꾹 다물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내 다짐이 무색하게도 공작이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 와서 애완견을 들였다지? 원래 개를 싫어하지 않았나?”
공작이 이번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 뒤를 졸졸 따르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진짜 이브리아는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지만.’
그때 이브리아의 관심사는 온통 카시안이었다. 한 사람이 타인에게 쏟을 수 있는 애정을 100이라고 한다면, 이브리아는 100 전부를 카시안에게 쏟았다. 사랑에 빠져 가족이며 친구도 모두 등한시했다. 고작 애완동물에게 줄 애정이 남아 있었을 리가 없었다.
“에렐에 혼자 있으니 외로워서요. 왕도에서는 사람도, 할 일도 많았는데, 여긴 지나치게 조용하거든요.”
“글쎄. 이곳이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은 것 같던데. 목재 문제에, 와이번에, 또 청요석까지.”
공작이 내가 엮인 문제들을 하나씩 차례로 언급했다.
“이야기만 들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더군.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일을 다 벌이다니.”
제대로 된 정답이라 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야 뭐…….”
슬그머니 딴청을 부리며 눈을 굴리니 어느새 라파쉬의 작업장이 보였다.
“아! 저기예요.”
나는 반갑게 라파쉬의 작업장을 가리켰다. 그녀의 작업장이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리쉬!”
반갑게 라파쉬를 부르며 작업장 문을 여는 내 뒤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라파쉬는 나와 공작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푸집으로 찍어 낸 것 같아…….”
아마 자기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인 것 같았다. 혼잣말치고는 소리가 큰 중얼거림에 공작은 얼굴을 굳혔고,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 저기, 리쉬. 이분은 오베론 공작님이세요. 제 아버지시죠.”
“네. 이미 알았어요. 이렇게 닮은 두 사람이 부녀가 아니면 그게 더 문제일 테니까요.”
라파쉬는 연구 대상을 보는 것처럼 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공작의 얼굴이 지금보다 더 굳어지기 전에 재빨리 라파쉬의 발을 꾹 밟았다.
“윽!”
‘라파쉬, 자기소개요, 자기소개!’
다행히 라파쉬가 내 눈빛을 읽었는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아, 네! 그렇죠! 저는 라파쉬입니다, 공작님.”
“그쪽이 이 청요석을 만들었다고?”
공작이 품에서 청요석을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편지와 함께 보냈던 그 청요석이었다.
“예. 마정목, 그러니까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흑철목의 수액으로 만들었죠.”
“정말 수액으로만 이걸 만들었단 말인가? 다른 가공 없이, 그냥 수액을 굳히기만 했다고?”
“물론입니다.”
라파쉬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공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라파쉬가 인간이었다면 이게 사기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드워프였다. 그들은 인간들과 달리 물욕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로 사기 행각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신중했다.
“흑철목은 에렐의 검은 숲에서 자라지. 물론 드물게 다른 지역에서도 자라지만, 이렇게 거대한 숲은 에렐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저희 드워프 마을에도 단 한 그루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흑철목의 수액으로 만드는 청요석이 얼마나 인간 사회를 바꿔 놓을지도 알겠군.”
“네. 그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청요석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준 이유가 뭐지? 순수한 선의인가?”
“선의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의도 아니고요. 저는 드워프이고, 저희는 물질을 탐구하는 걸 좋아하죠. 여기서도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라파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전해 드린 지식을 선의나 악의로 만드는 건 결국 받아들이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검은 숲의 주인이신 공작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느냐에 따라 제가 전한 지식이 선의가 될 수도, 악의가 될 수도 있겠죠.”
“내가 악의를 선택한다면?”
“솔직히 말하면 관심 없습니다. 그건 인간 사회의 문제이지, 저희 드워프들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라파쉬가 말끝을 흐리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저희도 결국 선의를 따르는 종족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브리아는 선의에 어긋날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 아버지이신 공작님께서도 그러시겠죠.”
라파쉬의 말에 공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브리아를 꽤 신뢰하는군.”
왕도의 귀족 사회에서는 나를 이런 식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선의나 악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고민도 없이 악의를 선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라파쉬는 오히려 공작의 말이 이상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전 이브리아를 신뢰하죠. 그건 저희 마을 사람들 전부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째서?”
“그거야 이브리아가 성ㄱ……”
“성공!”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놀라서 라파쉬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드워프들의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해서, 그래서 절 믿는 거예요. 그렇죠, 라파쉬?”
“뭐, 그게 시험이라면 시험이긴 하죠.”
라파쉬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드워프들의 시험? 그건 또 뭐지?”
“평범한 시험이었어요. 그보다 앞으로 청요석을 어떻게 하실 건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슬쩍 말을 돌리며 라파쉬에게 눈을 돌렸다.
“방법만 알려 주면 누구나 청요석을 만들 수 있는 거죠? 혹시 드워프들의 손재주가 특별히 필요한 일인가요?”
“아뇨.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어요. 정해진 시간만 잘 지키면 순수한 마력 결정을 만들 수 있죠. 시간 맞추는 건 손재주가 없어도 가능하니까요.”
“그럼 에렐 영지 사람들을 고용해서 청요석을 생산하면 되겠네요. 청요석도 얻고, 영지도 활성화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겠어요.”
동의를 구하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표정의 변화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여러모로 평범한 발언들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에렐에 정을 많이 붙인 것 같구나.”
“괜찮은 곳이니까요.”
내가 평생을 살아야 할 곳이었다.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야만 했다. 하지만 지내다 보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정이 붙을 정도로 에렐은 괜찮은 동네였다. 평생 이곳에서 지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
내 말에 공작의 얼굴이 복잡 미묘해졌다. 할 말을 찾는 듯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그가 찡그린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와이번 이야기로 왕도가 떠들썩하다. 다들 용기사를 보고 싶어 하지.”
“그렇겠죠. 용기사라니, 이름부터 멋지잖아요.”
대륙은 이제 평화의 시대였다. 국경은 안정되었고, 전투는 마수와의 싸움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기사들의 위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귀족의 호위를 맡거나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같은 이미지가 되었달까.’
전투에 앞장서 싸우는 고귀한 전사? 그런 환상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던 와중에 멀리 북방에서 와이번과 치열하게 싸우는 기사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들이 와이번을 길들여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이야기였다. 평화롭게만 살아가는 왕도 사람들이 이 소식에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기사에 대한 오래전의 환상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였을 테니 말이다.
‘아직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용기사의 모습은 없지만.’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 곧 멋진 용기사들이 탄생할 것이다.
“이번 일로 왕실이 에렐을 주목하고 있다. 와이번 토벌이라는 명분은 없어졌으니 직접 개입하진 못해도,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하지만 아무리 신경 쓰여도 이곳에 개입할 수는 없겠죠.”
“그래. 왕도를 포함한 일부 왕실 직할령을 제외하면, 각각의 영지는 독립성을 가지니까. 하지만 그게 간접적인 간섭까지 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왕은 권력자고, 무슨 수단이든 사용할 수 있지.”
공작이 작업대 위에 올려 두었던 청요석을 손에 들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조용히 숨죽여 살 것인지, 손대지 못할 정도로 강해질 것인지.”
가만히 청요석을 바라보던 공작이 강한 힘을 주자, 파란 돌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하지만 포기하고 조용히 사는 건 오베론이 아니지.”
에메랄드 같은 공작의 시린 녹안이 나를 향했다. 녹색은 따뜻한 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멍하니 공작의 눈을 보고 있으니 그가 드물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래. 이브리아, 너도 오베론이었지.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품속의 어린아이로만 생각했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녹색 눈동자에 서려 있던 서늘한 기색이 사라지자 한결 따뜻하게 느껴졌다.
“좋다. 너의 뜻대로 하자. 스스로 기반을 만들어 당당하게 왕도로 돌아와라.”
“……네?”
‘뭐라고요? 제가 왜 왕도로 돌아가죠?’
“왜? 그러기 위해서 힘을 키우고 있는 것 아니었나?”
“별로 그런 생각은 없었는데요.”
오히려 에렐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이곳을 좀 살 만하게 만들어 볼까 했던 건데.
“감히 내 딸을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 왕세자가 승승장구하는 걸 지켜볼 순 없지. 오베론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공작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간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오베론 가문을 무시하고 다른 여자를 선택한 왕세자의 행동에 그도 꽤 화가 나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에렐의 전권을 네게 맡기마. 인세티아 남작이 널 보좌해 줄 거야. 에렐로 향하는 내내 고민했지만, 이렇게 널 보니 확실히 알겠다.”
공작이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선언했다.
“이브리아, 오늘부터는 네가 에렐의 영주다.”
“……예? 제가 영주요?”
‘난 그런 감투 필요 없는데?’
나의 목표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호의호식하는 귀족의 딸로 사는 거였다. 영주? 그런 귀찮은 일을 내가 왜 해!
“저는 영주라는 과분한 자리를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충분히 있다. 오늘 보고 확신했어.”
“남작! 남작의 자리를 뺏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훌륭한 영주니까요. 에렐 사람들 모두 그를 존경하고 있죠.”
“이미 인세티아 남작과도 이야기한 사안이다. 그도 동의했어. 네가 영주로서 에렐을 이끌어 준다면 좋겠다고 하더군.”
인세티아 남작, 너마저!
경악하는 나를 앞에 두고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좌절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내 딸을 과소평가한 모양이구나.”
공작이 내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내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가오는 생일이 지나면 너도 성인이 되지. 이번 생일 파티는 왕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해 주마.”
진짜 이브리아가 들었다면 무척이나 기뻐했을 말이었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도 난 방법을 찾아 너를 왕도로 데려왔을 것이다. 이것만은 믿어도 좋아.”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널 외롭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에렐에 보낸 것도 왕도의 소문으로부터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기저기 사건을 만들고 다녔지만 말이다.”
공작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구나.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일정을 최대한 빼서 달려온 터라 곧바로 돌아가야 해. 네가 돌아오길 왕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