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검술 훈련이 거듭될수록 라이오넬은 눈에 띄게 실력이 늘어났다.
“이상하네요. 분명 제가 아가씨를 가르치고 있는데, 왜 제 실력이 느는 것 같죠?”
“그러게요. 참 신기한 일이라니까.”
하지만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모두 성검 유피테르라는 초특급 족집게 강사를 스승으로 둔 덕분이었다. 문제는 라이오넬의 실력이 가파르게 수직 상승하는 동안, 내 실력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라이오넬은 어설프긴 하나 몇 년간 기사 수행을 해 왔다. 그런 사람과 똑같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의 발전, 그걸 바랐을 뿐인데.
‘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지?’
보름이나 꾸준히 단련했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분명 동작은 라이오넬과 똑같이 하고 있었다. 유피테르가 눈썰미가 좋아 금방 동작을 따라 한다고 칭찬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이브리아의 몸은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이라는 게 붙질 않았다. 근육이 붙질 않으니 근력이 생길 리가 없고, 근력이 없으니 검을 고작 10번만 휘둘러도 팔이 덜덜 떨렸다. 만약 실전이라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 동작을 하면? 고작 한 번에 녹초가 됐다.
[선천적으로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 있습니다. 검사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이죠. 마력을 타고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마법사들은 근력이 잘 안 생긴다고요?]
[예. 아마 마력이 근육 생성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는 마검사라는 개념이 없었다. 마법을 쓰는 사람은 마법만 쓰고, 검을 다루는 사람은 검에만 매진했다.
[주인님께서도 그런 사례인 듯하니,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좌절하는 나를 보며 유피테르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검사로서의 재능은 없지만, 마력을 타고 났으니 거기에 만족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쩜오라고요.]
[쩜오요?]
[그래요. 쩜오. 내 마력치가 0.5라고요. 그 눈곱만한 마력 때문에 내 몸에 근육이 잘 안 붙어서 검도 제대로 못 배운다고요? 이따위 마력 차라리 없는 게 나았겠어요.]
[그…….]
차분하게 나를 잘도 위로하던 유피테르의 말문도 턱 막혔다. 있으나 마나 한 0.5의 마력 때문에 일반인보다 못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완전 짜증 나…….’
옆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라이오넬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 유피테르는 라이오넬이 1을 제대로 배우면 100의 성과를 낼 수 있는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아마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배움을 받지 못해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을 거라고.
그에 비해 나는 100을 제대로 배우면 겨우 1의 성과를 낼까 말까 싶은 최악의 신체 조건을 가진 것이다.
이쯤 되니 유피테르에게 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뽑힌 거예요?]
유피테르를 뽑기 위해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다. 수백 년 동안 아무도 검을 뽑지 못해 최근에는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날고 긴다는 검사들이 수없이 유피테르의 시험을 받았을 것이다.
유피테르는 그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검사들을 모두 거부하고 왜 나를 선택할 걸까? 그를 뽑기 위해 도전했던 전설의 검사들이 성검의 주인이 나라는 걸 보면 상당히 억울해할 것이다.
[그건, 주인님께 제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피테르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대단한 재능을 지닌 분들이야 많았지요. 하지만 그분들은 제가 없어도 이미 검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꼭 필요할 것 같은 분을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정했습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해석해 보면 숨은 뜻이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거, 내가 유피테르를 뽑으려고 시도한 사람 중에서도 제일 형편없는 신체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죠? 이 인간 나 없으면 어떻게 사나 싶어서 뽑혀 준 거라 이거죠?]
[…….]
유피테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백 년 만에 나온 저주받은 신체…… 성검이 인정한 쓰레기 몸…….’
그게 바로 접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검술 훈련을 하는 의미가 없겠는데.’
나는 무겁기만 한 목검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옆을 보니 라이오넬은 목검보다 훨씬 무거운 진검을 나무 작대기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어설펐던 자세는 어느새 반듯하게 변해 제법 기사님 태가 났다. 이젠 누가 봐도 그가 번듯한 기사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 터였다.
‘어설픈 엑스트라한테도 밀리다니. 희망이 없다, 이브리아 오베론.’
그렇게 목검을 노려보며 좌절하고 있는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무 하나 없는 연무장에 웬 그늘?’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검은 숲에서 와이번 앞에 있는 나를 구해 주려고 했던 기사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연신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서로를 떠밀었다.
야, 네가 해. 아니, 네가 해!
그들의 눈빛이 뻔히 읽혔다. 가만히 두고 봤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이 상태일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죠?”
내 질문과 동시에 양쪽에 선 두 사람에게 떠밀린 기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저는 제5 서리 기사단의 벤자민입니다.”
한 사람이 인사하자 양옆에 선 두 사람도 재빨리 제 이름을 덧붙였다.
“저는 데인입니다.”
“저는 리제토고요.”
얼굴이야 익숙하지만 이렇게 이름까지 듣는 건 처음이었다. 반갑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부터 저희도 아가씨와 함께 훈련할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저랑 함께 훈련을요? 왜요?”
‘아가씨의 취미 생활을 돕느라 훈련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은 줄 알았는데.’
기사들이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바꿔 훈련에 동참하겠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게, 라이오넬이.”
벤자민이 내 옆의 라이오넬을 힐끗거렸다.
“최근 갑자기 실력이 좋아졌기에 놀라서 비법을 물었더니, 전부 아가씨께서 시키신 대로 했다지 뭡니까? 그래서 저희도 아가씨의 고견을 듣고자…….”
“그러니까, 날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나한테 도움을 받겠다고요?”
“아가씨께선 누구에게 도움 받을 필요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던걸요. 이미 검에는 통달하신 분이라고요.”
“……네? 내가요?”
“예. 라이오넬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라이오넬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눈을 빛냈다.
“검을 휘두르시는 자세만 봐도 아가씨께서 검에 통달하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응. 자세는 좋지, 자세는. 그걸 10번도 못 한다는 게 문제지만.’
“게다가 아가씨께서 검에 통달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제게 그런 정확한 조언을 해 주셨겠습니까?”
‘아니. 그건 내가 해 준 게 아니라 성검이 해 준 조언이야. 성검이니까 당연히 검에는 통달했지.’
“훈련에 참여하겠다고 하신 것도, 사실은 저희를 도우려고 그러신 거죠?”
‘아니. 그건 정말로 검을 배워 보려고 한 거였는데. 내 몸이 이렇게 쓰레기인 줄도 모르고 그만.’
내가 마음속으로 한 반박을 들었을 리 없는 기사들은 라이오넬의 말에 감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희를 도와주시려고, 그러려고 오신 겁니까?”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를 귀찮다고만 생각을…… 용서하십시오!”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가씨! 잘 부탁드립니다!”
씩씩한 인사가 연무장을 울리자 나는 상당히 불안해졌다.
‘익숙하다.’
이런 오해. 이런 흐름.
‘내일이면 내가 여기 있는 기사들의 선생님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 * *
나는 연무장 그늘에 쪼그려 앉아 훈련하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막히는 부분이 생긴 기사가 찾아와서 질문을 하고, 나는 유피테르의 조언을 내 입을 통해 전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기사는 내 조언-사실은 유피테르의 조언-대로 움직여 보고, 엄청나게 감격에 찬 눈으로 ‘감사합니다, 아가씨!’를 외치는 것이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거늘.’
성검은 내가 얻었는데, 덕은 왜 이 기사들이 보는가? 회의감에 젖어 한숨을 내쉬니, 오랜만에 내 옆을 지키고 앉은 해리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성검은 필요 없다고 했잖아. 당장 팔아 버려.]
[설마 내가 검술에 재능 없다는 거 알았어요?]
[딱 보면 알지. 네 손목을 봐. 그게 어디 검을 들 손목이야?]
나는 팔을 들어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가늘고, 약해 보이는 손목. 확실히 검을 드는 게 안 어울리기는 했다.
‘그래도 영화에서 보면 연약해 보이는 언니들이 검 휘두르고, 총 쏘고, 주먹 날리고 다 잘하던데.’
[게다가 평소에 너 하는 거 보면 딱 나오지. 몸 쓰는 거에는 재능 없다는 거.]
[그렇게 잘 알았으면 내가 검술 배우겠다고 할 때 말리지 그랬어요?]
[내가 말린다고 네가 그걸 들어?]
[……아마 안 듣겠죠.]
[거봐. 악마의 조언을 듣는 사람은 다들 뒤가 구린 인간들이거든. 근데 넌 아니니까.]
해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웃는 소리와 함께 연무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소란의 원인을 알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커다란 기사들에게 시야가 가려 입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내가 처음 연무장에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긴장해 정식 인사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 여기 기사들한테 저런 인사를 받을 사람은…….’
오베론 공작뿐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기사들을 뚫고 오베론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훑어보던 공작이 제 옆에 다가와 속삭이는 기사의 말에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차갑고 매서운 인상. 이브리아와 많이 닮은 외모였다. 빛을 보지 못한 듯한 하얀 피부나 짙은 적갈색의 머리, 녹색의 눈동자까지도 비슷했다.
‘누가 봐도 부녀지간이라니까.’
소공작 아치볼드가 죽은 공작 부인을 닮았다면, 이브리아는 공작을 완전히 빼닮았다. 이브리아와 닮은 눈이 똑바로 나를 향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거울 속 지금의 나와 닮은 공작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내가 이브리아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나고는 했다. 왕도에서 마지막으로 본 이후 몇 개월 만의 만남이니, 그런 기분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서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공작이 똑바로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기사들이 서둘러 따라붙었으나 공작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공작은 홀로 당당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를 보며 해리가 물었다.
[네 아버지야? 생긴 건 그런데.]
[맞아요.]
[그런데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해리의 말에 유피테르도 동의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이건 마치 원수를 보는 눈입니다, 주인님.]
그들이 확인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이브리아와 오베론 공작은 썩 원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브리아가 그렇게 사고를 쳤으니, 부녀 관계가 원만하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야.’
나는 공작을 보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편지를……”
공작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도 열렸다. 겹쳐진 말소리에 나와 공작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내가 먼저 물러서자 공작이 사양하지 않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지를 보냈더구나.”
“네. 무사히 받으셨나 봐요.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걸 보면.”
공작이 왕도를 떠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높은 사람이 어딘가로 움직이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법이라, 먼 거리로의 이동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괜한 움직임으로 왕가의 오해를 살 필요는 없으니 말이지.’
하지만 청요석은 공작이 직접 움직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공작이 에렐을 찾아오는 일은 원작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사건이었다. 덕분에 진짜 이브리아는 에렐에 보내진 뒤 다시는 가족을 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청요석의 발견부터 원작이 틀어진 건가?’
청요석을 발견하게 된 건 내가 드워프를 데려왔기 때문이고, 내가 드워프를 데려온 건 와이번을 길들였기 때문이고, 내가 와이번을 길들인 건…….
이런 식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원작이 틀어진 시작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사실 그 시작점을 찾는 게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주인공들이 행복한 세상일 텐데, 뭐. 나는 내가 먹고사는 일에나 집중해야지.’
나는 빙긋 웃으며 서늘한 얼굴의 공작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보낸 게 보름 정도 전이니, 날짜를 따져 보면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출발한 거겠네.’
“흑철목이 청요석이 된다는 걸 발견한 건 라파쉬라는 드워프예요. 작업실로 가면 바로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그쪽으로 가세요, 공작님. 어차피 공작님도 제 얼굴 보면 답답하시잖아요.’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나지만, 공작은 달랐다.
‘내 유일한 돈줄인데. 절대로 밉보이면 안 돼.’
하지만 내 미소를 본 공작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나 또 악역 미소를 지은 건가? 그냥 웃지 말걸.’
그렇게 후회하는 사이 공작이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작업실까지 네가 안내하지 않는 건가?”
질문인 것 같지만 이건 절대로 질문이 아니었다.
‘나보고 안내하라는 말이지.’
어쩌겠나? 나는 을이니, 까라면 까야 한다.
“아니에요. 제가 안내할게요. 라파쉬의 작업장은 저택 밖에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면 라파쉬를 저택으로 부를까요?”
“직접 가지.”
“그리 멀진 않아요. 하지만 말이나 마차를 타면 금방……”
“아니. 걸어서 가겠다.”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불편하게 걸어서 가겠다니.
‘걷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신가?’
그런 사람이 있긴 했다. 버스로 두어 정거장 거리라면 그냥 걷는 걸 선택하는 사람이.
‘나라면 무조건 버스지만 말이야.’
개인 성향이니 누가 뭐라고 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이쪽이에요.”